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97화 (97/175)

97. 새로운 시작

유수한은 경건한 마음으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마지막 1 포인트는 자정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채울 수 있었다. 유수한은 소파에 앉아 [체인지 라이프] 앱에 접속했다.

[본품 구매]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유수한이 되어 살았던 지난한 일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배우로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 모든 날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1,000 포인트를 사용하며 <유수한> 본품을 구매하시겠습니까?]

[YES][NO]

심장이 기분 좋게 뛴다.

손가락이 이윽고 [YES]에 닿았다. 늘 이 순간을 그리며 살아왔다. 어떻게 해야 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했고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 결과물을 이제 마주한다.

[체인지 라이프] 김대한 님, 축하합니다.

[체인지 라이프] <유수한> 본품 구매 완료되었습니다.

[체인지 라이프] 3초 후 <체인지 라이프> 앱이 자동 삭제됩니다.

이윽고, [체인지 라이프] 마지막 알림이 울렸다.

[체인지 라이프] 그동안 <체인지 라이프>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아침이 왔다.

본품 구매에 성공했지만,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저 핸드폰에 있던 [체인지 라이프] 앱이 사라진 정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제 본품 구매를 한 후에 유수한은 말없이 거실에서 백덤블링을 했다.

[액션 연기의 달인(S)]이 없는 유수한은 운동 신경이 거의 없다.

[체인지 라이프]를 통해 얻었던 아이템의 효과가 계속 남아 있다면 백덤블링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휘이익, 턱.

다행이었다.

유수한은 한 바퀴를 가볍게 돌고 가뿐히 착지할 수 있었다.

[언어 능력의 달인(S)]도 그 능력이 여전히 살아 있었고 [작품 보는 눈(S)]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구입하지 못한 다른 아이템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미련을 버렸다.

셋방살이보다는 자가가 더 나으니까.

적어도 본품을 구매한 지금은 포인트가 없어서 쫓겨날 위기가 없었다.

“왜 아쉬울까.”

[체인지 라이프] 앱이 사라진 게 이상하게 아쉽다.

가끔 욕하기는 했지만, [체인지 라이프]는 유수한에게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일반 사람이 얻을 수 없는 좋은 능력을 준 건 물론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기에.

핸드폰에 자리 잡았던 [체인지 라이프]가 사라진 건 역시 아쉬움이 마음에 남았다.

“안녕하세요.”

그래도 아쉬움보다는 속이 시원하다.

유수한은 이제야 비로소 진짜 유수한이 되어 촬영장에 출근했다. 드라마 ‘식사남녀’의 촬영은 막바지 단계였고 편집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 사실 강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곳이에요.”

유수한은 조용히 이 감독 뒤에 선다.

앞선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지금 유수한은 시즌1 1회에 나왔던 떡볶이집에 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진행하고 있는 촬영을 지켜보았다.

“아, 그럼 여기 강 팀장님과 같이 왔겠네요?”

“그렇죠. 사실 우연히 마주쳤어요. 여기 숨겨진 맛집이거든요.”

이윤수는 강인한과 추억이 담긴 분식집에 이진석을 데리고 왔다.

이윤수는 묘하게 이진석과 얽히고 있었다. 바로 앞집에 사는 것 외에도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우연.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진석이 만들어 낸 우연. 이진석은 이윤수에게 관심이 있었고, 다가가기 위해 거짓된 우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유수한은 마치 강인한이 된 것처럼 촬영을 지켜보았다.

강인한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이진석은 요즘 강인한에게 눈엣가시였다. 틈만 나면 이윤수와 함께 있으려 했고,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끔 짜증이 치밀었다.

“자, 강인한 준비하세요.”

유수한은 촬영할 준비를 마쳤다.

손에는 검은 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이윤수가 좋아하는 맥주가 있다. 카운트를 세는 목소리가 들리고.

“지금!”

그 신호에 유수한이 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무미건조한 강인한이 된 유수한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툭.

봉지에서 맥주 캔을 꺼낸 강인한은 테이블에 맥주를 내려놓으며 이윤수를 보았다.

“지금 상사에게 맥주 심부름 시킨 겁니까?”

“예?”

“네 캔에 만천 원입니다.”

“아니, 말은 바로 하셔야죠. 팀장님이 오신다고 한 거잖아요. 굳이 맥주 사다 주겠다고!”

그렇다.

강인한은 이진석과 약속이 있다는 이윤수의 말에 눈이 뒤집혔다.

아직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이 단둘이 만나는 건 죽어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사 왔잖습니까.”

스윽.

맥주 캔을 이윤수에게 밀어 준 강인한이 굽힌 허리를 편다.

눈으로 빈자리를 훑던 강인한은 망설임 없이 이윤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진석의 눈썹이 불쾌한 듯 위로 올라간다.

