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14화 (114/175)

114. 당신도 알고 있지?

습관적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메일을 확인한다.

혹시나 지령이 날아오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확인했다. 처음에는 사명감이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이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자부심. 어떤 일이든 목숨을 다 바쳐 해내겠다는 애국심. 하지만 조국은 서윤한을 찾지 않았다.

하루가 지날수록 의문이 들었다.

왜 여기에 와 있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일용직으로 돈을 벌어 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음식을 사 먹으면 더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겼다.

‘서윤한’이라는 존재가 과연 필요한 사람인가.

그 누구도 찾지 않으니 하등 쓸모가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왜 넌 사격 선수가 하고 싶냐?」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인태가 물었다.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한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서윤한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처음 사격장에서 총을 들었을 때, 그 순간을 떠올렸다.

「나를 위해서 총을 든 것도 처음이라서.」

애초에 빈약했던 자아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깊은 호수에 잠식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는다.

서윤한은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원한다는 그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단 한 번도 나를 위해서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서윤한은 처음으로 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언제 죽더라도 그냥 번듯한 직업이 있었으면 해서.」

「직업?」

「북에서도 늘 이방인이었으니까. 북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거든요. 내가.」

권력의 끄나풀이다.

서윤한을 키운 자는 지금은 숙청되었지만, 권력 다툼을 하던 권력자였다. 그가 죽은 후 서윤한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길을 잃었기에. 왜 여기에 왔는지, 왜 그토록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는지, 그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제대로 된 지령을 받았더라면 이것 때문에 남한에 왔구나, 그 이유라도 알았을 텐데.

「사격 재밌냐?」

복잡한 이야기는 뒤로하고 이인태가 힐끔 서윤한을 보며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서윤한이 한결 풀린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밌으니까 하는 겁니다.」

사격.

* * *

요즘 서윤한의 페이스가 아주 좋다.

점차 기록이 좋아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 국내 대회도 우승 가능성이 농후했다. 서윤한은 점차 사격계의 새 바람이 되고 있었다.

새로운 얼굴, 신선한 바람이었다.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사격 선수. 사격계에서 보기 힘든 유형이었다.

「어디서 그런 애를 데려왔어?」

응, 북한.

「운 좋게 걸렸지, 뭐.」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이인태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운 좋게 재능충을 발견한 건 맞다. 하지만 마냥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되레 사격 인생을 끝장낼 수도 있는 재능충이었으니까.

「훈련하는 거 봤는데 타고났더라. 외모도 타고났고. 좋겠네. 이제 국대 감독은 따 놓은 당상 아니야?」

허허.

이인태는 말없이 웃었다.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좋아서 춤을 출 상황이다. 현재 실업팀 감독이자 국대에서는 코치로 일하고 있는 이인태는 최종 목표가 국대 감독이었다.

선수 시절에는 안타깝게도 국가대표는 달아 보지 못했다. 그는 뒤늦게 지도자로 빛을 본 케이스였고, 국가대표가 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국대 감독에 집착하고 있었다.

서윤한은 재능만 봐도 그의 꿈을 이뤄 줄 사람이다. 사격계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를 발굴했으니 함께 승승장구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서윤한이 북한 사람이라는 거지.

「부럽네. 나도 이제 뽑기방이나 다녀 볼까? 나도 이 감독처럼 다이아몬드가 될 원석 좀 찾아 볼까 봐.」

더 할 말도 없고 표정 관리도 안 된다.

이인태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잠시 밖에 나가 담배나 한 대 피울 생각이었는데, 그게 또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번졌다.

언제든 들킬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위험한 동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다. 때때로 미국에 있는 처자식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고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꾸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

「지금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하십시오.」

왜 나는 끝까지 놓지 못하는가.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등골이 싸해진다.

불안한 듯 이인태는 시선을 돌렸다. 잠시 연습장을 나와 담배를 피우러 가던 그 순간이 머리에 스친다.

문제는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어찌되었든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이미 알고 있다.

「서윤한과 어떤 관계입니까?」

서윤한?

「그게 누굽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처음 듣는 이름이라 그렇습니다.」

이인태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이 상황에 대처하려 노력한다.

「그렇다면 이수원이라고 하면 알아듣겠습니까?」

순간 이인태의 얼굴이 굳는다. 그 표정 변화를 눈치챈 최지원이 깊은 한숨을 쉬며 이인태를 바라보았다.

「왜 이수원에게 접근했습니까?」

대답에 뜸을 들이던 이인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연히 뽑기방에서 만났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한다.

「난 주원시청 소속 감독이고, 이수원의 사격 솜씨가 좋아 선수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이 내용은 방송에서도 공개된 이야기였기에 트집 잡힐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였다. 거짓말 탐지기를 쓴다고 해도 거짓이 나올 일은 없다.

