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21화 (121/175)

121. 먹어서 증거 인멸

윤지우는 이미 신용카드 한 장을 운동화에 숨겼다. 그 카드로 먹을 건 물론 필요한 건 모두 샀다. 이미 한 번 오 피디를 속였던 지라 두 번째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번 돈의 절반 이상이 무슨 재료 사는 데 다 나가냐.」

이정환이 혀를 찬다.

장사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손님이 몰려왔고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식당과 비교해서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회전율이었다.

식당은 말 그대로 식사를 하기 위한 장소였기 때문에 회전율이 빠른 편이었다. 메뉴도 단일화했기에 음식도 재빠르게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점이었다. 막걸리와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다 보면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았다.

즉 바쁘긴 바쁜데, 매출은 그만큼 적어진다. 안주를 시키고 나면 술은 추가 주문이 들어오지만, 그렇다고 주류를 마음껏 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괜히 취한 사람이 생겨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기에 주문에 제한을 걸어 두었다.

「우리 이제 식량도 다 떨어지지 않았냐?」

매일 한사람 당 5유로씩 숙박비를 지불해야 한다. 처음에는 딱 한 번 5유로를 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숙박비 5유로 받겠습니다.]

아침이 되자마자 숙박비를 걷는 오 피디였다.

회전율이 좋지 않아 순수익이 바닥을 긴다. 하루 벌어서 재료를 수급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고 컬러링북을 열심히 해도 시원찮았다. 장사를 하려면 그만큼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컬러링북을 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 다 떨어졌다. 이제 어쩌지?」

이정환은 막막한 얼굴이었다.

초반 윤지우의 카드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았다. 장사로 돈을 제대로 만지지 못해도 숙소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잔뜩 있었기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곳간을 꽉 채워 놔도 계속 보충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텅 빌 거라는 걸 잊었다.

「삼촌!」

윤지우는 이번 예능 촬영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오 피디 예능은 단연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오 피디가 제작하는 예능의 멤버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하지만 시즌1에서 윤지우는 냉정하게 말해 존재감이 없었다.

이정환은 멤버들의 리더였고 조이수는 예능감이 좋아서 알아서 분량을 챙겨 먹었다. 유수한 역시도 노예들의 에이스라는 별명이 붙으며 존재감이 있었다. 그에 비해 윤지우는 존재감이 빈약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여자였다는 것 외에는 캐릭터가 전무했다.

「그거 아세요?」

그렇기에 윤지우는 이번 시즌에서는 변화를 모색했다.

「발은 두 개예요.」

윤지우 역시도 조이수처럼 오 피디의 패턴을 파악했다.

오 피디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몸수색을 할 것이다. 가방이나 핸드폰, 지갑을 뺏는 건 물론 주머니도 샅샅이 뒤질 것이다. 하지만 발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들켜도 그것만으로도 작게 분량이 생기니 나름 괜찮은 결말이었고, 들키지 않는다고 하면 더 좋은 그림을 만들 수 있다.

「짠!」

지금까지 윤지우는 운동화 깔창 밑에 돈을 숨기고 다녔다. 숨겨 놓은 신용카드는 빼앗겼지만, 아직도 비장의 수를 아껴 놓고 있었다. 쓰기 좋은 순간을 마주하는 순간 꺼낼 무기였다.

「쉿.」

조심스럽게 양말에서 돈을 꺼냈다.

미리 숙소에서 깔창 밑에 있던 지폐를 양말에 넣어 둔 윤지우였다. 처음에 카드를 꺼낼 때는 떨려서 심장이 쿵쾅거렸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긴장감을 즐기고 있다.

빳빳한 100유로.

작은 돈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 노예들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촬영 남은 시간은 사흘. 그 시간 동안 100유로는 귀중한 자금이 될 것이다.

「자, 잘했다.」

이정환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고는 지폐를 바로 주머니에 쏙 넣었다. 훔친 돈은 빨리 써야 제맛이다.

노예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식당 구석에서 벌어진 은밀한 움직임은 제작진이 포착하지 못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지우에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당하게 될 줄은.

「어, 어디 가세요?」

장사를 끝내고 기운 없이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노예들이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점차 노예들은 돈에 굶주리게 되었다. 장사는 잘되지만 효율이 좋지 못했고, 이정환과 조이수는 어떻게 하면 아끼며 살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오늘은 외식하려고.」

「예?」

「카메라 너무 따라오지 마. 방해돼.」

「돈 있어요?」

오 피디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잖아.」

오 피디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지만, 이정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심해 봤자 소용없다. 이미 돈은 이정환에게 들어왔고 지금 오 피디는 노예들의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히 모른다. 100유로 정도는 속일 수 있다. 즉 편법으로 얻은 100유로는 먹어서 증거 인멸할 생각이다.

