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간첩도 사람이야
요즘 가끔 허전함을 느낀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보는데 아무런 알림이 뜨지 않을 때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에 [체인지 라이프] 출석 알림이 떴다.
1 포인트를 적립하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이제 그럴 일이 없었다. 물론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체인지 라이프]의 궁극적인 목표는 본품 구매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고, 그 과정에서 [체인지 라이프]의 도움을 받았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아이템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기에 머리에는 본품 구매를 미루고 아이템을 더 사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찾아왔다.
결론은 더 이상 아이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이 나왔다.
만약 본품 구매를 미루고 S급 아이템을 하나 더 산다면 당연히 [눈물 연기의 달인(S)]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배우로서의 성장은 멈춘 채 아이템에 의지하여 연기하는 배우가 될게 분명했다. 물론 지금도 유수한은 아이템의 도움을 받고 있다.
[듣기 좋은 목소리(S)]를 통해 발성을 잡았고 [액션 연기의 달인(S)]을 통해 모든 운동을 포함한 액션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언어 능력의 달인(S)]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했던 유수한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지금까지 유수한이 아이템을 구입했던 이유는 단기간에 성장하기 어려운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배우로서 감정 연기까지 아이템에게 기댄다?
그건 역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다른 아이템이 더 필요한지 생각해 보면, 더 필요하지 않았다.
좋은 대본을 고를 수 있는 [작품 보는 눈(S)]까지 있는 지금 유수한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배우로서 성공할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금 유수한은 청담동 카페에 와 있었다.
스케줄이 있는 건 아니었고, 영화 관련 일이 있었다. 지금 유수한의 눈에는 이번에 같이 호흡을 맞출 배우가 보였다.
“어, 소문대로 훤칠하네?”
여자였으면 좋겠지만.
“정동인이라고 한다.”
남자였다.
그것도 나이가 지긋한.
“유수한입니다.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동인은 이번에 함께 호흡을 맞출 주연 배우와의 만남을 원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유수한이었지만, 그를 보조하며 투톱 양상으로 들어갈 사람이 정동인이었다. 정동인이 맡은 역할은 국가대표로서는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코치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남자 ‘이인태’였다.
“뭐 마실래?”
“아, 제가 사 오겠습니다. 선배님, 뭐 드시겠습니까?”
“그렇게 예의 안 차려도 돼. 앞으로 촬영장에서 징그럽게 볼 사인데.”
정동인은 호탕했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 종종 얼굴을 보고 영화판에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을 자주 한다.
가끔은 주연으로도 얼굴을 비추는 배우였는데, 영화에서 보는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는 다른 듯 같았다.
“나는 바닐라라테하고 마카롱 맛있어 보이더라. 종류별로 부탁해.”
정동인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유수한은 망설이다가 이내 그 카드를 받는다. 후배 입장에서 선배가 사겠다는 걸 만류하는 건 쉽지 않았다.
“네, 얼른 사 오겠습니다.”
“천천히 해. 시간 많아.”
“넵.”
유수한은 가볍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른 디저트는 입에 대지 않는다. 요즘 유수한은 다시 다이어트 중이었다. ‘식사남녀’를 찍으며 또다시 행복하게 음식을 먹었다.
삼계탕을 든든히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유수한은 새로운 스케줄 영화를 위해서 몸을 만들고 있었다. 탈북자라는 설정이었기에 더 탄탄한 몸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헬스 트레이너와 깊은 대화를 통해 방향을 잡았고 요즘은 식단을 더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내가 만나자고 해서 놀랐지?”
후룩.
정동인은 마치 숭늉을 먹는 사람처럼 커피를 마시며 유수한을 보았다. 치켜뜬 두 눈에 유수한이 미소를 짓는다.
“아니요. 저도 지금 작품 하나 끝내고 몸 만드는 중이라 심심했던 참입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유수한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시나리오부터 보았다.
읽고 또 읽는다. 유수한은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사격하는 장면이라든가 몸을 쓰는 장면은 [액션 연기의 달인(S)]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정은 쉽지 않았다.
유수한이라는 사람이 ‘서윤한’이 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반복해서 읽는다. 두 번째는 노트에 생각을 정리한다.
그다음은 아예 대사를 달달 외웠다. 그 작업이 끝이 아니었다. 대사를 외운 후에는 역할에 맞추어 톤을 조절하고 그 후에는 애드리브를 생각한다.
물론 애드리브 같은 경우는, 서윤한이 북한에서 넘어온 남자라 최소한으로 덜어 냈다.
“하긴, 내가 얼굴이 이래서 몸 관리를 해 본 역사가 없어.”
“네?”
“너같이 생겨야 몸 관리하고 그러지. 나 같이 생겨서는 몸 관리해 봤자 거기서 거기야. 티도 안 난다고.”
낄낄.
자학 개그를 하며 웃는 정동인을 따라 유수한은 웃어야 할지 가만있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가끔 그런 애들 있어.”
유수한은 공손한 자세로 정동인의 말을 들었다.
“선배가 부르면 싫어하는 애들. 나는 작품 시작할 때, 내가 주연일 경우에는 꼭 함께 호흡하는 애들 호출하거든.”
“네.”
“그때, 답이 나와.”
정동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일이 있다고 둘러대며 거절하는 경우도 몇 있고. 알겠다고 하고 나오긴 했는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치만 이리저리 보는 애들도 있고. 어떤 애들은 거만하지. 매니저를 대동하고 오는 애도 있어. 물론 괜찮은 애도 있다. 연기에 욕심 있는 후배도 많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으니까.