“윤수 씨, 제가 맥주 따 드릴게요.”

툭.

이진석 손을 차갑게 쳐 낸 강인한이 이윤수 손에 들린 맥주를 빼앗았다. 치익, 무심하게 맥주 캔을 딴 강인한이 이윤수를 보지도 않고 맥주를 건네주었다.

“참 나. 평소 안 하던 짓을 계속 하시네.”

이윤수는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계속 좋아하는 감정을 갖고 직진했던 남자가 요즘 따라 달라졌다. 예전에는 무미건조한 눈빛에 귀찮다는 투로 밀어냈는데, 지금은 달랐다.

뭔가, 나를 신경 쓰는 기분이었다.

계속 이윤수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하던 사람이 요즘은 이윤수를 여자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진석 씨도 맥주 좋아한대요.”

그 말에 강인한이 미간을 좁힌다.

유수한은 분식집으로 이동하기 전에 편의점에서 짧게 촬영을 진행하고 왔다.

강인한은 이윤수가 좋아하는 맥주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류별로 담았는데, 사실은 네 캔에 만천 원이 아니었다.

네 캔에 만천 원 상품은 종류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윤수가 좋아하는 걸 골라 담다 보니, 만천 원에 맞춰 구입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미 강 팀장에게는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거 한 캔 드세요. 여기 떡볶이가 맛이 기가 막혀서 맥주랑 찰떡궁합이에요.”

강인한은 봉지에서 맥주를 꺼내는 이윤수를 보았다.

“나는 안 줍니까?”

평소 강인한은 술을 먹지 않는다.

그걸 이윤수도 알고 있고 술에 약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윤수는 맥주를 든 채로 강인한을 보았다.

물끄러미.

그를 보는 시선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그러셨잖아요.”

요즘 이윤수는 어장에 갇힌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강인한이라는 어장에 갇힌 물고기. 강인한은 이윤수를 밀어내다가도 이렇게 같잖은 질투를 보이고 있었다.

근데 그 같잖은 질투에 웃는 자신이 싫다.

그 관심이 좋아서 설레는 자신이 너무 싫은 이윤수였다. 그래서 요즘은 그 어장에 탈출하려 했는데, 이 남자는 끝까지 떡밥을 먹이며 이윤수가 자신의 어장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맥주가 떡볶이 맛을 해친다면서요?”

“그땐 그때고.”

강인한은 이윤수 손에 들린 맥주를 가져가며 말했다.

“지금은 다릅니다.”

치익.

맥주 캔을 딴 강인한이 앞에 앉은 이진석을 견제했다.

“술도 못하는 사람이 진짜 이상하다니까.”

뒤적뒤적.

이윤수는 맥주를 다시 꺼내 이진석에게 한 캔을 나눠 주었다. 이진석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을 강인한이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이윤수를 본다.

떡볶이를 먹다가도 이진석을 보며 웃는 이윤수를 가만 바라보았다.

‘왜 기분이 나쁘지?’

맥주를 마셨다.

요즘 그는 자신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윤수는 그저 회사에서 만난 직원일 뿐이었다.

어쩌다가 맛집에서 엮여서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수준인, 동료에 가까웠다.

그러나 요즘은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그 시작은 이진석이었다. 이진석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있었다.

“팀장님.”

강인한은 떡볶이는 손도 안 대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또 개 돼요.”

“개?”

“네, 팀장님 술 드시면 개 되잖아요.”

꿀꺽.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은 강인한은 숨을 크게 내뱉었다. 여전히 머리는 복잡하다.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개 되면 이윤수 씨가 책임질 거 아닙니까?”

“제가 왜요?”

“지금까지 내가 개가 되면 책임져 줬잖습니까.”

“그땐 그때고요. 지금은 제가 술 먹으라고 한 적 없는데요?”

“술 사 오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

“그게 그렇게 돼요?”

강인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취기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금 맥주를 마셨다. 어느새 한 캔을 다 비운 강인한은 빈 캔을 힘주어 찌그러뜨렸다.

“책임져.”

그대로 스르륵 테이블에 쓰러진 강인한이 이윤수를 보았다.

테이블에 얼굴을 기댄 그의 눈에는 어느새 이윤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게 하던 이진석은 이제 아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그쪽이.”

날.

“책임져.”

술은 가끔 사람의 마음을 솔직하게 만든다.

모두 핑계였다고. 맥주를 굳이 사 온 건 이진석과 함께 있는 모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술을 마신 것도 질투에 속이 상해서 마신 거라고.

술에 약하면서 안주도 없이 벌컥벌컥 한 캔을 모두 다 마신 이유도 다 같은 맥락이라고.

“내가 왜 팀장님을 책임져요……?”

이윤수는 스르륵 눈을 감은 강인한을 보다 허탈한 듯 숨을 내뱉는다.

