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목 날아간다고 했을 텐데
대본 리딩 뒤풀이는 근처 고깃집에서 진행됐다.
이번에도 유수한은 고기 담당이었다. 집게를 들고 굽느라 바빴다. 어차피 술을 먹는 것도 아니고, 고기를 원껏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렇게 고기를 굽는 게 차라리 나았다.
“저 요즘 식사남녀 잘 보고 있어요.”
“저도요!”
처음 만난 배우가 많은지라 회식 자리는 다소 어색함이 돌았다.
그 어색함을 깨는 화제는 유수한이 출연 중인 드라마였다. 유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뒤집었다.
“볼 때마다 어쩜 그렇게 잘 먹어요?”
“맞아요. 진짜 먹는 거 같아요.”
“보통 그런 먹방 촬영은 먹다가 뱉거나 먹는 척만 하잖아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배우에게 음식은 위험했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찔 수밖에 없고 몸 관리를 해야 하는 배우라면 음식을 기피하게 된다.
드라마 ‘식사남녀’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강은 피디의 철학 덕분이었다.
“그 첫 컷은 무조건 맛있게 먹거든요.”
유수한이 집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피디님 철학인데, 먹방 드라마일수록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요. 첫 컷은 무조건 음식이 식기 전에 맛있게 먹습니다.”
“와. 부럽다.”
“반복해서 찍지도 않고요. 최대한 첫 컷에서 타이트 샷도 다 따 놓고요.”
“아, 그래서 맛있게 드셨구나?”
미소를 지으며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구운 고기를 사람들의 앞접시에 놓아 준다. 유수한은 이 회식 자리에서 인기가 좋았다. 지금은 조연 배우가 모여 있는 테이블에 와서 고기를 구워 주고 있었다.
그러다.
“수한아!”
원래 자리였던 테이블에서 유수한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수한은 고기를 뒤집던 손길을 멈추고 자리에 앉은 배우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저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맛있게 드세요.”
조연이든, 단역이든.
유수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연과 더 많이 부딪히지만, 조연이나 단역 역시도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건 매너가 아니라 당연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라고 생각한다.
“진짜 잘생겼다.”
“소문과 달라서 너무 놀랐어요.”
긍정적인 반응을 뒤로하고 유수한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유수한이 앉은 테이블은 주연 배우와 고운영 감독이 앉아 있었다. 여전히 고기가 익어 가고 있고, 유수한이 집게를 들었다.
“좀 먹지. 또 고기 굽게?”
어느새 말을 놓게 된 최지원이 물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굽기라도 해야죠.”
“너 너무 흘리고 다니지 마라.”
“네?”
“고기 구워 주는 건 좋은데, 여기저기 막 그러고 다니지 말라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유수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안 그런 사람이 더 많지만, 가끔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유수한은 고기를 구웠다.
김대한으로 살았던 시간이 길었던지라, 작은 호의에 누군가가 설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은 유수한이었고 그의 외모는 가만히 웃기만 해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뭘 하지는 않는다.
그저 같이 출연할 배우와 얼굴도 익힐 겸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고기도 구워 주며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조심해. 괜히 파리 꼬일라.”
유수한은 짧게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럴 만한 일은 없지만, 선배의 조언을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수한 씨가 잘생기긴 했어요.”
말이 별로 없는 고운영 감독도 말을 얹었다.
“내가 생각한 서윤한이 아닌데, 결국 캐스팅했잖아요. 이렇게 잘생겼는데, 이런 사람이 주인공을 못 하면 누가 하나 싶어서.”
“감독님, 그건 너무 외모지상주의 아니에요?”
최지원의 말에 고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다.
“다 잘생겼죠. 배운데.”
“그건 약간 나 먹이는 것 같다.”
소주를 마시던 정동인이 핀잔을 주었다.
누가 봐도 정동인은 인상파 배우였지, 얼굴이 잘생긴 배우는 아니었다.
젊을 때부터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감초 조연으로 영화계에 얼굴을 비추던 정동인은 나이를 먹어 가며 주연 배우로 발돋움했다.
물론 그는 지금도 연극을 놓지 않고 있었고 좋은 배역이라면 드라마 조연도 마다하지 않는 배우였다.
“난 사실 얼굴만 잘난 놈 안 좋아한다.”
