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15화 (115/175)

115. 너나 나나 끝이지

이경민은 처음 보는 영화도 아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떤 작품이든 기대감을 갖고 있지만, 유수한이 영화를 하기를 기다렸던 이경민이다.

영화관에서 만나는 유수한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지금 이경민은 ‘내 심장을 향해 쏴라’ 3회차 관람 중이었다.

1회차는 개봉하는 날 경건한 마음으로 영화관에서 보았고 남은 1회차는 퇴근 후에 팬들과 함께 보았으며, 무대 인사 중인 오늘이 3회차였다.

처음에는 유수한의 새로운 모습에 넋이 나갔다. 영화 캐스팅 소식이 전해졌을 때 짧은 머리를 잠깐 보았지만, 이렇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신선했다.

잘생긴 거?

그건 말 안 해도 이미 알고 있다. 유수한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처음 서울역에서 봤을 때도 잘생긴 외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스운 건 날이 갈수록 외모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뭔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성형 수술을 했다거나 시술을 한 건 아니다. 소처럼 일하고 있기에 휴식기가 거의 없던 유수한이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경민은 왜 더 외모가 발전했는지 그 답을 찾았다. 바로 분위기였다. 유수한에게 분위기가 생겼다. 다른 말로는 아우라.

“헉.”

영화를 보던 이경민이 입을 틀어막았다.

서윤한이 심문을 받는 장면이었고, 그사이에 과거 회상이 나왔다. 유수한은 가난한 이미지가 거의 없었다.

이경민이 입덕했던 ‘아임 홈리스’에서 추레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대체로 금수저 이미지였다. 그렇기에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채 우는 모습은 또 다른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너의 쓸모를 증명하라.]

서윤한은 사람을 죽였다.

마지막 훈련은 살아 있는 자의 숨통을 끊는 일이었다. 총을 손에 쥔 채 주저앉은 서윤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했다. 함께 훈련했던 동무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 공화국을 위해.]

눈물이 툭 떨어진다.

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서윤한은 그렇게 남한에 들어왔다. 오지 않는 임무를 기다리며.

「그저 사격 선수가 되고 싶었다?」

서윤한은 저항 의지가 없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숨기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단지 이인태만은 지킬 생각이었다. 그는 잘못이 없다. 그저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죄밖에는 없었다. 사실 그마저도 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서윤한의 정체를 알고도 묵인했고, 그것이 중죄라는 것을 알기에 이인태를 보호하려 했다.

「그걸 나더러 믿으란 겁니까?」

「사실입니다.」

서윤한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올곧은 눈으로 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던 최지원이 미간을 좁혔다. 서윤한의 눈빛은 죄 지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런 눈빛이 이상하지는 않다. 극형에 처할 만한 살인죄를 저질러 놓고도 반성 하나 없이 떳떳한 인간을 수도 없이 보았으니까.

특히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대할 때면 이런 올곧은 눈빛을 볼 때가 있었다. 그릇된 올곧음이었다. 주로 충성심에서 비롯된 눈빛이었고 가끔은 착각하게 만드는 눈빛이기도 했다.

죄가 없는 자를 무고하게 붙잡은 건 아닌가?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북에서 여기 온 이유가 고작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서다?」

「…….」

「내가 계속 당신을 좇았어. 주로 집에만 있고 가끔 막노동하러 나오던 당신은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지. 그 말은 그동안 지령이 없었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들 제법 있어요. 공작금이 나오지 않거나 지령이 따로 떨어지지 않아서 노는 사람들. 그래서 난 서윤한 씨도 잠자는 공작원이라 생각했습니다.」

짧게 한숨을 쉰 최지원이 서윤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랬던 당신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이인태가 먼저 접근했지.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인태가 간첩일 수도 있으니까. 남한에도 좀 이상한 사람이 존재하거든요. 예를 들어 공산국가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북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들.」

서윤한의 미간이 좁혀진다.

「이인태는 공화국와는 아무 관계 없는 사람입니다.」

「그건 내가 판단합니다. 간첩 말에 귀 기울일 사람은 없죠.」

간첩을 좇는 일은 보통 방관부터 시작한다.

