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오랫동안 연기하고 싶으니까
“아, 죄송해요. 없, 없으셨구나.”
당황하지 말자고 생각하지만, 이미 식은땀이 삐질삐질 날 것만 같다. 유수한은 힐끔 계산을 느릿느릿하게 하는 점원을 보았다.
한국인은 뭐든 빠르다. 외국에서 계산을 하려니 왜 이렇게 느리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될 것 같은데.
“근데 저거 다 사실 수 있으세요?”
그 물음에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최대한 연락을 늦게 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했다. 지금 막내에게는 유수한을 막을 만한 힘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막내의 메시지를 받고 PD나 서브 작가 정도가 온다면 낭패였다.
“네, 그럼요!”
그렇기에 일단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막내 작가를 혼란스럽게 할 생각이었다.
띠, 띠, 띠, 띠…….
바코드를 찍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유수한은 주머니에 있는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산을 뭐로 할 거냐는 계산원의 물음에 유수한이 카드를 꺼냈다.
“이걸로 부탁드립니다.”
능숙한 독일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언어 능력의 달인(S)]을 여과 없이 쓰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신용카드를 본 막내 작가가 급하게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상관없다. 이미 결제는 끝났고.
“잘 먹겠습니다.”
유수한은 한결 마음이 편한 상태로 봉투에 구입한 물건을 담고 있었으니까.
“오빠! 카드!”
그때, 옆 계산대에서 윤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잽싸게 유수한이 카드를 던진다. 윤지우는 필요한 화장품을 계산하고 있었다. 폼 클렌징, 선크림, 기초 화장품이었다.
멀리서 유수한이 뚝딱대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담는 걸 보았다. 하지만 바보같이 화장품을 놓치고 있었다. 윤지우는 자신을 따라붙은 PD를 보며 가장 저렴한 화장품을 사는 척했다. 사실은 중간대 가격이었는데, 그걸 남자 피디가 알 리가 없다.
“그만!”
저 멀리서 오 피디가 이정환을 버리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늦었어요…….”
그 모습을 보던 막내 작가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다 사셨어요…….”
낄낄낄낄낄낄.
저 멀리서 이정환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조이수도 박수를 짝짝 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 피디는 입을 떡 벌린 채, 이정환과 조이수를 보았다.
“이, 이거 다 압수할 겁니다!”
라고 항변하는 오 피디였지만.
“무슨 이유로요? 저희 이거 훔친 것도 아닌데요? 제작비에서 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압수하세요?”
할 말이 없다.
카드의 주인은 윤지우였고 뒤늦게 신용카드를 압수했지만, 이미 쓸 만큼 다 쓴 상태였다. 유수한은 얼마나 많이 카트에 담았는지, 큰 봉투로 세 개나 나올 정도였고 윤지우 역시 야무지게 화장품을 구입했다.
“가자. 배고프다.”
색칠 공부 하느라 손가락이 아팠던 노예들은 첫날, 제작진에게 크게 한 방 먹였다. 두 손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우리 수한이 요 예쁜 것, 와인도 샀네?”
이정환이 좋아하는 주종은 의외로 와인이었다.
아니, 사실은 모든 술을 다 좋아한다. 유수한은 맥주도 담고 와인도 담았다. 유럽은 물만큼이나 술이 저렴했다.
“가장 예쁜 건 우리 지우죠.”
시즌1에서는 별 활약이 없던 윤지우는 한 건 해냈다는 생각에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뭘 이런 걸 가지고요.”
윤지우의 발은 하나 더 있었다.
* * *
평소 예능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유수한이지만, ‘노예식당’에서는 마음이 편했다. 이미 알던 사람들과 한 번 더 호흡을 맞추니 심적으로도 편했다.
“짠!”
야외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웠다.
오 피디는 그래도 숙박만큼은 신경 써 주었다. 스태프와 같은 건물이었고, 야외 테라스가 있는 숙소였다.
“지우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뭘요. 어차피 다 뺏길 건 알았는데, 신발을 벗어 보라고 할 것 같진 않았거든요.”