이정환은 처음으로 외식을 감행했다. 유럽까지 와서 한 번쯤은 그 나라의 음식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윤지우 덕분에 마트에서 잔뜩 산 먹거리로 한동안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숙소에서 먹는 것과 번듯한 식당에서 먹는 건 역시 달랐다.

「수한아, 여기 근처에 맛집 있다고 했지?」

이정환이 물었다.

「아, 맛집인지는 모르겠고요. 어제 오신 손님이 자기가 주인이라고 꼭 오라고 하셨어요.」

「싸게 해 준대?」

「네.」

「역시.」

유수한의 얼굴은 어딜 가든 통한다.

벌써 이 소도시에 잘생긴 동양 청년에 대한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유수한은 어딜 가나 사람이 몰렸다. 시장에서 물건 살 때도 얼굴값을 톡톡히 했다. 말하기도 전에 할인을 해 주고 어떨 때는 공짜로 줄 테니 오라는 상인도 있었다.

「우리 수한이 얼굴이 노예들의 복지다.」

유수한은 그저 웃었다.

지금 유수한은 기분이 좋았다. 독일에서 하는 첫 외식이었다. 어떤 이국적인 음식이 있을지 기대된다. 노예식당 촬영은 언제나 좋았다. 외국에서 진행하는 촬영이라 유수한이 모르던 세상을 알려 주곤 했었다. 그렇기에 일하는 게 아니라 마치 노는 듯한 느낌이다.

「맥주 한 잔씩 해야지?」

독일 하면 맥주다.

유수한은 요즘 조금씩 술을 한 잔씩 마시고 있다. 매일 마시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철저히 조절하고 있다. 지금은 예능 촬영 중이니 한 잔씩 술을 곁들이지만, 집에 돌아가면 다시 금주를 지킬 생각이었다.

「슈바인 학센이랑 슈니첼도 먹어 보자.」

「소시지는요?」

「그래, 그것도 시키자.」

슈바인 학센은 쉽게 말해서 족발이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다. 유수한은 처음 보는 메뉴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이수와 이정환이 각각 슈바인 학센을 하나하나 먹기 쉽게 손질하고 있었다. 뒤이어 나온 슈니첼도 먹기 좋게 썰어 놓는다.

슈니첼은 쉽게 말해 독일식 얇은 돈가스였다. 감자튀김과 함께 곁들여 나왔고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자, 이제 먹자!」

동시에 포크를 든다.

홀린 듯 가장 먼저 슈바인 학센부터 먹어 보았다. 한국에서 주로 먹던 족발이 생각나지만, 식감은 달랐다. 기름진 것이 맥주 안주로 딱이었다.

「아.」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유수한이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왜? 맛없어?」

「아니요.」

너무 행복해서요.

솔직한 한 마디였다. 고된 노동을 하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맥주를 마시니, 그간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곳 사장님은 유수한의 얼굴을 무척이나 흡족해하기에, 버선발로 노예들을 반겼다. 핑거소시지는 서비스라며 호탕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른다.

- 유수한 먹는 것에 진심인 자 ㅋㅋㅋㅋㅋㅋ

- 진짜 유수한 먹는 거 복스러워 ㅋㅋ 너모 귀여워서 돌아버릴 것 같아

└ ㅇㅈ 진짜 귀엽게 먹어 ㅠㅠㅠㅠ

└└ 먹을 때 눈 반짝거리는 거 진짜 졸귀탱 ㅠㅠㅠㅠㅠ

└└└ 멍뭉이 같아 ㅠㅠㅠㅠ 진심 넘나 귀여워 ㅠㅠㅠㅠㅠㅠ

- 슈바인 학센... 저거 존맛이야 ㅠ 내가 100원만 더 있었어도 독일 티켓 끊었다

└ 계좌 불러봐 100원 부쳐줌

└└ 나도 100원 보내줄게 꼭 독일에서 인증샷 보내줘야 함 ㅇㅇ

└└└ ㄱㅆ) 사실 100만원 모자람 100만원 줄 사람?

윤지우가 준비한 100유로는 먹는 데 탕진했다.

원래 없던 돈이었기에 먹는 걸로 한순간에 쓰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메뉴 하나는 서비스를 받았고 생맥주까지 마시며 배불리 먹었다.

