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내가 들어갈게요, 어장에
술에 취한 강인한은 전봇대에 기대앉아 있다.
취했으면 그만 마셔야 정상인데, 강인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윤수 몫으로 남겨 둔 맥주를 모조리 마신 강인한은 말 그대로 또 개가 됐다.
「팀장님. 제발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강인한은 흐릿한 눈으로 이윤수를 보았다.
「저 더 이상 강 팀장님 어장에 갇혀 있지 않을 거예요.」
이윤수는 여전히 강 팀장이 좋다.
가끔 모난 구석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좋다. 절대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과 유머 코드도 잘 맞았다.
실없는 말을 주고받고 가끔은 도움도 받았다.
강인한은 아주 느리게 이윤수의 마음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깐깐한 직장 상사, 지금은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였다.
「저 이진석 씨와 잘해 볼 거라고요. 네? 듣고 있어요?」
쪼그려 앉은 채 큰 목소리로 들으라는 듯 외친다.
이윤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강인한이 ‘이진석’이라는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 풀린 눈으로 이윤수를 응시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어쩔 건데요!」
화가 난 이윤수가 소리쳤다.
「팀장님 되게 나빠요. 저는 여자로 안 보인다면서요! 근데 손은 왜 잡아요? 내 새끼손가락 되게 귀한 애거든요?」
이윤수가 새끼손가락으로 강인한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왜 잡냐고요. 왜!」
강인한이 말없이 이윤수를 본다.
「팀장님은-」
그리고.
이윤수의 목소리가 멎었다. 전봇대에 기대 있던 강인한이 갑자기 다가오며 이윤수의 입술을 훔친 탓이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윤수의 눈이 커진다.
치켜들었던 새끼손가락에 힘이 스르륵 풀리고 있었다.
- 헉!
- 헐!!!!! 얘들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키스에 반응이 한 박자 느리게 밀려왔다.
이 장면은 각색이 들어갔다.
웹툰에서는 키스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가는 6회쯤에는 임팩트를 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술기운을 빌려 충동적으로 키스하게끔 만들었다.
- 와, 강인한 요거 완전 폭스네
└ 222222
└└ 333 여자 맘을 들었다 놨다 하네
└└└ 4444 강폭스....
반응은 좋다.
시즌1에서는 로맨스가 진행될 기미가 없었고 이어진 시즌2에서도 아직 제대로 된 진도를 빼지 못했던 강윤 커플이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이루어진 키스신은 사람들을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 키스는 좋은데 술 취해서 기억 못한다고 할까 봐 불안쓰...
└ 이러면 강폭스고 뭐고 요단강 건너는 거지
└└ 강인한 생각하면 충분히 쌉가;;;
└└└ 이러면 윤수 또 속 터진다고 ㅠㅠㅠㅠㅠ
└└└└ 안 되는데.. 이럴 것 같다는.... 불안감...
사람들이 전개를 예상했다.
아무래도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 다음 내용을 유추하기는 쉬웠다.
「지, 지금 뭐, 뭐 한 거예요?」
당황한 이윤수가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묻는다.
강인한은 말없이 이윤수를 응시했다. 머리는 어지럽고 눈앞은 흐릿하다. 심장은 매섭게 뛰고 있었다.
「안 됩니다.」
「네?」
「이진석은 안 된다고.」
그 목소리와 함께 강인한이 이윤수 품에 쓰러졌다.
“이제 또 사람들 고구마 먹겠구먼.”
유수한은 물을 마시며 화면을 보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강인한은 답답한 캐릭터였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강인한은 모태솔로는 물론 결혼도 못 했을 것이다.
“얼굴이 나니까.”
이런 로맨스도 가능한 거였다.
「아.」
다음 날.
강인한은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다. 불안한 눈으로 허공을 보던 강인한이 고개를 돌린다. 옆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숨을 내뱉은 강인한이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프다. 어제 마셨던 술이 여전히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군데군데, 기억은 끊겨 있지만.
[지, 지금 뭐, 뭐 한 거예요?]