“똑똑해. 우리 지우, 똑똑해.”
윤지우는 찬사를 받을 만했다.
유수한은 와인을 마시며 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유수한은 그냥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색다른 곳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김대한이라면 더더욱 생각지도 못할 호사였기에.
“나 오늘 수한이 이 녀석 술 마시는 건 처음 본다.”
“저도 되게 오랜만에 마셔요.”
지금까지 유수한은 금주를 생활화했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담배를 다시 시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제가 사고를 많이 쳤잖아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유수한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반성도 많이 했고 생각도 많이 했거든요. 술과 담배는 저한테 득이 될 건 없다는 생각에 끊었어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물론 계속 술은 조심할 건데요. 가끔은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가벼운 한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요.”
딱 한 잔이었다.
유수한은 와인 한 잔이면 충분했다. 처음 보는 풍경, 좋은 사람들,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오 피디를 또 괴롭게 했다는 쾌감, 이 순간에 술 한 잔이 곁들어지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몰아세웠다.
그래서 여행을 갈 생각도 하지 못했고 계속 일할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차 있었는데, 이러다가는 언젠가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다.
“조금은 저에게도 상을 줘야 할 것 같더라고요. 저 한동안 연기에 미쳐 살았거든요. 휴식기도 없이 계속 달렸어요. 오늘 독일에 도착하니 묘하더라고요. 왜 내가 여유를 잊고 사는지 모르겠고. 여행 갈 생각도 못 했는데, 오늘은 촬영이 아니라 여행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연기에 미쳐 살았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전에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포인트를 모아 본품을 구매할 수 있을지 궁리하느라 바빴고 계속 일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조금은 느슨해지려고 해요.”
그래야.
“더 오래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 *
티셔츠는 한 사람당 두 장씩 배분한다.
4개 묶음으로 두 개를 샀기 때문에 두 장씩 배분 가능했다.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샀고 조이수는 여유분이 있었기에, 하나만 갖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
“이거 남성용 화장품이요. 나눠 쓰세요.”
윤지우가 추가로 구입했던 화장품까지, 당장 급한 불은 껐다.
우당탕탕 어지럽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유수한은 가볍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번에는 개인 숙박이 아니었다.
세 명이서 한 객실을 함께 써야 한다. 그나마 침대는 따로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들 지친 눈이었다. 그 와중에도 샤워 순서를 기다리며 컬러링북을 조지고 있던 조이수의 눈도 맛이 가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컬러링북,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형은 그래도 쉬운 버전이잖아요. 저 진짜 눈알 빠질 것 같아요.”
유수한이 웃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내 건, 미로나 다름없어. 난이도 미쳤으니까.”
이정환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몸이 쑤신다. 장시간 비행도 지치는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노동을 했다. 그나마 소고기와 함께 와인을 마셔서 위로가 되었지만, 침대에 누우니 곡소리밖에 안 나왔다.
“내일은 힘들겠고 모레는 영업 가능하겠다, 그치?”
“네. 내일은 간판 달고 외관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재료도 사야 하고요.”
할 일이 산더미였다. 다들 지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다가, 하나둘 잠에 빠졌다. 몰려오는 잠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고된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HOT] 노예식당 시즌2 실시간으로 제작진놈들에게 털리는 노예들 +277
어느새 유수한은 한국에 돌아왔다.
대만은 독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즌1 같은 경우는 중간 합류였기 때문에 촬영 시간도 짧았는데, 시즌2는 아예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을 했다.
- 모자까지 뺏냐? ㅋㅋㅋㅋ 도둑놈들 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 이번에도 다 털렸쥬? 기가 막히쥬?
- 유수한 또 영혼 빠져나간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얼빠졌어 ㅋㅋㅋㅋㅋ
└└ 아니 이쯤되면 학습돼야 하는 거 아니냐고 ㅋㅋㅋㅋㅋ
└└└ 아직도 오 피디를 모르냐 ㅋㅋㅋㅋㅋ
‘노예식당’ 시즌2 역시 반응이 뜨겁다. 이미 시즌1에서 선보였던 포맷이었지만, 아직까지는 더 우려먹을 수 있는 소재였다.
