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우리가 어그로 끌어 줄게
비행기에 탔다.
일단 한번 해 봐서 그런가, 두 번째는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물론 가진 걸 모두 털렸을 때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또 적응 중이다.
“그니까, 이게 지금 1장에 1유로라는 거지?”
물론 이상한 미션은 역시나 따라온다.
이번에는 멤버 다 함께 움직여서 그런지, 오 피디는 비행기에서 할 미션을 준비했다. 바로 컬러링북과 색연필이었다.
PPL로 보이는 컬러링북은 비행시간 동안 유수한과 노예들이 해야 할 미션이었다. 물론 미션이라기보다는 용돈을 수집하는 개념으로 보였다.
노예들은 지금 당장 현지에 도착하면 쓸 돈이 전혀 없었으니까.
“진짜 가지가지 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정환은 색칠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도착하면 또 얼마나 돈이 필요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잠도 미뤄 가며 색칠을 한다. 대충 할 수도 없었다. 이미 오 피디는 제대로 색칠하지 못한 장은 돈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눈 빠질 것 같아요오.”
윤지우가 볼멘소리를 낸다.
어두운 기내에서 색칠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심지어 시작 전에 컬러링북을 고르는 게임도 진행했다. 퀴즈를 다 맞히면 제일 쉬운 단계를 얻게 되고, 퀴즈를 다 틀려서 점수가 엉망이면 가장 어려운 컬러링북이 주어졌다.
유수한은 중간 단계였다. 그리고 윤지우와 이정환은 가장 어려운 단계의 컬러링북, 조이수는 두뇌파답게 가장 쉬운 단계를 얻어 냈다.
슥슥슥슥.
색칠하는 소리가 작게 울린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색칠만 하다 보니 눈이 빠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손가락이 아프다.
“자, 유수한 씨 13유로.”
유수한은 겨우 얻은 13유로를 씁쓸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겨우 13장을 성공했다. 중간 단계라고 해도 그림이 생각보다 복잡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덤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능률이 떨어졌다.
눈은 아프지, 졸리지, 손가락까지 아프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13장도 악으로 깡으로 버틴 셈이었다.
“윤지우 씨는 8유로.”
어제 해외 스케줄을 돌고 왔다던 윤지우는 눈 밑이 어둠으로 자욱했다. 눈도 충혈되어 있었는데,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겠다고 용쓴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고작 1유로 8개였다. 동전 8개. 물론 원화로 치면 1유로는 천 원 이상이었지만, 동전으로 받다 보니 기분이 좋지 못했다.
“아이고. 이정환 씨는 달랑 5유로네요.”
웬만하면 5유로는 지폐로 줄 법도 한데, 오 피디는 약 올릴 생각이었는지 꾸역꾸역 동전으로 주었다. 유수한도 동전이었고 이정환, 윤지우도 동전으로 받았다.
“형, 진짜 뭐 한 거야. 지우랑 똑같은 거 했는데, 3장이나 덜 했어?”
조이수의 타박이 이어진다.
이정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5유로를 주머니에 넣었다.
“자, 조이수 씨는 28유로입니다. 많이 하셨네요?”
조이수는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초보 수준의 컬러링북을 받았다. 손재주도 좋은지 받자마자 순식간에 색을 채워 나갔다. 한 사람이라도 쉬운 단계의 컬러링북을 해서 다행이었다. 퀴즈에는 유수한도 영 실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와, 지폐다.”
조이수는 처음으로 지폐를 받아 왔다. 10유로 지폐 두 장과 나머지는 동전이었다. 여기서 조이수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조이수는 남은 세 사람이 합친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가져왔기 때문에, 지금 그 누구보다 의기양양했다.
“이제 새로운 식당으로 가야죠?”
오 피디는 기차 티켓과 함께 지도를 주었다.
지도에는 도착해야 할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노예들은 핸드폰도 없기 때문에 따로 검색하거나 지도를 볼 수 없었다. 즉, 아날로그 방식으로 알아서 찾아가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기차 티켓은 주네.”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 노예들이 도착한 곳은 독일이었다. 유수한은 ‘노예식당’을 하면서 항상 생각했지만, 꼭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 연기하면서 해외에서 촬영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보니 생각하게 된다.
이번 휴식기에는 짧게라도 여행을 다녀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자신이 워커홀릭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워커홀릭이 되어 가는 듯했다.
“밤베르크?”
독일 소도시로 움직인다.
