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걔 사생이라는데?
이경민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무지 그 문제의 팬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가 회사라면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해고를 시킬 수 있겠지만, 고작 팬사이트였다.
K엔터에서는 팬클럽을 따로 운영하지 않는다.
보통의 배우 팬덤은 그랬다. 누구 하나가 총대를 메고 사이트를 파거나, 파랑새 계정을 만들거나 아니면 비회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모 사이트를 이용한다.
물론 어디든 사이트를 전반적으로 운영하고 회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지만, 누굴 제재할 만한 권한은 없었다.
“어떨 것 같아요, 그 최지영?”
이경민이 다음 날 서포트 정리 글에 쓸 사진을 보정하다 말고 입을 열었다.
다들 정신이 없었다. 한 사람은 편집을 열심히 하고 있었고 남은 한 사람은 오늘 유수한에게 받은 선물을 포장하고 있었다.
내일 당장 추첨을 돌릴 상품이라 미리 사진을 찍었고 드라마 ‘식사남녀’가 끝난 후에 공지를 올릴 생각이었다.
“말이 안 통하잖아요. 뭐라더라?”
최은주가 한숨을 쉬며 최지영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왜 개인 선물이 안 되는데요? 그거 월권 아니에요? 무슨 대통령이라도 돼요? ‘빛유’ 대통령?]
최지영은 적반하장이었다.
나중에 따로 불러 좋게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말이 곱지 못했다
“사실 이게 애매하잖아요. 개인 선물을 했지만, 수한 오빠가 받은 것도 아니어서.”
“그렇죠. 괜히 탈퇴시켰다가 역폭풍 맞을 수도 있고.”
“꼭 정치질 하는 사람도 생기고요.”
“아무래도 운영진 한답시고 배우 만나러 가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존재하니까요.”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한숨이 나온다.
괜히 팬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탈퇴를 시키면 또 다른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가만두려니, 계속 마음이 찝찝한 거다.
“모르겠다. 우선 이거나 빨리 해치우고 쉬어요.”
“네. 오늘 드라마도 봐야 하잖아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골치 아픈 생각은 뒤로하고 드라마를 보기 위해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경민은 보정을 마치고 허리를 폈다.
중간에 포장 작업을 마친 최은주가 보정을 함께 진행해 줘서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보정 작업도 나누면 좋겠지만, 실상 그럴 수 없었다.
각자 보정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급할 때 아니면 이경민은 자신이 도맡아 하곤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나눈다.
이게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어?”
20분짜리 영상을 편집한 김지연은 색 보정을 돌리고 있었다.
그 남는 시간 동안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는데, ‘빛나는 유수한’ 운영진에게 쪽지가 날아왔다.
“저기, 있잖아요. 최지영.”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다들 시선이 김지연에게 모인다.
“걔 사생이라는데?”
그 말에 당황한 듯 이경민의 입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쪽지! 지금 다들 쪽지 확인하세요!”
김지연의 말에 후다닥 핸드폰을 손에 든다.
이경민도 최은주도 같은 아이디를 공유하고 있었다. 쪽지가 하나 와 있었고, 보낸 사람은 오늘 당첨돼서 현장에 참여했던 팬 중에 하나였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문제를 일으켰던 ‘최지영’을 알고 있고, 그가 예전에 사생짓을 하다가 아이돌 팬덤에서 쫓겨난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헐.”
뒤늦게 깨달음이 찾아온다.
개인 선물이고 뭐고, 왜 처음 볼 때부터 촉이 좋지 못했는지, 왜 이렇게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전부 깨닫게 되었다.
“어쩐지, 눈이 그래 보이더라니까?”
최은주의 말에 김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영상 찍어야 한다고 사전에 누누이 말했는데, 못 들은 사람처럼 행동하질 않나. 수한 오빠가 다른 사람하고 대화 좀 하겠다는데, 그걸 그렇게 길을 막고. 다 이유가 있었네.”
이경민은 쪽지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사생짓을 하다가 아이돌 팬덤에서 쫓겨났고, 그다음 옮겨 탄 대상이 유수한. 유수한은 팬에게 참 잘하는 사람이었기에, 최지영의 집착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 증거로.
