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19화 (119/175)

119.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유수한은 긴장한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항상 생각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무대 인사를 하는 것보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 할 때가 더 긴장됐다.

항상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한다. 영화 반응은 좋지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건 늘 달랐다.

이번 영화도 유수한은 ‘노예주점’ 노예들과 함께 봤다. 심야 영화를 예매해서 보고 왔는데, 주연이었던지라 부끄러우면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좋았다. 반응도 좋았고 예매율도 좋아서 요즘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를 지경이었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지른다.

사방에서 인형을 흔들었다. 어떤 사람은 편지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고 유수한은 웃으면서 인형과 편지를 받으러 다가갔다. 어느새 품이 인형과 편지로 가득하다.

“영화 재밌게 보셨나요?”

그 물음에 찢어질 듯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서는 잘생겼다는 소리가 들렸고 어디서는 영화 재밌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재밌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 영화 촬영하면서 정말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그 분위기만큼 영화를 기대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수한은 짧게 인사를 마치고 마이크를 옆 사람에게 넘겼다. 이번에도 팬들이 많이 왔다. 인형을 끌어안은 채 웃는데, 이경민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사랑받는다는 건 역시 행복한 일이다.

무대 인사를 마치고 유수한은 차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대형 버스가 아니라 김민수가 운전하는 밴이었다.

그 앞에서 팬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영화 어땠어요?”

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경민은 말없이 카메라를 든 채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모습에 유수한이 작게 웃었다.

“오빠, 안 힘들어요?”

그 물음에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전 괜찮아요. 나 따라다니느라 여러분들이 더 힘들었지.”

“아니에요! 이렇게 얼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맨날 무대 인사 했으면 좋겠다니까요?”

“하하, 그럼 나 영화 자주 해야겠다.”

역시 팬과 함께하니 마음이 한결 편한 유수한이었다.

오늘 일정은 끝난지라, 다른 때보다 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유수한은 팬들에게 사인을 해 주며 팬서비스에 열중했다. 다른 누구보다 팬이 가장 소중했다.

“얼른 들어가요. 알았죠?”

30분 가까이 차 앞에서 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차에 올라탄 유수한은 오늘 받은 인형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편지 역시도 가방에 잘 챙겨 둔다. 오늘 밤은 편지를 보며 하루가 지나갈 듯했다.

* * *

[연예뉴스]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내주 500만명 돌파 예상 …… 인기 요인은?

영화가 개봉한 지 보름 차.

여전히 예매율은 좋았고 반응 역시도 괜찮았다. 이대로라면 500만 명은 물론 그 이상의 성적을 기대할 만했다.

- 유수한 진짜 개존잘임 영화 보는 내내 눈이 행복함

- 영화 재밌더라 후속작 나왔으면 좋겠음

- 솔직히 영화 개연성이 있나? 싶은데, 유수한 얼굴 보면 까먹게 됨 ㅇㅇ

└ 222222

└└ 3333 킹정

└└└ 44444

- 영화 보고 울었잖아.. 안 본 사람들은 휴지 챙겨 가 ㅠㅠㅠㅠㅠ

└ 손수건, 휴지 필수품임 ㅇㅇ

└└ 유수한이 우는데 내가 울더라? 이상하지;; 나 눈물 없는데;;;

└└└ 유수한 연기 늘었어 정동인 연기력은 말해 뭐해 ㅋ

└└└└ 진심 연기 살벌함 ㅋ

유수한은 천천히 반응을 살폈다. 대체로 좋은 반응이었다. 얼굴에 대한 칭찬은 여전히 있었고 영화가 재밌었다는 반응도 있었으며 연기력이 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 근데 저런 사격선수 있으면 팬덤 장난 아니겠지?

