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94화 (94/175)

94. 찾았다, 내 사랑

최우현을 마주했다.

자신의 업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업보를 감당한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수한이 되기로 결심한 지금, 그의 업보를 마주해야 했다.

최우현은 망가져 있었다.

그는 소통을 거부했다. 그저 마음에 맺힌 감정을 풀어 낼 상대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유수한이었다.

양종혁과 그 무리들은 과거와 상관없이 잘 살아가고 있었다. 양종혁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를 이어 받기 위해 그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탄탄한 소기업이었기에 그가 죽을 때까지는 평탄하게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외 박현석과 이호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다.”

유수한은 최우현에게 사과를 건넸다.

“이제야 널 돕게 된 거 미안해. 방관한 것도 미안하다.”

최우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집에 나오지 않아 예전과 달리 살이 붙었고 머리는 길게 자랐다.

“이걸로 보상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어.”

일반인에게 법적 다툼은 고통이었다.

유수한은 그 모든 것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모친은 대형 로펌의 대표였다. 모친의 힘을 빌려 최우현을 괴롭게 한 사람을 길고 길게 응징할 생각이었다.

죗값을 받을 때까지.

“왜 이제 와서……?”

최우현은 유수한을 끌어내리고 싶었다.

바퀴벌레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여전히 생생했기에. 양종혁에게 당했던 모든 것을 유수한에게 덮어씌웠다.

한 번쯤은 속 시원하게 고백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었고, 지금도 그 기억에 고통받고 있다고.

그래서 유수한을 이용했다.

“이제 와서 왜…….”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까.”

유수한이, 아니, 김대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 깨달았거든.”

김대한은 최우현을 돕기로 했다.

유수한이 저질렀던 죄였으나 안고 간다. 유수한이 되기 전 김대한은 수많은 말에 상처받았다. 가족이 없어서 어릴 때부터 고아라는 선입견 속에 살았고, 친구들은 그걸 약점 삼아 김대한을 괴롭혔다.

물리적인 힘으로 가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대한은 유수한이 말로 저질렀던 폭력을 이제라도 만회하려 했다.

“이걸로 네 마음이 달래질지 모르겠지만, 너무 뒤늦게 손을 내밀었지만.”

김대한 역시도 최우현처럼 망가지고 무너졌던 순간이 있었다.

실의에 빠져 작은 방에 자신을 가뒀다. 마음의 상처는 가라앉지 않고 조금씩 커졌다. 결국 길에 나앉게 되고도 김대한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무너지던 그 순간에 작은 집에 갇혀 있던 그 순간에, 누군가가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김대한은 그대로 나락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도와줄게.”

김대한은 최우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과거 김대한은 누굴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대한에게 손길을 내민 사람도 역시 없었다.

“미, 미안해……. 널, 널 무너지게 하면 마, 마, 마음이 나아질 줄 알, 알았어…….”

유수한은 우는 최우현을 바라보았다.

최우현을 법적인 방법으로 상대할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지옥인 사람에게 시시비비를 가리자며 법을 들이밀면 그대로 깊은 수렁 속에 빠지게 된다.

계속 김대한은 옳은 방법을 생각했다.

만약 유수한처럼 풍족하게 살았더라면 최우현을 도울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수한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그를 돕는다.

그게 김대한이 생각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 * *

[OKEN][단독] 일진설 벗은 유수한 “학폭 피해자 적극적으로 돕겠다”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유수한은 제한 시간 1시간을 남겨 두고 돌발 퀘스트를 해결했다. 최우현은 제대로 된 사실이 담긴 추가 글을 올렸다.

- 그럼 유수한은 그냥 방관자였던 거네?

└ 2222

└└ 33333

└└└ 444 그니까 사과했지 ㅉㅉ

- 솔직히 방관자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되냐? 반마다 왕따 있는 건 흔한 수준이었는데 ㄷㄷ

└ 22222 대부분 피해올까 봐 피하지...

└└ 333 방관자 아닌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정말 대단한 거...

└└└ 4444 여기 이렇게 방관자 아닌 사람이 많은데 왕따는 왜 많았던겨?ㅋㅋㅋㅋㅋㅋ

└└└└ 5 방관자 안 하면 되려 따돌림당하는 경우도 존많문;;;

- 유수한 대인배 아니냐? 와, 어떻게 저걸 도와줌??