드라마만 봐도, 회당 출연료로 1억을 가져가는 배우가 생길 정도로 몸값이 올랐다. 그 상황에서 촬영장에서는 자신의 차례에만 나와 연기를 하고 차로 돌아가는 배우가 많아졌다.
차에 갇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나오는 젊은 배우들. 함께 협업하며 작품을 만들어 가는 분위기가 아니라 개개인의 일로 여기게 돼 버린 요즘이다.
“너는 어떤 스타일이냐?”
정동인은 돌직구를 날린다.
우선 지금까지는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약속을 잡았을 때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고 약속 장소에 매니저를 대동하지도 않았다.
“저는…….”
유수한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며 말했다.
“이런 스타일인데요.”
오늘 유수한은 정동인과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가끔 이정환이나 조이수를 만나 배우로서 연기를 논할 때가 있지만,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 두 사람과의 인연은 영화 특별출연이 계기였다.
함께 작품을 한다면 그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예능 멤버라서 느낌이 다르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늘 듣고 싶었다.
그것도 이 바닥에 오랫동안 질기게 붙어 있던 선배의 이야기를.
“선배님과 함께하는 장면이 많아서 리딩 전에 호흡 맞추고 싶었거든요.”
그 말에 정동인이 껄껄 웃었다.
마음에 든다는 투로 숭늉처럼 커피를 마신 정동인이 너덜너덜해진 유수한의 대본을 보았다. 배우의 연기 스타일은 대본에 닿아 있다.
어떤 배우는 대본을 한 번 읽고 치운다. 그렇게 머리로 끝없이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배우는 대본이 걸레가 되도록 읽으며 분석한다.
유수한은 그 후자였다.
“여기서는 안 돼.”
“네?”
“여기 사방이 뚫려 있는데, 사람들 오가며 다 들어.”
“아, 그렇죠…….”
“여기서는 대본 집어넣고 가볍게 대화하자.”
“네.”
유수한이 잽싸게 대본을 도로 집어넣었다.
정동인은 마카롱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동인이 맡은 역할 ‘이인태’를 짧게 생각한다.
“자네, 사격해 볼 생각 없나?”
대본에 나와 있는 대사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같았다.
유수한은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정동인을 바라보았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서윤한은 어땠을까.
“일 없습니다.”
그 감정에 대해서 부단히 생각했다.
어이가 없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려고 시작한 사격, 그리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시작했던 사격이었다.
그 사격을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서 권유받게 되었다. 누굴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 총을 겨누라는 것도 아니었다.
짧게 유수한의 연기를 확인한 정동인이 입을 열었다.
“힘 빼라.”
“네?”
“너 지금 ‘일 없습니다’ 이 짧은 대사에 생각 엄청 퍼부었지?”
“아, 네.”
“첫 만남이야. 그것도 영화 초반부.”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객 입장에서는 시작이나 다름없다고. 그 상태에서 힘 딱 주고 그러면 이상하잖아.”
“네.”
“현실이라고 생각해 봐. 네가 서윤한이고. 지나가던 어떤 남자가 갑자기 사격해 볼 생각 있냐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걔가 뭘 생각하겠어?”
“…….”
유수한이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동인이 말을 이었다.
“미친놈이네, 하겠지.”
* * *
생각을 덜어 낸다.
유수한이 연기를 시작하면서 고질적으로 붙는 충고였다. 대본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다 보니, 자꾸 연기에 힘이 들어간다.
‘식사남녀’같은 경우는 로맨스에 음식이 주인 드라마여서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덜했다. 하지만 간첩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니, 작은 것에도 힘이 빡 들어간다.
[간첩이고 뭐고, 서윤한도 그냥 사람이야. 사람.]
유수한은 정동인의 충고를 마음에 담았다.
[북한 사람이라고 해서 선입견을 갖지 마. 결국엔 걔도 사람이고 젊은 애야.]
정동인과의 만남은 좋았다. 연기에 대해서 폭넓게 질문할 수 있었고 서윤한이라는 인물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탁.
영화 시나리오를 덮는다.
[온에어/불판] 강 팀장의 삽질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6회 같이 달릴래? +59
잠시 영화 생각을 뒤로 미루고.
유수한은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직전, 마지막을 장식한 광고는.
「남자의 완성은.」
유수한이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화장품 브랜드 ‘제우스’였다.
「향기다.」
이번 ‘제우스’에서는 사업 확장을 했고 신제품으로 향수를 밀고 있었다.
번화가, 유수한이 걸음을 옮긴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유수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좋은 향기는 기억에 남는다.」
유수한에게 홀린 듯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이고.
「향기로 존재감을 각인하라.」
향수와 함께 성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우스.」
광고가 끝났다.
이번 ‘제우스’와는 계약 연장에 성공했고, 그 덕분에 강인한이 쓰는 향수도 제우스였다. 극에 튀지 않게 향수가 나온다.
강인한이 출근 전에 향수를 뿌리는 장면이라 자연스럽게 제품을 녹여 낼 수 있었다.
- 유수한 향수 남친 사줄까? 좋아 보여
└ 아, 남친이 있으시다?
└└ 폰남친 아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폰남친 ㅋㅋㅋㅋ
└└└└ 근데 유수한이 쓰니까 향수 좋아 보이긴 함... 냄새도 좋다던데?
제우스에서 나오는 향수는 요즘 유수한 향수로 불린다. 계속 작품을 하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매출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유수한은 자세를 고쳐 잡고 화면을 응시했다.
「왜 사람 갖고 놀아요?」
이윤수의 화가 난 목소리를 시작으로 ‘식사남녀’ 6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