안타깝게도 키스를 했던 그 순간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미쳤구나…….」
마른세수를 한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강인한이 방을 둘러보았다.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깔끔함, 이윤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팀장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출근하셔야죠.」
이윤수는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문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어떤 눈으로 강 팀장을 마주할지 생각하고 고민하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떨림을 감추었다.
「어제 어떻게 된 겁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
「기억, 안 나세요?」
그리고.
이윤수에게 불안감이 슬며시 찾아오고 있었다.
강인한은 침대에서 내려오며 이윤수를 바라본다. 짧게 고민했다.
「기억 안 납니다.」
아직 강인한은 이윤수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다.
사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강인한은 사랑에 늘 주저한다.
이지애와의 연애를 끝낸 후에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았던 강인한이었다.
그런데 닫힌 그의 마음을 이윤수가 끝없이 두드렸다.
언젠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이윤수 씨……?」
하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늘 씩씩하던 이윤수였기에 더더욱.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울지 않았고 되레 밝게 웃으며 괜찮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원망스럽게 강인한을 보는 이윤수.
강인한은 그 모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윤수는 그런 강인한을 쳐다보다가 뒤돌아섰다. 슥슥, 눈물을 닦는다.
「비겁해.」
뒤돌아선 채로 이윤수가 말했다.
「사람 마음을 갖고 놀아도 유분수지…….」
물기 어린 목소리.
그대로 방에서 나가 버린 이윤수는 강인한의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휘익, 시위하듯 가방을 집어 던진다.
「나가세요. 당장.」
- 누가 강폭스랬냐? 이름 바꿔라 쓰레기로. 강쓰레기.
- 와, 킹받네? 강 팀장 이건 아니지 않냐?
- 단순히 필름 끊긴 것도 유죄인데 기억 나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 뭐냐?
└ 무기징역
└└ 사형
└└└ 능지처참
- 난 안 되겠다. 윤수야, 갈아타. 용서할게.
└ 22 강인한 킹받아서 안 되겠음;
└└ 333333
- 뭘 갈아타래 ㅋㅋㅋㅋ 섭빠 또 나대네
└ 2222
└└ 3333333 남주는 강인한이고요?
└└└ 아니 왜 눈치 줌? 섭빠든 아니든 불판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님?
└└└└ 그니까;; 왜 눈치 줘? 너 뭐... 돼..?
좋았던 분위기가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활활 불탄다.
유수한은 귀가 가려운 느낌이었다. 물론 욕먹을 만했다. 기억이 안 나는 거라면 모를까, 기억이 나면서 모른 체하는 건 문제가 있었다.
그게 강인한이라서.
주인공이라서 그나마 덜 욕을 먹고 있는 거였다.
- 우리 윤수 왜 울리냐 이 나쁜 놈아!!!
- 윤수 맴찢 키스하고 잠도 못 자고 오늘부터 1일인가 이러고 있었는데 ㅠㅠㅠㅠㅠ
└ 그니까 ㅠㅠㅠ 이제 남친인 줄 알고 집에도 데려왔는데 ㅠㅠㅠㅠ
└└ 소파에서 오늘부터 1일? 이러고 있는 거 커여웠는데.... 망할 놈... ㅠㅠㅠㅠ
└└└ 우리 윤수 마음은 누가 달래주냐 진짜 ㅜㅜㅜㅜㅜㅜ
- 키스 도둑은 형량이 어떻게 되나요?
└ 무기징역
└└ 사형 미만잡
└└└ 최소 사형 ㅇㅈ
└└└└ 앜ㅋㅋㅋㅋㅋㅋㅋ 키슼ㅋㅋㅋ도둑ㅋㅋㅋㅋㅋㅋ
중간 광고 시간.
여전히 강인한은 욕을 트럭으로 먹고 있다.
- 키스 도둑 ㅋㅋㅋㅋㅋ 님 괜찮으신?
이 와중에 이윤수, 아니 주민하가 메시지를 보냈다.
키스 도둑, 강인한에게 새로 생긴 별명이었다. 유수한은 답장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윤수 씨.」
그나마 오늘 진도가 풀리는 날이라는 거지.
