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18화 (118/175)

118. 쉽게 죽어 줄 생각 없어

평화로운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일까?

서윤한은 불이 켜지기 무섭게 달려드는 괴한에 당황했다. 예전이라면, 사격을 시작하기 전이었다면 이 상황에서도 대처가 빨랐을 것이다.

칼을 내지르는 괴한을 한발 늦게 발견한 서윤한은 몸을 틀었다. 본능적으로 팔만큼은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총을 드는 팔은 괜찮았지만, 왼팔이 칼에 베였다. 느껴지는 통증에 서윤한이 미간을 좁혔다. 상대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눈빛이 번뜩거렸고 여기서 서윤한을 죽이겠다는 살기가 형형하게 느껴졌다.

「날 죽이러 왔나?」

「…….」

서윤한이 짧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은 중국이었다. 북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라.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리 놀랍지 않다.

최지원이 우려했던 것처럼 북이 움직였다. 중국으로 온 이상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순간일 수도 있었다.

경호원은 문 밖에 있지만, 문고리에 손을 대기도 전에 칼을 휘두르는 괴한이었다. 차라리 소리를 지를까? 그 생각이 스쳤지만,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괜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까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서윤한은 날쌘 몸놀림으로 칼을 피했다.

아무리 무뎌졌다고 해도 생사를 오가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서윤한이었다. 상대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키는 작지만, 움직임이 민첩했고 칼을 휘두르면서 발을 사용하는 것에도 익숙해 보였다.

휘익!

서윤한은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칼을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대로 괴한의 허리를 붙잡으며 달려든다. 바닥에 괴한을 놉힌 서윤한은 숨을 몰아쉬며 칼을 든 손목을 붙잡았다.

「윽……!」

역시 상대는 만만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다친 왼팔을 세게 붙잡는다. 실전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약점을 파고드는 재주가 있었다. 서윤한이 왼팔을 크게 휘두른다. 하지만 상처 난 부위를 붙잡은 손이 떨쳐지지 않았다. 아예 괴한은 손가락을 세워 손톱으로 베인 상처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를 악물어도 밀려드는 통증을 쉽게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주먹을 들어 상대의 턱을 가격했다. 왼팔을 붙잡힌 상태라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 팔을 붙잡은 괴한의 손에 힘이 한결 풀렸다.

탓.

서윤한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자상을 입은 상처에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그런 순간에도 서윤한은 오른팔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어!」

말이 없던 괴한이 흥분한다.

아마 턱을 맞아 분한 게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숨어들어 서윤한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했다. 어떤 커넥션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관계자 외에는 들어와서는 안 되는 선수촌에 외부인이 들어왔다.

여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중국은 묵인할 것이다.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져도 중국은 침묵을 지킬 것이다.

서윤한은 여기서 죽어 줄 생각이 없었다.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빈틈을 노린다. 상대가 흥분했기에 움직임이 커졌고 덕분에 틈을 파고들 수 있었다.

빠른 스텝으로 괴한에게 파고든 서윤한은 지체 없이 상대의 턱을 가격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갔다. 상대가 비틀거린다. 서윤한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상대를 보며 몸을 빙글 돌려 뒤차기로 명치를 가격했다.

「쉽게 죽어 줄 생각 없어.」

괴한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턱을 맞은 것도 모자라 뒤차기로 명치를 맞았기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발차기 기술 중에 가장 파괴력이 우수하다는 뒤차기였다. 그것도 명치에 맞았으니 정신을 차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툭.

서윤한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발로 쳐 냈다. 구석에 박힌 나이프를 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괴한을 내려다본다.

「안 죽어.」

서윤한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었다.

이를 세워 옷을 물고 그대로 힘을 주어 찢는다. 부욱, 천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서윤한은 두 손으로 힘을 주어 옷을 두 갈래로 찢었다.

괴한을 묶을 만한 끈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급한 대로 칼에 찢긴 티셔츠를 이용했다. 서윤한은 괴한의 손목을 찢어진 티셔츠로 단단히 묶으며 한숨을 쉬었다.