제작진이 공개한 스틸 컷을 보니, 예전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독일에서의 촬영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어떨 때는 오 피디의 농락에 화도 났고 한 방 먹일 때는 그 어느 때보다 통쾌함을 느꼈다.
“여행이라.”
문득, 촬영과 무관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같이 일하는 민수나 보라를 데리고 휴식 겸 짧게 다녀와도 좋을 듯했다.
아니면 대신 효도한다 치고 부모님을 모시고 떠나도 괜찮을 것 같고. 물론 여행 기간 동안 피곤할 테지만.
유수한은 달력을 보았다.
어느새 9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간다.
“내년쯤에 생각해 보자.”
올해는 시간이 나지 않는다. 스케줄이 꽉 차 있기 때문이었다.
예능 ‘노예식당’의 방송은 일주일 정도 남았지만 유수한에게는 하나 더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OKEN]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 10월 중순 개봉 확정 …… 예고편 공개
유수한의 첫 주연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의 후반 작업이 마무리 단계였다. 2주 후에 VIP 시사회가 있었고 기다리던 영화가 첫 공개 된다.
예고편의 내용은 간단했다.
북한에서 훈련받은 서윤한이 남한에 도착해 살아가는 짧은 모습과 이인태와의 첫 만남이 그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북한 사람도 남한에서 선수가 될 수 있습니까?」
이인태에게 총을 겨눈 서윤한의 모습이었다.
「간첩입니다.」
파격적인 끝맺음이었다.
유수한은 예고편이 잘 뽑혔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북한을 다룬 영화는 꽤 많이 나왔다. 이번 예고편은 처음 도입부는 늘 보아 왔던 영화처럼 보였지만, 후반부에서 색이 완전히 달라졌다.
- 와, 저렇게 노빠꾸로 밝힌다고?
- ㅋㅋㅋㅋㅋㅋㅋ 전개 예측할 수가 없다
- 근데 간첩이 운동선수 할 수 있긴 함?
└ 되겠냐
└└ 영화는 영화일 뿐
└└└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긴 함 ㅋㅋㅋㅋ
예고편 조회수가 나쁘지 않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 맛보기나 다름없었기에, 그 시작이 중요했다. 전체적인 반응은 뻔한 소재일 줄 알았는데, 신선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 유수한 존잘 ㅇㅈ?
└ ㅇㅈㅇㅈ
└└ 아~ 쌉인정이지~
└└└ 두상 예쁘더라 머리 짧아도 잘생잘생
물론 잘생겼다는 반응도 터져 나왔다.
유수한은 노트북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이제 슬슬 유수한의 휴식기가 끝나 가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휴식을 취한 건 아니다. 쉬면서도 예능 촬영을 하고 화보 촬영도 했으며 밀린 광고 촬영도 진행했었다.
- 근데 유수한 소임? 전생에 소였나? 쉴새없이 일하네??
└ 그니까 ㅋㅋㅋㅋ 드라마 끝나고 바로 영화 찍고 예능도 찍고 ㅋㅋㅋㅋ
└└ 틀면 나오는 것 같아 요즘
└└└ ㅇㅈㅇㅈ 어쩌면 진짜 소가 사람 된 걸지도 모름 ㅇㅇ
└└└└ 한창 잘생길 때 일해야지 한철임 한철
한철?
역시 얼굴이 중요하긴 한 건가.
유수한은 거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배우에게 얼굴은 중요하다. 물론 가장 기본은 연기력이었지만, 얼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관리를 한다고 해도 나이 먹는 건 막을 수 없다.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면 나이를 먹는 건 당연했다. 지금 같은 인기가 영원히 유지되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젊음은 한철이다.
그러니 찍을 수 있을 때, 욕심내서 연기하는 게 가장 좋았다. 유수한은 물을 한 잔 마시고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는 ‘EXIT’ 대본이 놓여 있었다. 영화와 관련된 스케줄이 끝나면 바로 ‘EXIT’ 촬영이 시작된다.
유수한은 말 그대로 소처럼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