└ 222 대인배 ㅇㅈ

└└ 3333 연예인에게 학폭이 얼마나 예민한데;; 존나 보살임;;

반응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유수한은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는 여론에 가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 순간의 자극을 쫓는다. 실컷 비난해 놓고 사실이 정정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이 달라진다.

이제 익숙해질 만한데, 이런 일이 생기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길고 길었던 이틀이었다.

그동안 잠을 설쳤던 유수한은 오랜만에 상쾌한 얼굴이었다. 문제가 해소되었기에 다소 피곤함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앉아라.”

이성실 역시도 얼굴이 영 좋지 못했다.

학폭설이 터지면서 수습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지, 잘 풀리지 않았다면 골치 아플 일이었다.

“새해부터 액땜을 제대로 했다.”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

최우현이 지금 와서 학폭설을 터트린 이유는, 그전까지는 유수한이 알아서 사고 치고 자폭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뭘 하지 않아도 망했었는데 요 근래는 사고도 안 치며 잘나갔다.

이미지가 좋아지는 유수한을 볼 때면 항상 바퀴벌레가 생각났단다. 음습한 곳을 찾아다니는 더러운 해충 바퀴벌레.

“너 이제 더 없지?”

“네?”

“뭐 또 터질 거 있는지 물어보는 거다.”

“없어요.”

아마도.

유수한은 멋쩍은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다른 일이 아니라 영화 때문에 회사를 찾았다. 때 아닌 학폭설 탓에 영화 미팅이 취소되었다.

계속 영화를 하고 싶었던 유수한이었고 무엇보다 ‘내 심장을 향해 쏴라’의 내용이 좋았다.

“안 그래도 고운영 감독에게 연락 왔어.”

다행이었다.

이번 일로 이대로 아웃이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일찍 문제를 매듭지어 다시 기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일단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더구나.”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해해도 할 말 없었다. 연예인에게 학폭은 민감한 주제였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미지에 타격을 받는다.

유수한은 짧고 굵게 일을 처리했고 피해자와 화해를 했다. 그렇기에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미팅은 내일 오후 5시야.”

“네.”

“이번 미팅은 민수가 아니라 나랑 같이 간다.”

“네? 대표님이요?”

“그래. 들어 보니 이 배역에 붙은 배우들이 쟁쟁해.”

“아.”

“어떻게 로드를 보내겠냐. 다른 배우들은 최소 실장이 따라붙는데.”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미팅을 다닐 때 유수한은 늘 민수와 함께였다. 초반에는 이성실이 유수한을 탐탁지 않아 했고 그 후에는 경합 없이 배역을 따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쟁쟁한 배우들이 경합을 펼치고 있었고 유수한 역시도 참전할 생각이었다. 이건 배우 경쟁 이전에 소속사 싸움이다.

“이왕 전쟁에 참전하는 거 이겨야 하지 않겠니?”

이성실은 다른 소속사 배우에게 역할을 뺏기는 걸 가장 싫어했다.

배우의 패배는 곧 회사의 패배였다. 그렇기에 오늘 유수한을 부른 건 내일 미팅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근데 감독님이 계속 미팅하시는 걸 보면 아직 마음에 쏙 드는 배우는 못 찾으신 것 같네요?”

유수한의 질문에 이성실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직 역할에 딱 맞는 배우를 못 찾은 게 분명해.”

그러면서 이성실은 고운영 감독이 처음 주인공으로 밀었던 연극 배우의 프로필을 내밀었다.

“원래 고 감독이 생각했던 배우야.”

유수한이 프로필을 확인했다.

이름은 현지석이었고 나이는 서른이었다. 전체적인 피지컬은 좋았지만, 얼굴은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턱이 다부지고 눈빛이 강렬했다.

“어떤 느낌을 찾으시는지 알 것 같네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운영 감독이 생각했던 주인공을 맡을 배우의 프로필을 확인하고 연기하는 모습까지 찾아본 유수한이 뭔가 감이 잡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캐릭터에 맞춰서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

* * *

머리를 짧게 잘랐다.

“와, 얼굴이 작으니까 정말 잘 어울린다.”

