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낮져밤이
최지영은 끝까지 발악했다.
명품 시계를 집어 던지고 경찰이 달려와서 제지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유수한은 피곤함을 느꼈다.
“너 내가 얼마나 잘되는지 지켜볼 거야! 뭐? 범죄자? 팬을 범죄자 취급 해?”
유수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도 반항이 심해서 경찰이 질질 끌고 가는데, 끝까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최지영이었다.
“뭐? 팬사랑꾼? 지랄한다! 네가 무슨 사랑꾼이야! 팬을 이렇게 범죄자 취급하는데! 아아아아악! 이거 놔, 시발 놈들아!”
유수한은 경찰과 동행하지 않았다.
대신 경찰서에는 김민수를 보냈고 유수한은 뒤늦게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이 집이 드러난 이상 이사는 필수였다.
유수한은 짐을 챙겼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본가에서 지내는 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엄마, 오랜만.”
이 상황에 신난 사람은 역시 유수한의 모친이었다.
아들이 바쁘다고 통 집에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짐까지 싸 들고 왔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분간은 본가에 있겠다는 뜻이었다.
“우리 아들, 무슨 일이야?”
“그냥, 일이 좀 있어서.”
괜히 걱정할까 봐 오늘 있었던 일을 숨겼다.
유수한은 가장 먼저 씻고 싶었다. 집에 찾아온 사생팬 때문에 계속 다리 아프도록 인터폰 앞에 서 있었다.
피로함이 온몸을 덮친다.
“나 씻고 올게. 좀 피곤하네.”
“그래, 씻고 엄마랑 같이 드라마 보자.”
“응.”
대충 대답하고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오는 본가는 여전했다. 처음 유수한이 되고 이 집에서 눈을 떴다. 어찌나 집이 좋던지, 눈이 휘둥그레지던 순간이 여전히 선명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유수한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1층으로 내려왔다.
“수한아, 지금 광고 중이야. 어서 와.”
신난 목소리.
항상 유수한의 모친은 아들의 작품을 챙겨 본다. 당연히 드라마 ‘식사남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수한은 작게 미소를 짓고는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다른 사람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직접 겪어 보니 남 일도 아니었다. 하기야, 연예인이 되었으니 이런 비상식적인 일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웠고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라 더더욱 곤란했다. 언제부터 따라다녔을까. 혹시 집 안에도 들어왔을까? 온갖 의심이 머리에 차오른다.
“아들, 무슨 일 있어?”
유수한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자 모친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아니, 없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유수한이 말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 * *
드라마 ‘식사남녀’ 마지막 회.
이윤수의 어장에 들어간 강인한은 조금씩 상황에 적응한다. 항상 이윤수가 강인한에게 다가갔지만, 이윤수의 어장에 들어간 후로는 강인한이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다.
서로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가끔은 멀리도 떠났다.
퇴근 시간 전에 익숙하게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익숙해졌다. 아직 두 사람은 본격적인 연애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사실상 연애 중이나 다름없었다.
「여기 화덕피자가 유명합니다. 이윤수 씨와 오려고 한 달 전부터 예약했으니까, 부담 갖고 드세요.」
그 말에 이윤수가 미간을 좁혔다.
「부담 갖고요?」
「네.」
「왜요?」
「왜냐면…….」
강인한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툭.
테이블에 반지 케이스를 놓은 강인한이 이윤수를 바라보았다.
「부담을 가져야 내 마음을 받아 줄 테니까.」
강인한은 조금씩 바뀌려 노력하고 있었다.
더는 두렵다고 도망가지 않고, 마음을 표현하는 게 어색하다고 숨지 않는다. 하루에 딱 3번만, 솔직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윤수에게 솔직한 마음을 3번 표현한다.
처음에는 솔직하게 보고 싶었다고 말했고 두 번째는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싶다고 말했으며 세 번째는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루에 3번씩 솔직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더 많이 표현하게 될 것이다.
서서히 자연스럽게.
「먼저 구경이나 해 볼게요.」
이윤수는 새초롬하게 말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강인한을 먼저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게, 강인한은 정작 고백을 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장에 들어오겠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다음은 없었다. 그러니, 때 아닌 반지를 보고 기쁠 수밖에.