「이윤수 씨.」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 않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윤수는 강인한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이윤수는 같은 얼굴로 강인한을 대했다.
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졸라 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윤수는 회사에서도 강인한을 최대한 피했고 마주친다 해도 일적으로 대했다.
「내 말 안 들립니까?」
강인한이 이윤수 앞을 막았다.
「어제는 내가 미안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본데, 미안해요.」
「무슨 실수요?」
「…….」
「저한테 키스한 거요? 이진석 씨 만나지 말라고 한 거요? 아니면 제 손가락 잡은 거요? 뭐요? 무슨 실수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서요.」
따발총처럼 이윤수가 말을 내뱉는다.
강인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윤수는 그런 강인한의 표정을 읽었다.
「기억 안 나는 거 아니었나 봐요?」
이윤수가 고개를 돌린다.
또 울컥해서 눈물이 차오를 기세였다. 주변에 사람은 없지만, 눈물이 나오는 건 막아야 했다. 회사에서 우는 순간, 사내에 어떤 소문이 퍼질지 모르니까.
「더 최악이다.」
회피형 인간 강인한은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그 누구에게도 상담할 사람이 없었고 혼자 생각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윤수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는 일 역시도 쉽지 않았다.
만약 예전처럼 사랑을 하다가 헤어진다면 그 여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으니 더더욱.
[인한아. 말하지 않으면 몰라.]
사무실 책상에 앉은 강인한은 이지애와의 지난 대화를 꺼내고 있었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알겠어.]
눈을 감는다.
이지애는 늘 강인한을 궁금해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오늘은 뭐 했는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궁금해했다.
하지만 강인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물어보면 대답하지만, 어떨 때는 대답조차 회피할 때가 많았다.
[답답해. 너와 있으면 사람이 아니라 벽이랑 대화하는 것 같아.]
눈을 뜬다.
여전히 갑갑하다. 강인한이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도 타당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미 이윤수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음 역시도 알 것 같았다. 강인한은 이윤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을 하며 두려워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
책상에서 일어난 강인한이 재킷을 입는다.
멍하니 책상을 정리하던 강인한은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았다. 오늘은 그에게 우산이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이진석……?」
이진석과 함께 걸어가는 이윤수가 보였다.
우산 하나, 두 사람은 우산 하나에 의지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강인한의 머리에 스파크가 튀었다.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차가운 비가 머리 위에 떨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빗물 덕분에 멍하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강인한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대체 뭘 위해서 망설였냐고.
「이윤수 씨!」
비에 젖은 강인한이 소리친다.
처음으로 강인한은 자신의 마음과 마주했다. 두렵다고 숨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피하지 않았다.
「팀장님……?」
놀란 이윤수가 강인한을 쳐다보았다. 이진석은 또 방해하러 온 강인한 팀장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해 보려고 하면 강인한이 나타난다.
다행히 두 사람이 어긋난 것 같아서 그 틈을 노린 지금 이 순간에도 강인한은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다.
마치 진드기처럼.
「좋아합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요.」
이윤수에게 다가간 강인한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가 답답한 거 알아요. 내가 표현에 서툰 것도 알아요. 그래서 이윤수 씨 마음을 쉽게 받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게 될까 봐…….」
심장이 뛴다.
어느새 이윤수 앞에 다가간 강인한이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작게 숨을 내뱉는다.
「상처 줘서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울려서 미안해요…….」
이윤수는 비에 젖은 강인한을 보고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이런 모습에 또 마음이 흔들린다. 화가 나고 짜증도 나는데, 왜 강인한이 만든 어장에서 쉽게 나갈 수 없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들어갈게요.」
강인한이 이윤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윤수 씨 어장 내가 들어가게 해 줘요.」
그 말에 이윤수가 미간을 좁힌다.
「설마 어장 이야기도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네.」
「내 어장에 들어오면 힘들지도 몰라요.」
「괜찮습니다.」
「저 팀장님 싫어요.」
그 말에 강인한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까 잘해 보세요.」
내 어장은 녹록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