「이거 먹은 거 제하면 우리 이제 얼마 남았냐?」

「앞으로 숙박비는 충분히 낼 수 있고요. 좀 허리띠 졸라매면 어떻게 살 만하지 않을까요?」

「네, 맞아요. 수한 오빠가 팁도 잘 받잖아요.」

독일은 팁 문화가 있었다.

서빙과 계산을 함께 하는 유수한이 특히 팁을 자주 받았다. 물론 오 피디가 사사건건 방해했다. 이 주점은 팁을 받지 않는다고 유수한에게 주는 팁을 모두 차단했다.

물론 오 피디 눈을 피해서 유수한의 주머니에 팁을 쏙쏙 넣어 주는 손님도 많았다. 여기 식당 주인도 그랬다. 유수한이 무슨 말만 하면 기분 좋다는 듯 웃었고 10유로나 되는 팁을 챙겨 주었다.

「수한아. 가만 보니까 너는 자영업자 해도 잘되겠더라.」

조이수가 가만 유수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음식이 더럽게 맛없어도 너만 가게에 있으면 장사가 될 것 같아.」

「네?」

「진짜. 가끔 널 보면 감탄한다.」

영문 모르겠다는 눈으로 유수한은 조이수를 보았다.

「나랑 사업할래?」

그 말을 하는 조이수의 눈이 빛난다. 마치 값비싼 보석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비용은 다 내가 낼게. 넌 가끔 얼굴만 비추면 돈 싹 쓸어 모을 것 같은데.」

「야.」

조이수의 말을 듣고 있던 이정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넌 위아래도 없냐?」

「아, 형은 잘나가잖아요.」

이정환은 잘나간다.

얼굴은 박색이어도 계속 주연급으로 영화를 찍고 있다. 드라마도 잘 하지 않을 정도로 톱이었다. 그에 비해 조이수는 톱은 아니었다. 물론 조이수 역시도 벌어먹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무명 기간이 좀 있었지만, 지금은 작품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으니까.

「나 나이 먹어서 보험이 필요해.」

「그게 수한이라고요?」

「그래. 이참에 치킨집이나 좀…….」

유수한은 그저 웃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두 사람이 신나게 수다를 떠는 모습에 기가 차면서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뭐, 어쨌든 듣기 좋은 말이었다. 배우로서 잘생겼다는 말이 기분 나쁠 리가 없다. 물론 일반인이었어도 잘생겼다는 말은 칭찬이었다.

「넌 어떠냐?」

화살이 날아온다.

「나랑 치킨 사업 할래, 아니면 조이수 요놈이랑 피자집이나 할래?」

대답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쩌죠. 전 사업할 생각이 없어서요.」

뭐,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이정환이나 조이수가 실없는 농담 한 셈이었으니까. 짧게 웃음소리가 번져 간다. 유수한은 남은 맥주를 마시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또 유럽 가고 싶다.”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여유를 만끽하는 유수한을 화면에서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국적인 풍경이 여전히 머리에 맴돌았고 촬영 없이 머물고 싶었다.

항상 일 끝나면 비행기 타고 멀리 떠나겠다고 생각하지만, 늘 생각에 그친다. 일하는 것에도 지금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워커홀릭처럼 살고 있다.

현재 ‘노예주점’은 순항 중이었다. 시청률은 물론 화제성도 좋다. 유수한은 완벽한 대세 배우가 되어 가고 있다.

“왔어요?”

그리고.

드라마 ‘EXIT’에 대한 준비도 착실히 하고 있다. 오늘은 이정우가 집에 찾아오는 날이었다. 유수한은 대본 숙지를 제대로 하고 오라고 말했고, 오늘 그 결과물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유수한은 어떤 작품이든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정우가 어느 정도 따라와야 작품의 퀄리티가 함께 상승한다.

상대가 어떤 성향이든 상관없었다. 드라마의 주인공답게 따라오지 않는 인물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가는 한이 있어도 완벽해야 한다.

“무슨 시골에 살아요? 찾는 데 엄청 오래 걸렸네.”

“일단 앉아요.”

탁, 유수한은 물 한 컵을 주며 말했다.

“오늘 집에 가고 싶으면 잘 해야 할 거예요.”

그 말에 이정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수한은 오늘 이정우를 쉽게 집에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연기 초보자였으니 살살 할 테지만, 적어도 만족할 수준은 되어야 한다.

“어디, 연기 어느 수준인지 일단 봅시다.”

유수한은 서글서글 웃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오늘 이정우에게 말했던 것처럼 만족할 만한 수준이 나오지 않는다면 집에 돌려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적어도 이 정도면 내 연기에 누를 끼치지 않겠구나.

그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밤을 새우더라도 집에 돌려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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