오늘 유수한은 ‘아이비리그컷’을 했다. 옆머리와 뒷머리가 시원해졌고 상대적으로 긴 앞머리를 살려 자연스럽게 옆으로 넘겨 주었다.

짧아진 머리가 뜨지 않도록 ‘다운펌’을 해야 했고 앞머리를 따로 왁스 손질을 했다. 전문가 손길이 닿은 머리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두상도 예쁜 것 같아요.”

칭찬이 이어진다.

유수한은 미팅을 하기 전에 완벽한 ‘서윤한’을 만들어 냈다. 북한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남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에 온 서윤한은 긴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서윤한은 한국에서 몸 쓰는 일을 주로 하며 생계를 이어 간다.

처음에는 거창한 포부를 안고 한국에 도착했던 서윤한은 점차 평화로움에 젖어 가고 있었다. 북에서는 연락이 끊긴 지 꽤 오래였고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의아한 지경까지 왔다.

그러면서도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 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을 했고 늦은 밤에는 총기가 망가지지 않도록 관리한다. 그런 그의 성격에 맞추려면 짧은 머리가 제격이었다.

“오늘 미팅 성공하세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숍에서 나왔다.

올해 봄에 ‘식사남녀’ 시즌2 촬영이 있다. 머리를 자르면서 걱정이 되었지만, 3월 말에 시작하는 일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머리를 기를 여유가 있었다.

머리로 계획을 생각한다.

봄에 ‘식사남녀’를 마무리 지은 후 ‘내 심장을 향해 쏴라’를 시작한다면.

“딱 좋은데.”

그 생각을 하며 유수한은 차에 올라탔다.

영화 미팅 장소는 목동이었다. 이동하면서 대본을 숙지한다. 역할에 대한 욕심으로 유수한은 대본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했다.

“왔냐.”

유수한은 샵에서 머리를 하고 와야 했기 때문에 이성실과 따로 움직였다.

김민수는 이성실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오늘 미팅은 이성실과 유수한이 참석한다. 그 시간 동안 김민수는 자유였다.

“들어가자.”

이성실은 힐끔 유수한의 달라진 머리를 보며 말했다.

무슨 헤어스타일이건, 역시 얼굴이 가장 중요했다. 오랜만에 머리를 짧게 자른 유수한은 얼굴이 한결 환해졌다.

새삼 이성실은 유수한의 외모에 감탄하며 한식집에 들어갔다.

* * *

고운영 감독은 여유롭게 물을 마시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노트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요즘 고운영 감독은 캐스팅 작업 때문에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노트에는 유수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크게 엑스(X)가 그어져 있었다.

그건 유수한이 학폭설에 휘말렸을 때 그은 엑스였다.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의혹을 해소할 줄은 몰랐다.

어떨까.

새로운 배우를 만날 때마다 고운영은 묘한 설렘을 느낀다. 아직은 ‘서윤한’에 딱 맞는 배우를 찾지 못했다.

이미지와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배우를 만났다. 하지만, 아직도 ‘느낌표’가 뜨는 배우를 찾을 수 없었다.

‘이번엔 어떨까.’

꽝일까.

아니면, 당첨일까.

“선배, 지금 들어온대요.”

옆에 앉은 조연출이 핸드폰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고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놓은 수첩을 주머니에 쓱 넣었다. 자세를 고쳐 앉는다.

저벅저벅.

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드르르르륵.

문이 열리고.

짧게 머리를 손질한 유수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그리고.

“!”

고운영 두 눈에 느낌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운영이 유수한에게 홀린 듯 다가갔다. 그리고 덥석, 유수한의 손을 잡았다.

유수한은 당황한 듯 눈이 커졌고 고운영 역시 눈이 커진 채로 유수한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처음 유수한은 고운영 계획에 없었다.

너무나 깔끔한 이미지였고 아무리 북한 엘리트 출신이라 해도 너무나 부잣집 이미지였다. 하지만 말끔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온 유수한은 묘했다.

실제로 보니, 잘생긴 건 물론이고.

짧은 머리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다부진 입매, 시원한 피지컬 역시도 합격이다.

“찾았다······.”

고운영이 유수한의 손을 두 손으로 꽉 힘주어 붙잡으며 말했다.

“내 사랑.”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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