고개를 돌려 맥주를 마시던 이윤수의 눈이 커진다.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본다. 어느새 강인한 팀장의 손이 닿아 있었다.

이윤수 새끼손가락에 닿은 강인한의 손가락.

그 순간, 이윤수는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맥주 캔이 굴러간다. 캔이 굴러가면서 맥주가 터져 질질 흐르고 있었다.

“윤수 씨, 괜찮-”

냅킨을 들고 일어난 이진석이 멈칫했다.

이윤수의 표정, 멍하니 강인한을 보는 그 두 눈에는 이진석 따위는 없다. 마치 불청객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이 공간의 불청객은 분명 강인한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였구나.”

불청객은.

* * *

[HOT] 새롭게 집착광공으로 떠오른 강인한 팀장 츄라이츄라이~ +312

tnV ‘식사남녀’ 시즌2는 본격적인 로맨스를 진행하며 첫 주부터 성적표가 좋았다.

방송 전부터 홍보에 박차를 가했었다.

3차까지 티저를 공개하는 건 물론이고 간간이 스틸 컷을 뿌리며 관심을 모았고 더불어 주민하는 예능까지 출연하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 질투하는 강 팀장 졸귀 ㅋㅋㅋㅋㅋ

- 헉헉헉헉 강 팀장님 개 되면 내가 책임질게 나 줘 헉헉

└ 님 도르신?

└└ 쟤 좀 누가 잡아가라

- 강인한 댕청하지 않냐? 지금 썸 타고 있는 건데 혼자만 썸인지 몰라 ㅋ

└ 개댕청 이윤수가 좋다고 좋다고 직진했는데 그걸 혼자 모름;;

└└ 3333333 개 댕청함

└└└ 4444 썸이 뭔지도 모를 듯

└└└└ 이해해 주자; 연애 딱 한 번밖에 못해 봐서 저래;;

지금 ‘식사남녀’ 시즌2는 5회까지 방영했다.

차정준이 맡은 이진석의 등장은 3회였다. 그 전에 이윤수는 수줍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고, 그 마음을 거절한 강인한이었다.

4회에서 강인한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도 강인한이 받아 줄 생각을 하지 않자 이윤수가 조금씩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 강인한 답답한데 또 그게 너무 재밌어 ㅋㅋㅋㅋㅋ 혼자 삽질하는 거 너무 좋음

└ 22 이미 결론 다 나왔는데 지만 모름 ㅇㅇ 근데 그게 재밌는 게 함정

└└ 3333 혼자 삽질하고 질투하고 상처받고;;; 이윤수는 고백도 거절당했는데 환장

└└└ 444 ㅇㅈ 그냥 이윤수 좋아하는 거 인정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 ㅋ

강인한은 분명 답답한 구석이 있다.

이윤수의 마음을 강인한은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알고도 장난치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랑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강인한은 이윤수를 향한 마음을 모른다.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윤수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다.

지금은.

아주 느리게 자각하고 있었다.

- 난 정유환이 제일 답답할 줄 알았거든? 근데 걘 양반이더라

└ ㅋㅋㅋㅋㅋㅋ 추억의 정유환이네 ㅋㅋㅋㅋㅋㅋ

└└ ㅇㅈ ㅋㅋㅋㅋㅋㅋㅋㅋ

└└└ 유수한이 좀 이런 역할 특화된 건가? 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듣는 정고자 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듣는 이름, 정유환까지 소환된다.

드라마 분위기는 좋았다. 시즌1부터 켜켜이 쌓인 감정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몰랐다.

감정은 쌓일 대로 쌓였고 모든 사람들이 이 쌓인 감정이 터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 내일 빨리 와라 ㅠㅠㅠㅠ 비씬 넘나 궁금 ㅠㅠㅠ

└ ㅇㅈㅇㅈ 궁금한데 웹툰도 이 꽉 깨물고 참고 있음 ㅇㅇㅇㅇㅇㅇ

└└ 강인한 비 맞고 어딜 가냐고 ㅠㅠㅠㅠ

└└└ 예고편 낚시면 이강은 피디 찾아간다

└└└└ ㅋㅋㅋㅋㅋㅋ 찾아가서 뭐 하게 ㅋㅋㅋㅋㅋㅋ

사람들이 기대하는 6회.

유수한 역시도 추운 날 비 맞고 촬영하느라 고생했던 만큼 기대하고 있는 회차였다. 반응을 대강 둘러본 유수한이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OKEN] 7월 초 크랭크인 ‘내 심장을 향해 쏴라’ … 유수한X정동인 조합 기대감 상승

어느새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가 기지개를 켜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수한은 어느새 짧아진 머리칼을 만진다. 본품을 구매한 후에도 유수한은 열심히 배우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했던 ‘EXIT’도 기획 작업이 끝나 가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유수한은 시나리오를 보며 영화 촬영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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