└ ㅇㅇ 간첩 아니래도 얼굴로 이미 끝난 게임

└└ 저런 선수 있었으면 내가 아이돌을 왜 파겠어 ㅋ 사격 덕후 되는 거임

└└└ ㅇㅇㅇㅇㅇㅇ 광고도 휩쓸고 국민남친 되는겨

└└└└ 인기 많다 못해 대통령 출마해도 당선 쌉가넝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통령 출마 뭐냐 ㅋㅋㅋㅋㅋ

- 윤한이 잘 살았겠지? 이인태가 계속 잘 챙겨줄 것 같아서 다행이야

└ 잘 살아야 해 ㅠㅠㅠㅠ 윤한아 애정한다 ㅠㅠㅠㅠ

└└ 이인태 진짜 진국...

└└└ 이인태 잘생겼으면 이미 브로맨스 떴다 ㅋㅋㅋㅋㅋㅋㅋ

└└└└ 22 ㅋㅋㅋㅋ 얼굴에서 브로맨스 불가능 ㅋㅋㅋㅋㅋ

└└└└└ 이인태 박색이지만 그래도 결혼했어요 ㅠ

서윤한은 사격 선수로서 잘 살았을 것이다. 힘들었던 과거를 모두 잊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수한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대본을 펼쳤다. 영화 홍보 일정도 마무리 단계였고, 이제는 새로운 작품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였다.

지금 유수한의 머리는 여전히 짧았다. 낫플릭스 ‘EXIT’ 역시도 군인 역할이기에 단정한 머리가 더 어울렸다.

이제 ‘EXIT’는 캐스팅 마무리 단계였다. 그 어느 때보다 출연진이 많다. 우선 좀비 역할을 할 단역 배우도 한 트럭이 넘고 주연 배우 역시도 많았다.

이틀 후.

첫 주연 배우 미팅이 있었다. 유수한은 대본을 숙지하고 이번 촬영장은 어떤 분위기일지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출연자 미팅은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단독 에피소드를 갖고 있는 주연 배우만 6명이었기에 카페를 대관했고 유수한에게는 모두 초면이었다.

“유수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나이대는 다양했다. 가장 비중이 높은 유수한은 20대 후반에, 50대 배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10대도 있었다. 배우들 역시 다양했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작품에서 배우들만 만나 왔는데, 이번에는 아이돌 출신 배우도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약속 시간은 오후 4시였다.

다들 제시간에 맞춰 카페에 도착했고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색함을 깬 사람이 등장했다.

“차가 좀 막혀서요.”

이 드라마에는 아이돌 출신이 두 명 나온다. 한 명은 이미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한 걸그룹 비주얼 멤버 ‘주나’였고 남은 한 명은 20분이나 늦은 보이그룹 댄스 담당 ‘이정우’였다.

“선배들 다 모여 있는데, 차가 막혀서 늦었다는 말이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나?”

분위기가 사늘해진다.

물론 좋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걸 좋게 넘어갈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이정우는 이제 연기를 막 시작한 신인 배우였다. 아이돌 그룹에서는 연차가 제법 쌓인 모양이지만, 배우 판에서는 달랐다.

“아,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이렇게 차가 꽉 막힐 줄은 몰랐습니다.”

차라리 이럴 때는 변명 대신에 사과를 하는 게 낫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말을 얹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정우는 별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잘나가는 아이돌 출신에 돈도 제법 벌었다. 여전히 인기도 많으며 중국, 일본 등 아시아권 인기도 좋았다.

쉽게 말하자면 인기에 취해 있다.

발도 누울 자리 봐 가며 뻗으라고, 이정우는 상황 파악을 했어야 했다. 여기는 가요계가 아니었다. 쉽게 말 걸기 힘들 정도인 대선배가 있는 자리에서 약속 시간을 어기는 건 프로가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저 친구 왜 캐스팅한 거야? 기본도 안 되는 놈이 무슨 연기를 한다고…….”

그 쓴소리에 이정우가 인상을 팍 찌푸린다. 뭐라 말은 못 하고 자리에 찾아가 앉는데, 댓 발 나온 입술이 그의 감정 상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딱 애네.’

그리고 유수한은 이정우의 스타일을 단번에 파악했다.