북에서 넘어오는 세력들을 포착하여 지켜보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수행하려는 임무를 파악하려는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유착 관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미끼를 던지고 일망타진하기 위한 기다림이었다. 그 외에도 애초에 돈이 없는 북한의 자금을 소진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파 공작원을 포착하더라도 지켜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더욱이 이 상황이 당혹스럽다.

간첩이 갑자기 운동선수가 된다는 사례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이인태와 함께 북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습니까?」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북으로 갈 생각 없습니다.」

「북으로 갈 생각이 없다? 남파 공작원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말했다시피 날 여기로 보낸 리성렬은 숙청되었고 공화국에서 날 아는 자는 극소수입니다. 가족도 없고 공화국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그럼 차라리 전향을 하던가. 계속 가짜 신분을 유지한 채 활동을 이어 가는 게 말이 됩니까?」

「전향?」

처음으로 서윤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그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국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몰래 이 나라에 숨어 들어왔으니 들키면 죽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그 물음에 최지원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서윤한은 확실히 철저히 교육받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상류층이 아니었다.

북한 사람이라고 모두 가난한 건 아니다. 그 세계에도 돈 있는 자는 존재했다. 자유롭게 유학을 떠난 자도 있고 생각보다 민주주의에 대해 깊게 아는 자도 존재한다.

상류층에 있던 간첩은 빠르게 한국에 적응한다. 오래 이 세상에 머무르다 보면 다시는 북에 가지 못할 정도로 적응이 빨랐다.

때때로 그들을 포섭해 전향을 권유하고 정보를 뜯어낸다.

가끔은 설득해 북으로 보낸 후에 다시 새로운 정보를 가져오게끔 유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남한에 있다가 북에 다시 돌아가는 걸 꺼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만한 대가를 부여하면 움직였다.

남한에 오는 공작원들의 약점은 보통 북에 있는 가족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에 흔들리지 않도록 북 역시도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는다.

「안 될 건 없죠. 한국에 북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아는지 모르겠지만, 탈북민을 위한 정책도 있을 정돕니다.」

서로 대치하고 있지만, 결국 한 민족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통일에 부정적이지만, 중국이 북한을 먹는다고 가정하면 생각이 바뀐다. 결국 한 민족인 것이다. 통일이고 뭐고, 다른 나라에 귀속되는 꼴을 차마 볼 수 없는 같은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민족.

「몰랐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는 줄은…….」

서윤한의 눈이 끝없이 흔들린다.

사실 이렇게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지독한 고문을 상상하며 마음 준비를 했다. 여차하며 혀를 깨물어 죽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최지원은 대화로 이 상황을 풀어 가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공작원들이 전향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족 때문입니다. 북에 가족이 있는데, 쉽게 전향할 수 없죠. 그러니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고. 들어보니 서윤한 씨는 가족도 없고 여기로 보낸 리성렬도 숙청되었고. 심지어 임무를 수행한 적도 없으니 전향에 문제는 없습니다. 물론 간첩이라고 하면 좀 위험하죠. 그럴 땐 그냥 탈북민이다, 그렇게 둘러대면 되니까.」

최지원은 경계를 한풀 꺾은 상태였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북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모양이다.

리성렬이 그를 남한에 보낸 이유는 단순할 것이다. 정보력 싸움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연고도 없는 고아들을 데려와 혹독하게 훈련시켰을 것이다. 주인을 쉽게 물지 못하도록 세뇌시킨 후에 남한으로 보냈는데, 문제는 리성렬이 너무나 일찍 숙청당했다는 거다.

「하지만 처벌을 피할 수 있다고 확답은 못 줍니다.」

서윤한은 이미 사격 선수로서 첫 발을 뗐다.

그저 거기서 그쳤다면 모를까, 이미 방송까지 얼굴을 비춘 상태였다. 단순한 탈북민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예민한 문제였다.

이인태는 말했다.

서윤한의 재능이 눈부시다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도 충분히 딸 수 있을 만큼 재능이 출중하다고.

「우선.」

서윤한이 유명한 사격 선수가 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격 선수가 되어 국위선양을 한다. 최지원이 보기에도 서윤한은 잘생겼다. 이 외모라면 충분히 스타 선수가 되고도 남았다.

문제는.

이를 이용할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점이었다. 서윤한을 정치적 프레임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어느 누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할지 모른다.