정동인이 고기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연기야, 연기. 내가 예전 고 감독 독립 영화 찍을 때 말이야, 놀랐잖아. 같이 나오는 배우 얼굴 수준이 딱 나야, 나. 그래서 이 양반 스타일이 딱 나인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내가 놀랐어. 주인공 캐스팅했대. 그래서 누군데? 물어보니까, 쟤였던 거야. 쟤.”
고 감독은 정동인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고 있다.
애초에 이번 작품 이야기를 할 때도 주인공은 얼굴에 상관없이 매력 있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캐스팅하겠다고 말했다.
캐스팅 작업에 돌입하고 고운영은 날고 긴다는 배우는 모두 만나 보았다.
딱 필이 꽂히는 배우를 쉽게 찾을 수 없었는데, 유수한을 보는 순간 새로운 서윤한이 머리에 그려졌다.
“수한이가 얼굴이 아주 잘생겼잖아. 그래서 생각했지.”
탁.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정동인이 말했다.
“우리 고운영 감독도 여자였구나.”
“선배님, 저 그런 말 예민합니다. 저 얼굴 진짜 상관없어요. 제가 그래서 제 첫 상업 영화를 선배님 주연으로 함께하는 거잖아요.”
“어, 얘 나 멕이네?”
“제가 어떻게 선배님을 멕여요. 우리 정 선배님은 얼굴 대신 연기력이 엄청나고 매력도 장난 아니신데.”
고운영 감독과 정동인의 인연은 꽤 깊었다.
독립영화계에서 활동을 할 때, 고 감독은 정동인을 모델로 캐릭터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용기를 내어 캐스팅 제안을 했는데, 시나리오를 좋게 본 정동인이 개런티 상관없이 출연했다.
그때 인연으로, 두 사람은 성별에 관계없이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둘은 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번 상업 영화를 기획하면서도 정동인을 1순위 캐스팅으로 올려놓았던 고운영이었다.
고 감독에게 정동인은 중요한 배우였고 정동인 역시도, 나이는 어리지만 고 감독을 신뢰했다.
“수한 씨는 제 예상을 벗어난 배우였어요.”
유수한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운영 감독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너무 잘생긴 거야.”
그때를 회상하는 고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상업한다고 배우란 배우는 모조리 만났는데,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서 좀 놀라긴 했어요. 물론 이건 일이니까, 서윤한에게 어울리는지 검증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고운영이 그렸던 주인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제가 생각한 서윤한은 솔직히 아니었어요. 근데 매력 있더라고요. 새로운 서윤한이 머리에 막 그려지는데, 내가 생각했던 주인공보다 더 괜찮은 거야.”
칭찬이 이어진다.
“아직 촬영 들어간 것도 아닌데 시나리오는 고치면 그만이잖아요? 글은 다시 쓰면 되지만, 촬영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촬영 시작하면 그냥 시간이 돈이니까. 그래서 질렀어요. 새로운 서윤한을 만들어 보자, 그런 생각으로.”
고운영의 열변을 듣던 최지원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감독님.”
계속 고 감독은 돌려 돌려 말하고 있지만, 그래서 굉장히 대단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결론은.
“결국 잘생겨서 캐스팅했다는 말이잖아요.”
이거였다.
* * *
[HOT]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대본 리딩 고화질컷 +359
다음 날.
대본 리딩 스틸 컷이 공개되었다. 영화에 대한 소식이 하나둘 전해진다. 촬영 스케줄이 나왔고 두 달간 정신없이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 워후, 유수한 여전히 존잘
- 이거 악역이 최지원이지? 국정원이라던데
└ 아직 모름
└└ 간첩이 주인공이라 국정원 악역 만들면 좀 위험하지 않나?
└└└ 맞아 악역은 아닐 듯
- 지금 유수한 손가락으로 총 만든 건가? 정동인 겨누는 듯
└ 유수한 표정 살벌한 거 보니 맞는 듯 ㅇㅇ
└└ 정동인 기겁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정동인 진짜 연기 개 잘해 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 손가락 보고 어떻게 저렇게 연기하냐; ㅋㅋㅋ
유수한은 지금 의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촬영이 다음 주였고, 보라가 일주일 전에 미리 의상을 준비해 왔었다. 서윤한은 돈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브랜드 의상은 모두 쳐 냈다.