“오늘 그래서 롤락스 시계 사 온 건가?”
짧게 침묵.
“사생짓 하는 애들, 돈 안 쓰는 애들도 있지만, 돈으로 존재감 과시하는 애들도 있잖아요.”
“일리 있어요. 일부러 명품 선물 준비해서 떡하니 대령하는 팬들 많으니까.”
“그래도 천 단위는 좀 아니잖아. 롤락스가 얼만데…….”
이경민은 제보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를 파랑새에 입력했다.
아이돌 그룹 ‘악스’의 비주얼 멤버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던 사생팬. 파랑새 검색창에 ‘악스’와 ‘사생팬’을 더한 후에 검색하니 주루룩 정리글이 올라왔다.
[아이돌 <악스>의 악성 사생팬 ‘정현아결혼하자’를 고발합니다!]
하, 닉네임도 비슷하게 사용했어?
“얘, 빼박인데요? 사생?”
“왜요?”
“이거 보세요. 닉네임이 똑같아.”
옹기종기 모여 핸드폰을 본다.
서로 모여 정리글을 읽는데 오늘 보였던 패턴이 그대로 지난 덕질에 녹아 있었다. 그 말인즉슨, 지금 최지영은 시동을 걸었다.
본격적으로 사생짓을 할 시동을.
“안 되겠죠?”
이경민의 물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선 매니저님께 이 사실 알릴게요.”
* * *
유수한의 매니저 김민수는 이미 유수한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 중이었다.
[지금 바로 우리 집으로 와. 지금 집 앞에 팬 찾아왔어.]
신호 대기 중이었고 보라를 데려다주러 가던 상황이었다.
문자를 확인한 김민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집 앞에 팬이 찾아왔다니. 그 말을 쉬이 믿지 못했는데, 그 다음 이어지는 메시지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끼이익.
김민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마저 문자를 확인했다.
[요즘 이런 걸 사생팬이라고 하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민수가 지금 바로 달려가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핸드폰을 보라에게 넘겼다.
“지금 형님한테 사생팬 붙었대요.”
“네? 사생팬?”
보라는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하고 혀를 짧게 찼다.
“이럴 줄 알았어. 이 롤락스일 줄 알았다니까.”
사진을 보니 확실하다.
눈은 웃지 않는데 입만 웃고 있는 사진은 뭔가 꺼림칙했다. 이 팬이 쎄하다는 건 보라도 느끼고 있었다.
뭔가 기분이 불쾌했다.
여자란 여자를 모두 견제하는 듯한 느낌. 보라는 유수한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어묵꼬치를 먹고 있었는데도, 최지영의 눈초리에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어? 매니저님, 전화와요.”
“형님?”
“아니요. 수한 오빠는 문 앞에 사생 있는데 전화를 하겠어요? 사생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 팬클럽 회장이요.”
“아, 경민 씨? 받아 봐요.”
“네.”
보라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매니저님 운전 중이라 제가 받았어요. 스타일리스트요.”
이경민의 목소리는 작게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을 제대로 믿어 줄지 긴가민가한 듯했다. 가끔 팬의 의견을 묵살하는 회사가 많다 보니까, 알 수 없는 주저함이 생긴다.
[그, 오늘 오셨던 팬분들 중에 롤락스 시계 기억하시죠?]
“네.”
[아무래도 사생 같더라고요. 지금 제보가 들어와서 확인했는데, 예전 사용했던 닉네임과 비슷하고요, 행동 패턴이 같아요. 최근에 수한 오빠가 ‘나의 하루’ 예능 찍었잖아요. 그때 집이 공개돼서, 그 사생이 어디에 사는지 알 수도 있거든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려요.]
“맞아요. 그 사람 사생이에요.”
매니저가 미간을 좁힌다.
“보라 씨! 그렇게 세세하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어요.”
“아, 뭐 어때요. 이런 게 알려져야 여기 회장님도 문제 되는 사람 내보내지.”
“어휴.”
어차피 대화를 들어 보니 팬들도 이미 알고 있는 상황 같았다.