「단지 그뿐이다?」

「이수원은 사격을 시작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국내 대회 우승을 했어요. 재능은 말할 것도 없죠. 실업팀 감독이라면 이수원의 재능은 모두 탐났을 겁니다.」

「…….」

잠시 침묵이 흐른다.

최지원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최지원이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이인태에게 다가갔다.

탁.

책상을 소리 내어 내려친 최지원이 미소를 지우고 이인태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이인태는 그 눈빛을 바라보다 은근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이상하죠?」

최지원이 말했다.

「보통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끌려오면 내가 누군지, 여기는 어딘지, 왜 나를 끌고 왔는지…….」

지금 최지원은 이인태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서윤한이 ‘간첩’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납치되어 잡혀 왔는데 차분하게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마치 준비한 사람 같았다. 이런 순간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처럼 굴고 있다.

「당신도 알고 있지?」

최지원이 이인태의 숨통을 조여 온다.

「서윤한이 간첩인 거.」

* * *

서윤한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이인태를 찾고 있다.

물론 3시간 후에 돌아왔지만, 어딘가 같은 듯 다른 모습이었다. 서윤한은 그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 아쉬울 뿐.

「들킨 겁니까?」

숨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인태가 배신한다고 해도 그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이인태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사격 선수로 살았던 짧은 순간이 선명했다.

서윤한은 ‘주원시청’ 소속이 되었다. 팀이 생겼고 다음 달에 개최하는 대회에서는 개인전뿐만 아니라 팀전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늘 혼자였던 서윤한은 다른 사람과 함께 팀이 되어 움직이는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팀원들은 연습을 하다가 영점이 잘 안 잡힐 때면 스스럼없이 다가와 조언을 해 주었고 풍부한 경험을 나눠 주었다. 그 모든 순간이 충격이었다.

같은 팀 소속이라고 해도 경쟁자일 수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쉽게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윤한은 짧았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진심이었다.

「더 바라면 욕심일 테니까. 좋은 꿈 꾸었다고 생각할 테니…….」

서윤한에게 욕심은 사치였다.

짧았지만, 많은 것을 경험했다. 원하던 대로 사격 선수가 되었고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처음으로 심장이 뛰는 일을 했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살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그만 날 버려도 됩니다.」

이인태는 지금 이 순간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서윤한이 간첩이라는 사실, 국정원에 끌려갔다는 사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도 쉬이 믿을 수가 없다.

사실 이 정도 했으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지금이라도 살 구멍을 찾는 게 현명할 수도 있었다.

서윤한은 북한 사람이지만, 이인태는 한국 사람이다. 자칫 잘못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갈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서윤한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었다.

「저 서윤한입니다.」

「뭐?」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진짜 이름 계속 알려 주고 싶었어요.」

조금만 더 할 순 없을까?

사실은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서윤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수원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도 좋으니,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가슴이 뛰는 일을 이제야 경험했는데, 이렇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사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

눈물이 난다.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쉬움의 눈물일까.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나서 후련해진 마음에 터진 눈물일까.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서윤한에게는 오랜만에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이다.

「……네가 왜 우냐.」

이인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지독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희망 회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꿈을 꾸었다. 한국은 물론 세계도 정복할 수 있는 재능을 서윤한은 타고 났다.

그가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태어났더라면 이런 눈물 흘리지 않고도 행복하게 선수로서 살아갔을 것이다.

이인태는 이제 서윤한이 간첩이 아니라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입견을 벗고 나니 서윤한은 안타까운 청년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니었다. 서윤한은 그저 간첩일 뿐이다.

「미안하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건방지게 허세를 부렸다. 마치 이 가련한 청년을 위해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이인태는 가족이 있었다. 가장으로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은 핑계였다.

가장이고 뭐고. 처자식이고 뭐고. 그저 살기 위해서였다. 그 이유 하나로 서윤한을 외면했다.

[뭐, 모두 우연이라고 쳐도 서윤한 정체를 숨겨 준 건 중죄입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이인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을 참 크게 만드셨어요. 간첩을 사격 선수로 만들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우리나란 분단국가예요.]

여전히 최지원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온다.

서윤한은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이인태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 목소리에 이인태의 어깨가 움찔한다.

서윤한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다시는 이인태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반찬 투정을 했지만 그가 해 주는 밥은 늘 맛있었다. 언젠가, 그 맛이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나에게 가장 잘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서윤한이 이인태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여니 양복을 입은 최지원이 눈에 보였다. 서윤한은 모든 걸 체념한 얼굴이었다. 최지원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서윤한을 응시했다.

「국가정보원 직원 최지원입니다.」

작은 목소리.

혹여나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갈까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시죠.」

그게 서로에게 편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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