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07화 (107/175)

107. 핫가이 헬스

이틀 후.

유수한은 김승찬 감독과 오한성 작가를 만나러 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말 그대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해가 바뀌고 영화 촬영을 하면서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준비가 길어지다가 작품이 엎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좋은 일이다.

“어서 오세요.”

김 감독이 웃으며 반겼다.

이번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단독 룸이 있어 서로 대화하기 좋은 장소였다. 유수한이 가볍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죠?”

오한성 작가의 물음에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마시겠습니다.”

미리 커피를 주문하고 유수한을 기다린 두 사람이었다.

이미 한 번 유수한에게 거절을 당한 입장이라 심기일전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 물론 대본도 준비해 둔 상태였다.

“시놉시스 어땠어요?”

김 감독의 물음에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좋았습니다. 이번에는 정리된 느낌이었어요.”

“그럼요. 우리가 얼마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는데.”

이번에는 김승찬 감독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오한성 작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제대로 잠을 못 자고 나와서 어딘가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말짱했다. 이발도 했는지 말끔한 모습이었다.

“요즘 어때요? 영화 촬영은 끝났다고 기사 본 것 같은데.”

오한성 작가의 물음에 유수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요즘은 뭐 없어요. 있다고 한다면 이사 정도?”

“아, 이사 가시게요?”

“네. 일이 좀 생겨서 이참에 생활권을 옮겨 볼까 하고요.”

“그 루머 사실인가?”

작가들은 그렇다.

글을 쓰다가 안 풀리면 딴짓을 하게 된다. 글이 막히면 다른 세상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다. 평소 관심도 없던 정치 이야기도 재밌고 연예 가십거리도 역시나 재밌다.

이것저것 인터넷 세상을 누비며 딴짓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잡지식을 얻게 된다. 오한성도 마찬가지였다. 잡지식을 찾아 떠나다가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수한 씨, 사생팬 붙었다던데.”

유수한의 눈이 커졌다.

오한성이 설마 그 일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봤어요.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글 쓰다 보면 인터넷 엄청 하게 되거든요.”

“아, 어떻게 보셨지. 바로 기사 내리게 했는데.”

“그렇죠? 기사가 나긴 했죠? 어쩐지. 다들 맞다, 아니다, 엄청 싸우더라고.”

기사가 나긴 했다.

아무래도 경찰서에는 기자가 상주하니까. 최지영의 발악이 처절해서 꽤 오래 끌고 간 사건이었다. 눈치 빠른 기자 하나가 특종이랍시고 기사를 올렸고 이성실이 바로 대처했다.

글을 내리는 조건으로 다음 유수한 작품 관련 단독 인터뷰를 주는 조건이었지만, 짧게나마 조회수를 올렸고 다음 기삿거리도 얻어 냈으니 기자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K엔터와 이렇게 관계를 맺으면 유수한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와도 접점이 생길 수 있으니 빠르게 기사를 내려 주었다.

“네. 거의 1시간 만에 내리게 했는데, 그걸 보셨네요.”

“기사를 확인한 건 아니고요. 커뮤니티 돌아다니다 보니 관련 글을 봐서. 하하.”

말하다 보니, 오한성은 좀 멋쩍은 모양이다.

김승찬 감독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듣던 사생팬이었다. 그런 건 아이돌에게나 붙는 줄 알았는데, 배우에게도 달라붙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 괜찮아요?”

김승찬 감독이 물었다.

“네, 다 정리됐어요.”

유수한이 커피를 마시고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좀 신경 쓰여서 이사를 해야겠더라고요. 문 앞에 서 있던 게 생각나서.”

“문 앞에요? 설마 현관문?”

“네, 현관문.”

말하다 보니 그 때 일을 계속 말하게 된다. 유수한은 짧게 정리하고 미소를 지었다. 오한성 작가도 더 궁금한 건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세 사람은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대본, 궁금하다고 하셨죠?”

침묵을 깨고 오성한 작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용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탁.

총 8권의 대본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유수한은 눈을 찡그린다. 기분이 나빠서 눈을 찡그린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EXIT’의 대본이 궁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속 내용이 아니라 색이 궁금했다.

아직까지 ‘EXIT’ 대본을 확인한 적이 없었다. 늘 시놉시스를 보았고 변경된 시놉시스에도 아무런 빛이 없었다.

정확히 확인하려면 대본을 보아야 했다.

“좋네요.”

유수한이 씩 웃었다.

“보지도 않고요?”

오한성 작가의 질문에 유수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좋아요.”

그럴 수밖에.

지금 ‘EXIT’ 대본에서는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 *

미팅을 마치고 차에 올라탄 유수한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든든한 금빛 대본과 함께 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낫플릭스 ‘EXIT’는 현재 캐스팅 작업 중이었다.

이미 유수한은 드라마에 합류한 셈이었고 하나둘 캐스팅 작업이 마무리된 후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될 것이다.

“좋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귀중한 대본이 든 가방을 조수석에 두었다.

“어, 나 지금 출발해.”

오늘 유수한은 차기작 관련해서 짧은 회의가 있었다.

드라마 ‘식사남녀’를 마치고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까지 숨 가쁘게 달렸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EXIT’ 미팅을 마쳤고 이제 슬슬 다음을 위해 준비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대표실에는 마케팅 팀장과 김민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 축하한다. 김민수.”

그리고.

김민수에게는 축하할 만한 일이 생겼다. 드디어 긴 로드 매니저 생활 끝에 그에게도 직급이 생겼다. 물론 그 흔하디흔한 팀장이었지만.