이제 이정우 나이는 스물다섯. 가수로서는 이제 8년 차로, 여전히 목에 힘이 빳빳이 들어가 있을 시기였다. 유수한은 이정우가 제발 사고는 치지 않기를 바랐다.

드라마 ‘시간’에서 출연자 간의 기 싸움이 얼마나 피곤한지 경험했다. 다행히 그 이후에는 그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언제든 또라이는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생님, 정우 씨가 요즘 바빠서 실수를 한 모양인데 한 번만 봐주세요.”

멋쩍은 듯 웃으며 김승찬 감독이 나섰다.

“담배 한 대 어떠세요, 선생님?”

김승찬 감독은 아예 담배를 꺼내며 한껏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배우 ‘최한길’에게 다가갔다. 서글서글 웃고 있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김승찬은 아이돌 출신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말 못 할 속사정이라는 게 있다. 그 속사정 때문에 김승찬은 이정우를 캐스팅해야 했다.

“아, 존나.”

유수한은 이 상황에서 나서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정우가 그러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었다. 그저 유수한은 연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 직접적으로 이정우가 작품에 해가 갈 만한 언행을 하지 않거나 따로 유수한을 건드리지 않으면 크게 상관없었다.

하지만.

“시발. 꼰대야, 뭐야…….”

지금 이정우는 유수한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지금 이정우는 그 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작게 투덜거린다고 해도 옆 사람에게 들린다.

지금 유수한은 이정우 옆에 앉아 있었고 그 볼멘소리가 적나라하게 귀에 꽂혔다. 고민의 순간이다.

여기서 참아야 할까?

아니면 연기 선배로서 한마디 하는 게 나을까?

“정우 씨, 우리 초면이죠?”

유수한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은 결국 열리고 말았다.

이정우가 고개를 돌려 유수한을 보았다. 그 눈은 곱지 않다. 이미 한 소리 들은 상태라 기분이 나쁜 상태였고, 모든 게 삐딱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 새끼 존나 잘생겼네.’

유수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가 다소 누그러졌다.

가수와 배우는 일단 외모에서 차이가 난다. 물론 아이돌 그룹에서도 특출난 외모가 나오기는 하지만, 평균을 따졌을 때 가수보다 배우가 더 잘생겼다. 유수한은 그 배우 중에서도 외모로 유명했다.

나름 이정우는 얼굴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유수한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이 오징어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오늘 늦은 거는 이유가 있으니, 다음번엔 실수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솔직히 이해 안 된다.

이유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였다. 앞선 스케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20분이나 늦었다는 건 변명도 될 수 없었다.

최한길의 말대로 차가 막혀서 늦었다는 건 변명도 불가능하다. 미리 생각하고 일찍 나왔어야 옳았다. 이건 예의 문제였다.

“하지만 선생님께 말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유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좋게 말하고 있었다. 이정우가 최한길에게 보였던 모습은 그릇된 행동이었다. 이정우가 살았던 세월의 두 배 이상을 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의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

물론 이정우는 스스로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오자마자 사과를 했고 늦은 이유를 설명했으니, 자신의 행동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3자가 보기에는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걸 알아준다면 좋겠는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정우는 가볍게 유수한의 충고를 튕겨 냈다.

아마 이정우는 유수한 역시도 꼰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유수한은 쓴웃음을 짓고 이정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알아서 한다?

유수한이 보기에 이정우는 알아서 할 정도의 수준이 아닌 듯 보였다. 가수로서,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서는 1인분을 알아서 챙겨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연기는 아닐 거로 보였다.

이제 첫 작품이었다.

그리고 대다수 아이돌 출신 배우가 그렇듯, 첫 연기에서 고전하는 경우가 널렸다. 보통 첫 작품에서도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는 아이돌은 준비 자세부터 달랐다.

과연 이정우는?

“음, 부디 연기도 알아서 잘 해 주길 바라요.”

아쉽게도 전혀 기대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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