영원한 비밀은 없기 마련이니까.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죠.」

그러나.

「그 전에.」

최지원은 쉽게 서윤한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왔던 서윤한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사격 선수가 하고 싶어서 이인태를 따라갔다는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이인태는 실업팀 감독이자 국가대표 코치였다. 그를 포섭하여 북으로 데려간 후에 사격 선수를 양성하려고 하는 속셈은 아니었는지 의심했다.

「당신은 전향할 생각이 확실히 있습니까?」

서윤한은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존재였다. 수많은 탈북자들을 보았고 꽤 많은 간첩들을 감시했다. 그중 이렇게 바보 같은 인간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인태마저도.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간첩 신고만 해도 포상금을 주는데, 누가 봐도 중죄라고 느낄 만하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판단력이 흐려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제부터 내 조국은…….」

서윤한의 올곧은 눈이 최지원을 응시한다.

「대한민국이오.」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국정원은 보안이 생명이다.

물론 정치적인 움직임 탓에 국정원의 이미지가 바닥에 처박혔지만, 보인이 생명인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같은 국정원 소속이라 해도 부서가 다르면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보를 감춘다.

최지원은 어쩌다가 국정원이 되었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공무원이 목표였기는 했지만, 국정원을 희망한 건 아니었다. 뭐, 이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네 말은 조용히 전향시켜 달라는 거냐?」

강승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이인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서윤한이 사격 재능이 있어서 선수로 영입했고 실제로도 재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따로 조사를 진행했지만, 북에 연고가 없습니다.」

「지원아.」

「예.」

「정신 안 차릴래?」

최지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강승완은 쉬운 존재가 아니다. 지금 최지원은 이인태가 그랬던 것처럼 알량한 동정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상하게 서윤한은 마음 쓰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일 크게 만들지 말자.」

그 말은 절차대로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전향이고 나발이고 순서는 그 뒤였다. 확실히 강승완이 보기에도 서윤한은 작정하고 침투한 세력이 아니었다.

「근데 실력이 정말 그렇게 좋냐?」

사실 계속 궁금했다.

「그 올림픽 3연패 했던 양반보다 잘한대?」

얼마나 재능이 출중하면 국가대표 코치가 눈이 회까닥 돌았는지.

사실 드라마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현실이었다면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은 간첩이라도 사격 선수에게 실력으로 비빌 수 없다.

「사격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돼서 전국 대회 우승했습니다. 이인태 감독 말로는 국가대표 선발은 물론 곧 열릴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딸 만한 실력이라고 합니다.」

방송도 나온 간첩.

이대로 절차대로 진행하는 게 정답이지만, 유명해져도 너무 유명해진 게 문제였다. 최지원 말대로 이미 북에 지지 기반이 없으니 마음 편하게 전향을 하고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면 좋았겠지만, 그 역시도 걸림돌은 있다. 애초에 탈북민도 아니도 첩보 활동을 위해 남파한 공작원이라면 시선이 곱지 못할 테니.

「새어 나가겠지?」

그 물음의 의미를 최지원이 눈치챘다.

「네. 방송도 나온 사격 선수니까요.」

고민이 깊어진다.

사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파급력은 보통이 아니다. 듣기로 후원사도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한다.

간첩은 굉장히 예민한 문제였다.

늦게 잡으면 늦게 잡은 대로 욕을 먹는다. 물론 간첩을 포섭하고 일망타진하는 그 순간은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그리 흔하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유명인이 간첩이라는 사실이 퍼진다면 문제가 커진다. 미리 잡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을 테고 사회적 파장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정권이 좀 그치?」

강승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지금 정권에서 사격 선수가 간첩이라는 사실이 터지면 그치?」

하아.

강승완이 한숨을 쉰다.

「너나 나나 끝이지.」

하필 지금 정권은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며 국민의 건강을 팔아먹을 계획을 하는 부패하다 못해 썩은 내가 진동하는 정권이었다.

북한을 이용해 프레임을 짜는 걸 좋아하는 무자비한 정권이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간첩 논란이 일어난다면 정권을 잡은 여당에 비난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책임은 자연스럽게 국정원으로 몰려올 테고, 일이 일파만파 커질 것이 분명했다.

「……전향시켜.」

마음이 찝찝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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