“감사합니다. 형님.”

물론 여전히 김민수는 유수한 담당이다.

팀장이라는 직책이 생겼지만, 아직 현장을 뛰어 다닐 연차였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었다. 어엿한 팀장이라는 직급이 생겼다는 것과 연봉이 올랐다는 거였다.

물론 승진은 승진이니, 김민수 얼굴에 어느 때보다 화색이 돌았다. 월급도 올랐겠다, 예전보다 살 만해졌고 유수한은 개과천선을 했다. 당연히 얼굴이 활짝 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김민수 팀장이라고 불러야겠네.”

“아휴, 형도 참…….”

너스레를 떨고 유수한은 빈자리에 앉았다.

회의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거창하지는 않았다. 그저 새롭게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일을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우선 미팅은 어땠니?”

이성실이 유수한을 보며 물었다.

“아, 좋았습니다. 대본도 받아 왔는데, 괜찮아요.”

“네가 괜찮다면 그런 거겠지.”

“조만간 회사에도 공유해 주신다고 하니, 대표님도 한번 읽어 보세요.”

“그래.”

이제 이성실은 유수한의 작품 보는 눈을 믿는다.

자숙을 끝내고 복귀 후에 선택하는 작품마다 준수한 성적을 냈다. 이쯤 되면 유수한이 고르는 작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우선 광고 들어온 것 중에 괜찮은 게 있어서 말이야.”

“광고요?”

“그래. 이번에 S사에서 새로운 스마트폰 모델이 나오는 모양이야.”

“네.”

“지니어스라고.”

“아, 지니어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마트폰 모델이라면 나쁠 게 없다. 일단 휴대폰 광고 자체가 톱스타의 전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S사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입지가 탄탄한 기업이었다.

“계약 조건도 좋아.”

이성실이 가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1년 계약이고, 네 몸값이 올라서 6억 이상 받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수한이 계약서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좋다. 그저 스마트폰 광고가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흡족했다. 광고는 가끔 성적표 같았다. 작품이 잘돼서 위치가 올라가면 여러 광고가 들어오는데, 그 수준에 따라 성적표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 광고는 S등급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성적이라는 뜻이었다.

“어떠니?”

“좋습니다. 저야 늘 대표님 의견에 따르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말은 잘하네.”

“정말입니다.”

유수한이 웃자 이성실은 혀를 차면서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마케팅 팀장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대화를 듣고 있었다. 광고 이야기가 끝났고 차기작이 될 확률이 농후한 ‘EXIT’ 이야기도 끝났다. 그는 슬슬 대화에 참전할 각을 재고 있었다.

“저.”

짧게 운을 뗀다.

“작품 시작하기 전에 공백 생기잖아요. 몇 가지 공백 채울 방안을 생각해 봤는데, 원하시는 거 골라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케팅 팀장을 보았다.

“우선 예능은 어떠세요?”

“아.”

“어차피 ‘노예식당’이 새 시즌에 들어가기는 하는데, 그 전에 가볍게 예능 일회성으로-”

“예능은 괜찮습니다.”

중간에 말을 자르며 유수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케팅 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수한은 이제 예능을 더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위치였다.

더군다나 ‘EXIT’ 시작 전에 ‘노예식당’ 시즌2를 하게 되니, 예능은 더 할 이유도 없다. 그냥 그저 말 한마디를 더 해서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운을 뗐을 뿐이다.

“그러면 라디오나 화보 촬영은 어떨까요? 이번에 ‘핫가이 헬스’에서 섭외가 들어왔거든요.”

유수한은 이번엔 진지한 얼굴이었다.

라디오는 관심 없었고 늘 같은 화보 촬영이라면 넘겨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핫가이 헬스’라면 말이 달랐다.

몸 좋은 연예인이라면 한 번씩은 꼭 찍는 그 화보. 운동을 시작한 후로 은근 근육에 대한 욕심이 생긴 유수한이라 제법 구미가 당겼다.

“핫가이 헬스요?”

라디오는 제쳐 두고 ‘핫가이 헬스’에 관심을 보이는 유수한이었다. 그 반응에 마케팅 팀장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지금 차기작으로 영화도 찍었고 배역이 사격 선수잖아요. 운동선수. 그리고 하게 될지도 모르는 작품도 군인이고요. 여러모로 ‘핫가이 헬스’ 화보 촬영을 진행하면 역할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예정된 차기작들이 모두 남성미를 요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마케팅 팀장이 말한 대로 남성미를 보여 주기에 ‘핫가이 헬스’만한 것이 없었다.

“이 잡지 특징이 여자들도 많이 사지만, 남자들 역시 구매율이 좋거든요. 수한 씨는 꾸준히 운동하고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뽐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뽐.

이상하게 그 말이 웃기다. 유수한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당장 예능 ‘노예식당’ 말고는 스케줄이 없었다. ‘노예식당’ 촬영도 일주일이었다. 그 시간 외에는 휴식이었기에 화보 하나 찍는다고 무리 될 건 없었다.

“네, 좋습니다.”

한 번쯤은 잘 만든 몸을 제대로 자랑하고 싶었다.

가끔 이렇게 힘들게 식단 조절 해 가면서 운동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다. 왜 사람들이 비싼 돈을 들여 바디 프로필을 찍는지 알겠다.

동기 부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고생해서 만든 몸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 그 순간을 위해서 고된 과정을 견뎌 내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한 번쯤은 이런 화보 촬영도 괜찮을 듯했다.

“까짓거 한번 찍어 보죠.”

핫가이 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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