「난 절대 안 죽어.」

* * *

선수촌이 발칵 뒤집혔다.

북한이 보낸 괴한은 서윤한을 살해하려 했다. 중국은 당연히 이 상황에서 한발 물러서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방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북한의 책임으로 돌린 중국은 경비를 한층 보강하여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더 없도록 하겠다는 말만 남겼다.

한국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오히려 이 일을 당한 서윤한은 담담했다. 다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왼팔만 내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른팔을 다쳤다면 이번 아시안 게임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괜찮냐?」

이인태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서윤한은 태연했다. 일반 사람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지만, 서윤한에게는 별일도 아니었다. 북에서는 이보다 더 위험한 일도 겪었다. 지금은 그저 아시안 게임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심장 떨어졌다, 이놈아.」

서윤한은 말없이 물을 마셨다.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치료를 받고 쉬고 있었다. 내일 당장 예선전이었다. 서윤한은 오직 대회 생각뿐이었다. 예선전을 잘 치르는 게 먼저였다.

「참 나.」

이인태가 혀를 차며 서윤한 앞에 앉았다.

「사격이 멘탈 싸움인 거 알지? 정신력.」

서윤한이 고개를 들어 이인태를 쳐다보았다.

「타고난 건지, 아니면 환경이 만들어 준 건지 모르겠지만.」

「…….」

「그게 너에게는 최고의 무기다.」

이인태가 보기에 서윤한은 사격 선수가 가져야 할 재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사격 선수에게 중요한 건 역시 정신력이었다. 서윤한은 재능을 타고 났지만, 그중에 가장 으뜸은 역시 정신력이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 정신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인태는 알 것 같았다. 서윤한의 평범하지 않던 일상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그걸 선물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서윤한에게는 최고의 무기였다.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가 뭔지 알아?」

이인태는 차분히 서윤한을 다독이고 있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그 속은 어떨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인태는 코치로서 서윤한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었다.

「네가 잘되는 일이야.」

금메달.

「꼭 따라.」

그 말에 서윤한이 작게 웃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예선전.

서윤한은 괴한의 습격 덕분에 한층 더 유명 인사가 되었다. 대회에 들어가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태극기를 보았다. 가슴에 태극 마크를 안고 뛴다.

괜히 가슴팍을 문질러 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더 차분해지고 있다. 이인태는 말없이 서윤한의 등을 두드렸다. 사격장으로 들어서는 서윤한은 오직 한 곳만 바라보고 있다. 좋은 성적을 내겠다. 여기서 주춤하지 않고 끝없이 치고 나가겠다.

「네, 대한민국의 서윤한 선수.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얼굴은 밝습니다.」

「제가 경기 전에 이인태 코치와 짧게 대화를 나누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서윤한 선수는 이인태 코치가 발굴한 선수잖습니까? 들어 보니, 소개하는 시간에 카메라가 다가오면 활짝 웃으라고 했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서윤한 선수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 주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서윤한은 항상 선수 소개 시간에 밝게 웃었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건 아니었지만, 늘 이인태가 방긋 웃으라고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이인태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서윤한이었지만, 그가 하는 조언은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습관처럼 카메라가 다가오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는 서윤한이었다.

「네, 많은 국민들이 서윤한 선수를 위해 응원하고 있습니다.」

「첫 발, 준비합니다.」

서윤한이 담담하게 총을 든다.

숨을 잠시 참고 조준을 한다.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서윤한은 차분히 점수를 확인했다. 첫 발은 10.4.

「좋은 시작입니다!」

해설진의 말대로 좋은 시작이었다.

사격 선수로서 서윤한의 장점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 기복 없이 10점대를 쏜다. 가끔 9점대나 8점대를 쏠 때도 있지만, 그다음 턴에 다시 회복했다.

예선전.

아직 왼팔은 다 낫지 않았지만, 컨디션은 좋았다.