매니저는 빠르게 차를 운전하며 112에 신고부터 해야 할지 고민했다. 우선 잡는 게 먼저일까. 괜히 경찰을 불렀다가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
“네네. 걱정 마세요. 정보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라가 전화를 끊는다.
벌써 집에 찾아왔다는 말에 이경민은 기겁을 했고, 보라는 성의 없게 달래 준 후 통화를 마쳤다.
어느새 다시 유수한 집 앞이었다.
“보라 씨는 여기 있어요. 괜히 위험할라.”
“뭐, 같은 여잔데 무슨 일 있겠어요?”
“사생 만나 본 적 있어요?”
“아뇨?”
“보통 아니에요. 정신 나간 애들이라고요. 나오지 마세요.”
문을 닫은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공동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김민수는 예전에 신인 아이돌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K엔터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보이그룹이었지만, 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 이후 이성실은 아이돌을 키울 생각을 접었다.
배우 매니지먼트에만 충실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판단이었다.
김민수가 잠깐 그 보이그룹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유수한은 자숙 중이었고 시간이 비었기에 맡은 거였는데, 인기가 없다고 무시하면 곤란하다.
인기가 없기 때문에 악질 팬들이 더 쉽게 붙었다. 인기가 많은 그룹은 팬이 몰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가수를 독점하기가 쉽지 않은데, 인기가 적으니 독점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집 앞에 찾아가고.
사인회에서 값비싼 선물을 안겨 가며 세뇌시키려 한다. 인기 없는 너에게 이렇게 관심을 주고 돈까지 쓰는 내게 감사히 여기라고.
[형님, 저 지금 올라가고 있습니다.]
매니저는 고민했다.
엘리베이터를 탈지, 계단으로 올라갈지. 계단은 위험했다. 올라갈 때마다 센서등이 켜지기 때문에 최지영이 눈치 챌 가능성이 있었다.
차라리 엘리베이터?
그 또한 미지수다. 올라가는 층수를 최지영이 확인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내가 나갈거야. 내가 나가면 도망가지 못하겠지.]
그 말에 김민수가 경악했다.
[제정신이세요? 그 여자가 무슨 짓 할지 알고요.]
[무슨 짓 안 할걸. 어쨌든, 허둥대지 말고 타이밍 잘 맞춰라.]
유수한은 계속 인터폰 앞에 서 있었다.
화면 속에서 최지영은 보였다가도 다시 어둠 속에 사라졌다. 그 말은 귀를 대고 있을 때는 카메라가 가려져 어두워졌고 물러설 때는 얼굴이 드러났다는 의미다.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 말로만 듣던 사생팬이었다. 스토킹을 일삼고 때때로 집 안까지 들어오는.
“여기서 뭐 하세요?”
문이 열리자, 역시 최지영은 도망가지 않았다.
“오빠!”
오히려 반갑다는 듯 웃는다.
“여기 사세요? 저 이 근처에 사는데.”
뻔뻔한 거짓말.
유수한은 사생도 나름 팬이라는 생각을 작게 하고 있었는데, 사생짓을 하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질렸다.
“모르나 본데.”
유수한은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하고 있었다.
김민수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이거 범죄예요.”
최지영의 눈은 줄곧 웃지 않았다. 하지만 입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이질적이었고 유수한에게 티끌이나마 남은 정까지 사라지게 할 만큼 역겨웠다.
지금.
입에 번진 최지영의 웃음이 사라졌다.
“범죄? 내가 사랑해 주겠다는데, 사랑을 주는 게 왜 범죄예요?”
드디어, 최지영의 본색이 드러났다.
“내가! 좋아해 주겠다는데, 왜 날 범죄자 취급 하냐고! 왜!”
유수한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최지영을 보았다.
항상 팬을 볼 때 눈에 꿀이 뚝뚝 흐르던 유수한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최지영은 그가 신경 써 줘야 할 소중한 팬이 아니었다.
“좋아하지 마.”
유수한은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김민수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구의 김민수가 성큼성큼 다가와 최지영을 막았다.
“나도 범죄자 팬 둘 생각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