「와.」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물론 이 반지는 PPL이었다. 주민하가 광고하는 주얼리 브랜드였고 강인한이 고백하며 선물하기에는 조금 급이 맞지 않았지만, PPL이니 넘어간다.
「예쁘다.」
강인한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이윤수는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가 이내 손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1일입니다.」
반지를 끼워 주며 강인한이 미소를 지었다.
- 얘들아 ㅠㅠㅠㅠ 강인한 이제 고백도 할 줄 아는 남자다
- 드르륵...탁...오늘부터1일입니다...드르륵..탁...오늘부터1일입니다..드르륵...탁...
- 강인한이 준비한 반지 ㅋ 이윤수 PPL ㅋ 깬다 ㅋㅋㅋㅋ
- 오늘부터 1일이래 ㅋㅋㅋㅋㅋ 윤수 소파에서 1일이라고 발광하던 거 생각남 ㅋㅋ
└ ㅋㅋㅋㅋ 그때 이윤수 개귀여웠어 ㅋㅋㅋㅋ
└└ 드디어 얘네 1일이다 ㅠㅠㅠㅠㅠㅠ 썸도 존나 오래 타더라;;;;
└└└ 마지막까지 썸만 타다 끝날 줄 알았어 ㅋ
시즌1부터 이어진 강인한과 이윤수의 인연은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함께 출근을 한다. 강인한은 차를 끌고 이윤수 집에 가는 게 생활이 되었고 이윤수 역시도 강인한 차를 타는 게 익숙해졌다.
물론.
비밀 연애였기에 이윤수는 회사 근처에서 내려야 했다.
「와, 강 팀장님 집은 처음인데 엄청 좋네요?」
이윤수가 살고 있는 집은 방 한 칸이 딸려 있는 작은 집이었다. 거실과 방 한 칸, 11평 남짓 되는 집이었고 사회 초년생이 살기에 적당했다.
강인한의 집은 넓다.
일단 방이 3개였고 신축이었다. 신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부러운데, 위치도 역세권으로 좋았다. 이윤수는 부러운 눈으로 집을 둘러보았다.
「강 팀장님, 왜 먹지도 못하는 술을 사다 놨어요?」
「이윤수 씨가 좋아하니까.」
강인한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이윤수는 말없이 정장이 아닌 편안한 차림의 강 팀장을 바라보았다.
「팀장님, 오늘 다른 사람 같아요. 머리도 막 내리고.」
「근데, 언제까지 팀장이죠?」
「네?」
「내가 연애하면서도 상사가 되어야 하나?」
「…….」
이윤수는 멍하니 강인한을 보았다.
물론 속으로 호칭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다른 호칭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인한 씨?
아니, 그건 너무 오글거리고.
오빠?
아니, 그건 더 오글거리는데.
「우리 연애 중이잖아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강인한이 이윤수에게 다가갔다.
멍한 눈으로 강인한을 보던 이윤수의 눈이 커진다. 코앞까지 다가온 강인한은 미소를 지으며 이윤수의 입술을 훔치고 떨어졌다.
「난 부하 직원과 연애하는 취향은 없어서.」
「뭐, 뭐라고 부르길 바라는데요?」
「글쎄…….」
강인한이 이윤수의 허리를 붙잡아 들었다.
「윤수 씨가 원하는 대로.」
식탁에 이윤수를 앉힌 강인한이 입술을 부딪힌다. 로맨스 드라마에서는 키스신은 당연히 흔하다.
그나마 ‘식사남녀’는 끝나 갈 즈음에야 애정신이 늘었고, 드라마 팬들은 굶주린 듯 애정신을 흡입하고 있었다.
- 와후! 강인한 폭스! 강폭스!
- 이거잖아! 내가 원했던게 이거잖아!!!
- 크으bb 강인한 연상은 연상이다 존나 섹시한거 보소 ㅋㅋㅋㅋㅋ
- 강인한 낮져밤이지?
└ ㅇㅇ 낮에는 이윤수에게 져줄 듯
└└ 지금 보면 완전 낮져밤이
└└└ 완전 낮져밤이 ㅋㅋㅋㅋ
그리고.
드라마를 보는 유수한은 오글거렸다. 연기에 몰입해서 망정이지, 평소 주민하와의 관계는 거의 친남매 수준이었다.