「마지막 발, 10.9! 최고의 점수를 올리며 예선전 1위를 사수합니다!」

「아, 정말 대단하네요. 최근 괴한에게 급습당한 선수라고 볼 수 없는 기량입니다.」

서윤한은 태연한 얼굴로 사격장을 나섰다.

이인태 코치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숙소로 이동하던 서윤한은 어느새 몰려든 취재진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물론 일전에도 취재진이 몰려왔지만, 경호원이 모두 물렸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서윤한에 대한 관심도가 폭발하고 있었다.

사격계가 주목하고 있는 사격 선수, 그리고 탈북 선수라고 불리고 있는 서윤한이었다. 잘생긴 외모로 시선을 사로잡는 선수였고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괴한에게 피습당하며 더 없어도 될 서사까지 생겼다.

서윤한은 담담하게 취재진 앞에 섰다.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고 편안하게 대답했다. 가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말없이 감독과 코치를 보았고 그럴 때면 알아서 기자들을 정리해 주었다.

「서윤한 선수,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목표가 있을까요?」

마지막 질문.

서윤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금메달입니다.」

* * *

결승전.

서윤한은 동료 선수가 사다 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물론 아직 맛을 느끼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왜 이 쓴 물을 돈 주고 사 먹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야.」

이인태가 아시안 게임 마스코트 인형을 서윤한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인형을 받은 서윤한은 영문 모를 눈으로 이인태를 보았다.

「기념품 하나 정도는 가져가야 하지 않겠냐?」

「금메달 따면 인형 준다던데.」

「못 따면? 빈손으로 가게?」

「딸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보다 잘 쏘는 사람 없어 보이니까.」

「어쭈.」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자칫 잘못하면 비웃음을 사지만, 근거 있는 자신감에는 그 누구도 웃지 못한다. 사실 그대로였으니.

서윤한은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아시안 게임은 올림픽에 비교하면 관심도가 떨어지지만, 서윤한만큼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서사가 풍부한 북한에서 온 선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다들 궁금해하고 있다.

「그래. 그 자신감대로 제대로 쏘고 와 봐라.」

그럴 생각이다.

서윤한은 이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제야 비로소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다. 오늘 이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앞으로 사격 선수로서 무궁무진한 날들이 남아 있다.

「네, 지금 서윤한 선수가 들어옵니다!」

해설진이 열정을 다해 해설을 하고 서윤한은 늘 그렇듯 표정 변화 없이 무대에 올라섰다. 예선전과 같을 거라 생각했지만.

「와아아아아아-!」

「서윤한!」

객석에 가득 찬 관중들의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극기를 든 사람들. 서윤한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 서윤한 이름을 외치며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이런 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서윤한을 바라보고 있다. 그를 응원하고 그가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오늘 서윤한 선수는 평소대로만 하면 됩니다. 이미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여기는 중국이지만, 이미 한국이나 다름없어요. 교민들은 물론 많은 국민 여러분이 서윤한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자, 서윤한 선수가 첫 발을 준비합니다.」

서윤한은 심호흡을 하고 권총을 들었다.

차분하게 총을 겨눈다. 흔들림은 없었다. 이제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네! 서윤한 선수, 첫 발 쏩니다!」

타앙!

격발음이 울렸다.

* * *

이경민은 엔딩 스크롤을 보며 마지막 쿠키 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는 서윤한이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첫 발을 쏘는 순간 끝이 났다. 물론 이대로 끝이 났다면 조금 찝찝했겠지만, 짧은 쿠키 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재밌었죠?”

이경민이 같이 영화를 본 최은주와 김지연을 보며 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본 영화도 아니었는데, 다들 감명 깊은 얼굴이었다.

쿠키 영상의 내용은 후일담이었다.

서윤한이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장면과 그 후에 올림픽에 출전하는 모습이 짧게 그려졌다. 관중이 원하는 서윤한의 사격 선수로서의 성공을 짧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 떨려요.”

영화는 끝났고 이제 유수한이 무대 인사를 위해 얼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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