지금 위치는 프랑크푸르트였다. 핑거소시지가 유명한 곳이다. 일행은 기내식을 먹었지만, 배가 고픈 상태였다. 돈 관리는 조이수가 맡게 되었고 가장 저렴한 식당에서 현지 음식을 구입했다.
“어때?”
핑거소시지를 빵으로 감싼 샌드위치였다. 콜라는 딱 하나를 사서 나눠 먹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독일에서 먹는 음식이라 느낌이 새로웠다.
사실 유수한은 좀 기분이 좋았다.
유럽은 처음이었는데 대만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혼이 빼앗기는 듯했다. 아름다웠다.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거리를 거닐 때마다 기분이 새로웠다.
“맛있어요.”
사실 뭘 먹어도 맛있다.
핑거소시지는 한국인이 먹기에는 몹시 짰는데, 빵과 함께 먹으니 짠맛이 중화되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샌드위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다들 이제 할 일 없으시죠?”
오 피디가 불쑥 나타나 비행기에서 열심히 칠했던 컬러링북을 주었다.
“가는 길에 푼돈이라도 버시죠?”
몹시 얄미웠다.
* * *
유수한은 예능 ‘노예식당’은 휴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며 새로운 음식을 먹고 때때로 관광도 한다. 물론 주는 식당 일이었지만, 그 외의 시간은 자유였다.
“일단 청소부터 하자.”
헤매고 헤매서 해당 장소에 도착했다.
폐업한 식당이라서 더 헤맸던 노예들이었다. 오랜 시간 방치된 식당은 엉망이었다. 당장 영업을 할 수 없는 건 물론 청소만 하루가 꼬박 걸릴 듯했다.
“숙소는?”
이정환의 물음에 오 피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번에 너무 쉽게 의식주를 제공한 것 같아서, 이번에는 알아서 구하는 시스템으로 바꿨습니다.”
뭐지, 이건.
“무슨 소리야. 우리 돈 없어.”
오 피디는 한층 더 심각하게 양아치가 됐다. 기차에서 컬러링북을 열심히 칠해서 번 돈은 12유로였고 숙박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걸 오 피디는 알고 있다.
“그럼 숙박 해결하게 해 드릴 테니까, 한 사람당 5유로씩 내세요.”
양아치가 따로 없다.
아마 시즌1에서 유수한에게 탈탈 털렸던 게 못내 마음에 남은 모양이다. 지난 시즌은 숙박만큼은 무료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돈을 받겠단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 사람당 5유로. 다른 숙박을 구하자니, 5유로로 구할 수 있는 방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할 수준일 것이다. 결국, 오 피디의 제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지금 돈 얼마 남았냐?”
청소를 하던 이정환이 조이수에게 물었다.
“35유로 조금 넘게 남았어요.”
“와, 우리 오늘 살 것도 많은데 큰일이다.”
챙겨 온 건 모두 털렸으니, 세면도구도 없는 상황이었다. 호텔에서야 치약이나 샴푸 정도는 있겠지만, 클렌징 폼 같은 건 없다. 무엇보다 갈아입을 속옷조차도 없었다.
“저 이럴 줄 알고 속옷 세 개 겹쳐 입고 왔어요.”
그리고.
조이수는 남달랐다.
“그거 아세요? 나 지금 양말도 두 개 겹쳐서 신고 옴.”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
미리 오 피디를 파악해서 철저히 준비해 왔다. 속옷이나 양말은 필수품이었기에, 돈을 아끼기 위해 불편하더라도 겹쳐 입고 온 셈이었다.
“다들 머리를 좀 쓰세요.”
물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속옷과 양말이 있는 조이수는 그 누구보다 부자처럼 보였다. 그게 정말이지, 추접스러웠다.
“그 정도 가지고.”
윤지우가 작게 속삭였다.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들 시선이 윤지우에게 모인다. 윤지우는 오 피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오 피디는 잠시 딴짓을 하고 있었고 윤지우가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신발 끈을 묶는 척하던 윤지우는 살짝 신발을 벗어 발바닥 밑에 숨어 있던 카드를 슬쩍 보여 주었다.
다들 눈이 커지고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들키면 끝장이기 때문에 입을 틀어막는다.
“이 정돈 돼야죠.”
윤지우는 조이수를 깨갱 하게 만들었다.
* * *
소곤소곤.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몸으로 청소와의 대결을 펼쳤다. 잠시 쉬는 시간,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은 작당을 벌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끔 오 피디가 팔로우 안 할 때 있잖아요. 그때, 질러야 해요.”
이정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카드는 한 번밖에 못 써요. 백퍼, 오 피디가 눈치채는 순간 뺏길 테니까.”