다행히 둘 다 일은 잘하는 편이었다.
주민하는 장난을 치다가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눈빛이 바뀌었고 유수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연기하는 그 순간에는 주민하가 이윤수였기 때문에 금세 그 감정에 동화할 수 있었다. 물론 하고 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함이 찾아왔다.
- 애들아 키스신 왜 이렇게 찐해??? ㅋㅋㅋㅋㅋ ʕ ି ڡ ି ʔ
└ 222 엄빠랑 같이 보는데 민망..ㅋㅋㅋㅋㅋ
└└ 33333 물빨핥 장난 아니고요.. 근데 웃음이 왜 나오죠? ㅋㅋㅋ
└└└ 4444 여기 키스 맛집이네 ㅋㅋㅋㅋ
└└└└ 55555 진심 저러다 둘이 스캔들 나겠네 ㅋㅋㅋ 개 찐해ㅋㅋㅋㅋㅋㅋㅋ
이강은 피디는 어찌나 키스신을 공들여 찍었는지, 1분 넘게 키스만 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유수한은 옆에 앉은 모친이 신경 쓰였다. 다행히 모친은 아무 생각 없는 눈으로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었다.
“수한아, 난 저 여자애 괜찮더라.”
“응?”
“잘해 봐.”
그 말에 유수한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엄마, 친남매한테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응?”
“나랑 쟤는 딱 그런 사이야. 사적인 감정 전혀 없으니까, 김칫국 마시지 마.”
으.
유수한은 몸을 부르르 떨며 주민하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것에 치를 떨었다.
[OKEN] ‘식사남녀-시즌2’ 꽉 닫힌 해피엔딩! …… 최고 시청률 경신할까?
오랫동안 함께 했던 드라마 ‘식사남녀’가 막을 내렸다.
기분이 묘했다. 시즌제 드라마는 처음이었고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드라마라 더 의미가 깊었다.
오늘 실시간 시청률은 좋았다.
따로 듣기로 키스신할 때 순간 시청률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그 이후에 계속 상승 곡선을 보였고 잘하면 시청률 15% 고지를 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형님, 우선 CCTV와 블랙박스 확인했는데요. 꽤 오랫동안 스토킹했더라고요.]
드라마가 끝난 후 김민수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일단 대표님께 말씀드렸고요. 회사에서 적극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선처는 없다.
이성실 성격상 선처 따위를 생각할 리가 없었다. 유수한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유수한은 한숨을 쉬며 답장을 보냈다.
[그래. 이번 일은 회사에 맡길게.]
피곤한 일에는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번 일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다. 유수한은 엄마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내놓고 새로운 집을 구해야 한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머리에 두통이 느껴졌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하던 유수한이 심호흡을 하며 다시 눈을 떴다.
[빛유/서포트]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 서포트 영상 공개! +1088
[빛유/서포트]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 서포트 스틸컷! +888
사생팬은 사생팬이다.
그저 미꾸라지 하나가 물을 흐렸을 뿐이다. 유수한은 이대로 계속 팬과 가까이 지내는 게 좋은 일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 되는 한 사람 때문에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 오빠 ㅠㅠㅠㅠㅠ 눈에서 꿀 흘러요 ㅠㅠㅠㅠ 이러다 벌 꼬일 듯 ㅠㅠㅠ
- 흑흑 이번에도 최고네요 ㅠㅠ 이렇게 영상 올려주셔서 압도적 감사 ㅠㅠㅠㅠㅠㅠ
- 하악 이번에도 너무 고퀄 ㅠㅠㅠㅠㅠ 운영진 수고하셨어요 ㅠㅠㅠㅠ
- 어묵꼬치 먹는 거 개귀여움 ㅠㅠㅠㅠㅠ 와앙 하고 먹네 와앙 ㅠㅠㅠ
└ 22222 와앙 하고 먹는게 이렇게 귀여울 일??
└└ 333 진심 어묵꼬치 먹는게 이렇게 귀여울 일???
└└└ 44444 저 지금 벽 부셨잖아요 큰일 남...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
유수한은 괜한 일로 마음을 더럽히지 말자고 생각했다. 늘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었고 좋은 사람만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