다시 의상 준비에 들어간 보라는 이번에는 협찬보다는 주로 발품을 팔아서 의상을 준비했다.
“이게 초반 메인 의상이에요.”
“응.”
버건디 색상의 트레이닝복.
짝퉁 브랜드에 어딘가 낡은 느낌이 들었다.
“이거 사고 제가 일부러 해지게 만들었어요. 그런 느낌 원하신대서요.”
“잘했어.”
“운동화도 짭이에요.”
“응.”
의상을 확인하며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닝복은 여러 색으로 준비했어요. 버건디, 블랙, 그레이…… 총 다섯 벌이에요.”
유수한은 의상을 확인한다.
이번에는 다양한 의상이 필요 없었다. 역할에 맞춰서 단출한 의상이 주였다. 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다.
서윤한은 날것의 느낌이 있었으면 했지만 처음 보라가 준비한 것은 날것이라기보다는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더 추레하게 준비해 달라 부탁했는데, 유수한의 생각대로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 왔다.
“일단 하나 입어 보세요.”
유수한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왔다.
A사 브랜드를 따라 한 짝퉁이라 두 줄이 아니라 한 줄이었다. 로고 역시도 A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E로 시작한다.
“내가 말했잖아요.”
의상을 확인하며 보라가 말했다.
“오빠가 입으면 그냥 짭이 아니라 진퉁 같다니까.”
아무리 낡은 의상을 입혀도 티가 안 난다.
잘생긴 얼굴에 탄탄한 피지컬 탓에 어떤 옷을 입어도 빛이 났다.
“아무튼 잘 어울리기는 하네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을 보았다.
해져 가는 의상은 궁핍한 서윤한을 만들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단칸방에서 사는 서윤한은 언제나 의문이다.
조국이 준 이 낡은 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대체 지령은 언제 오는가.
나를 잊은 건 아닐까.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잡초를 뜯어 먹어 가며 질기게 살아남았는데, 왜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가.
“신고 번호 111.”
이인태가 구석에 숨어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
“히익, 최대 포상금이 2, 20억?”
그리고.
그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왔다. 놀란 듯 고개를 드는 이인태.
“헛짓거리하면.”
서윤한은 손에 날카로운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목 날아간다고 했을 텐데.”
어느새 이인태의 목에 칼이 닿았다.
“너, 어, 언제 왔…….”
이인태의 손이 덜덜 떨린다. 서윤한이 간첩이라는 걸 알고 호시탐탐 신고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인태가 서윤한을 스토킹했다. 지금은 서윤한이 이인태를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있었다.
이인태는 혼자 살고 있었다. 아내와 딸이 미국에 있는 전형적인 기러기 아빠였다. 그렇기에 서윤한이 그를 감시하기 딱 좋았다.
“아니, 나는 그냥…….”
더듬더듬, 이인태가 변명한다.
서윤한은 말없이 이인태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빼앗았다. 화면에 떠오르는 선명한 문구.
“간첩 신고?”
그의 눈초리에 이인태는 말없이 눈을 내리깐다.
할 말이 없었다. 간첩이라더니 매일 칼을 들고 다니질 않나, 갑자기 훈련하다가 머리에 총을 겨누질 않나.
미친놈이었다.
“내일부터는 단체 훈련 할 거야.”
이인태가 서윤한과 눈도 못 마주치며 말했다.
“나도 내 생명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
두 손으로 핸드폰을 돌려받는 이인태.
“네가 이렇게 틈만 나면 칼 들이대는데,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초라하면서도 할 말을 하는 그 모습은 이인태의 캐릭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컷!”
촬영은 순조롭다.
분위기도 좋았다. 이인태 역할을 맡은 정동인의 익살스러운 연기는 자칫 잘못하면 가라앉을 수 있는 상황을 유하게 만든다.
“자, 서윤한 먼저 타이트 샷 갈게요.”
유수한은 다시 나이프를 든다.
“헛짓거리하면.”
대사를 치고 이인태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다시 서윤한이 된 유수한의 눈에는 감정이 없었다. 칼을 들이대는 그 눈빛이 서늘하다.
“목 날아간다고 했을 텐데.”
점차 유수한은 서윤한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인태 역할을 맡은 정동인과의 호흡도 좋아지고 있다. 영화 초반부는 서로를 물고 뜯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즉, 서로를 향한 치열한 눈치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