그 말도 맞다.
“만약 오늘 오 피디가 장 보러 갈 때 안 따라오면 그때 개시하죠.”
별 이야기는 없었다. 윤지우가 가져온 카드를 언제 쓸지, 그 이야기밖에 없었다. 일주일간 먹을 식량과 생필품을 최대한 살 생각이었다. 대형 마트로 가면 옷도 카트에 담을 수 있다. 오 피디가 따라 붙지 않는다면 감시는 한결 풀릴 테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주위를 분산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결제는-
“네가 해. 수한아.”
가장 얕은 수를 쓰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는 유수한이었다.
“아, 제가요……?”
유수한은 자신이 없었다. 도둑질도 못할 사람인데, 간 크게 카트에 이것저것을 담아서 순식간에 결제까지 끝낼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마. 우리가 어그로 제대로 끌어 줄게.”
자신은 없지만 해야 했다.
유수한은 본의 아니게 중책을 맡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짧은 휴식이 끝났다. 청소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거미줄을 치우며 청소를 마무리 지었다.
당장 영업을 시작할 수는 없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영업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자. 이번에는 따로 미션은 없고요.”
오 피디는 PPL이나 신경 쓸 생각이었다.
“컬러링북은 중간에 멈추면 종이 아까우니까, 돈 벌고 싶으시면 이거나 칠하세요.”
그 덕분에 숙소에서도 색칠 놀이를 하고 식당 준비 중간에도 색칠 놀이를 했으며, 밥 먹다가도 색칠을 하는 컬러링북에 미친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여기 제일 가까운 곳이 걸어서 10분 거리예요.”
호텔에 도착해 봤자 짐을 정리할 가방조차 없었다. 잠깐 시설을 둘러보고 나온 노예들은 윤지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윤지우는 막내답게 싹싹했다. 호텔 직원에게 근처 마트를 알아보았고 가장 크다는 곳의 위치를 알아 왔다.
다들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오 피디가 따라 나선 거다.
하지만.
[뭐, 실패하든 안 하든 시도나 해 보죠. 오 피디 있는 앞에서 한 방 먹이면 그림 죽이잖아요.]
조이수는 그렇게 말했다.
분량 챙긴다 생각하고 움직여 보자고.
“오, 좋네. 크고.”
이정환이 마트를 둘러보며 말했다. 유수한은 말없이 카트를 끌고 있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조이수가 가장 먼저 과자 코너로 움직였다. 그걸 시작으로 이정환은 맥주 코너로, 윤지우는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각자 흩어져서 사고 싶은 거 하나씩 골라 와.”
이정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카메라가 하나씩 팔로우한다. 오 피디의 선택은 이정환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비중이 큰 멤버를 따라가는 건 역시 메인 피디였다.
유수한은 한결 부담이 없는 막내 작가가 따라붙었다. 경력은 2년 남짓 되던가. 여러모로 여기까지는 운이 좋았다.
‘5분.’
유수한은 생각했다.
‘5분 안에 끝내야 한다.’
유수한은 뛰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가장 먼저 속옷부터 챙겼다. 휙휙, 카트에 담은 유수한은 바로 그 옆 매대에 있는 양말을 집었다. 그냥 가다가 손에 잡히는 건 모두 카트에 넣었던 것 같다.
맛있어 보이는 바나나도 카트에 담고 사과도 담았다. 그러다가 음료수가 보이면 담았고 맥주도 슥슥 담는다.
오 피디 담당인 이정환은 최대한 멀리 가서 시선을 떨어뜨렸기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조이수와 윤지우가 물건을 가져와 카트에 툭툭 넣었다.
유수한은 이제 슬슬 양 조절을 하고 있었다. 필요한 건 대부분 샀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슬리퍼는 물론, 아무 무늬가 없는 편한 티셔츠도 샀다.
마지막으로 손에 잡히는 와인 한 병을 담은 유수한은 바로 계산대로 움직였다.
“?”
막내작가는 뭔가 의아한 눈치였다.
카트에 담은 물건을 다 살 만한 돈이 유수한에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막내 작가가 핸드폰을 든다.
“작가님!”
유수한이 다급해진다.
“안 본 사이에 엄청 예뻐지셨네요?”
아무 말 대잔치였다.
지금 막내 작가가 핸드폰을 들었다는 건, 선배에게 이 상황을 말할 생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유수한은 무슨 말이든 다 던졌다.
“오랜만에 보니까 참 반가워요.”
그 말에 막내 작가가 미간을 좁혔다.
“네? 저 시즌1에는 없었는데요…….”
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