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나의 하루
‘어디 보자. 카메라 위치가…….’
유수한은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펴본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나의 하루’ 제작팀은 유수한의 집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갔다. 유수한은 어디에 카메라를 설치했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머리에 집어넣었다.
카메라는 눈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도 돌아가며 무슨 말을 하든 모두 녹화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카메라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평소대로 행동하라고 했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머리가 집안 곳곳에 카메라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편하게 행동할까.
‘욕실에도 설치했지.’
제작진은 안전한 장소를 알려 주었다. 옷을 갈아입을 장소는 드레스룸이었다. 드레스룸에는 작은 커튼이 있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커튼을 치고 옷을 갈아입으면 안전했다.
얼추 카메라 위치는 알겠는데.
‘이제 뭐 하지?’
물론 공식적인 촬영은 다음 날 아침부터였다. ‘나의 하루’는 말 그대로 스타의 하루를 보여 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방송에 나오는데, 지금 유수한은 카메라가 설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이래서 싫다는 건데.’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유수한은 작게 한숨을 쉬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현재 시간은 밤 11시. 제작팀이 나타나서 카메라 세팅을 하고 난 후 대략 1시간이 흘러 있었다. 평소 유수한의 잠자리 시간은 새벽 1시였다.
훌렁.
익숙하게 상의를 벗은 유수한이 멈칫한다.
‘아.’
잠시 깜빡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욕실에서는 카메라가 상반신 위주로 설치되어 있으니 소중한 것을 보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카메라가 있는 장소에서 샤워하는 게 불쾌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유수한은 벗은 상의를 빨래통에 집어 던지며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 * *
아침 8시, 알람이 지독하게 울린다.
지난밤, 유수한은 잠을 설쳤다. 리얼리티 예능이라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또 생각했다.
“하아. 벌써 아침이네…….”
묵언 수행을 끝내고 유수한이 몸을 일으켰다. 우선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정리한다. 겨울이지만, 안방 창문을 열어 두고 나온 유수한은 바로 부엌으로 갔다. 물 한 컵을 마시고 우유를 꺼낸다. 운동하기 전에 항상 우유 한 컵으로 배를 채우는 유수한이었다.
그리고.
구석에 숨은 작가 한 명.
‘신경 쓰지 말라더니.’
저걸 보고도 어떻게 태연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새삼 유수한은 이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다음은 바로 샤워하러 들어간다. 사실은 아침에 유수한은 세수와 양치만 하고 바로 집을 나선다. 운동이 끝난 후에 샤워를 하지만, 지금은 보여 주기 식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연예인 다 됐다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유수한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보여 줄 이미지로 청결하고 완벽성을 추구하는 남자를 생각했다. 가끔 이 프로그램에서 더러운 모습을 보이는 출연자가 있었는데, 유수한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김대한이라면 그런 모습이 어울리지 모르겠지만, 유수한의 외모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수한 씨! 말 좀 해 주세요!]
아니, 자연스럽게 하라면서요.
샤워를 하고 나오니 작가가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혼자서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가끔은 혼잣말도 주절주절하지만, 카메라도 있고 사람도 있는 앞에서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은 뭐 입을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운동복은 깔별로 있었다. 뭘 고를 이유도 없이 그냥 손에 닿는 대로 입었는데, 무슨 말이라도 하라 하니 어색하게 그런 말이 나왔다.
슥.
유수한이 고른 운동복은 검은색 트레이닝복이었다. 사실 검은색이 8할이었고 나머지는 하얀색과 남색이었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고 모자를 푹 눌러 쓴다. 이제야 갑갑하게 느껴지는 집에서 벗어났다. 유수한은 집에 나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이 보고 싶었다. 늘 혼자 있던 집에 숨겨진 카메라와 낯선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유수한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후우.”
가방을 고쳐 멘다.
“운동하러 가 볼까.”
사실 계속 의문이다. 왜 이성실이 이 예능을 나가라고 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최근 종영한 ‘시한부 아빠’의 방송사는 MBS였다. 그리고 ‘나의 하루’는 MBS 간판 프로그램이었다.
앞으로 있을 시상식에 눈도장 찍으려고? 그것도 아니라면 역시 MBS 간판 예능이어서? 하지만 그러기에는 유수한은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친구도 없었다. 이 몸에 들어오면서 기존 인맥들과 거리를 두었던 유수한이었다.
사고만 치던 기존 유수한의 인맥은 하등 쓸모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유수한의 인맥은 얄팍하기 그지없었고 일이 없으면 늘 집에 머물렀다.
재미가 없는 인간에게 리얼리티라니.
“지금 촬영 때문에 또 근손실 심각하쥬?”
아.
“저 죄송한데, 그 말투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요즘 헬스 트레이너는 요즘 유행하는 말투를 따라 하고 있었다. 덩치와 맞지도 않았고 어색한데, 뭐가 그리 재밌다고 말끝마다 ‘쥬’를 붙이는지 모르겠다.
“가볍게 10세트 가야쥬?”
“아.”
한숨을 쉰다.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게 더 예능적으로 나으려나. 유수한은 모든 생각을 놓고 운동한다. 사실 운동할 때는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이 트레이너는 장난을 치면서도 살벌하게 운동시킨다. ‘시한부 아빠’ 촬영 때문에 운동을 못 했기에 더 벼르고 있었던 트레이너였다.
“후우.”
유수한은 벅찬 숨을 고르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툭툭 털었다. 물을 마시고 탈의실로 들어간다.
툭.
핸드폰을 꺼낸 유수한이 이젠 뭘 해야 하나 고민할 때.
[야, 노예들. 뭐 하냐?]
한동안 잠잠했던 노예 단톡방에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친목 도모 함 가자.]
그 메시지가 오늘은 꽤 반가웠다.
[저 지금 운동 끝나고 집 가는 중입니다.]
탈의실에서 톡톡톡 메시지를 보낸다. 여전히 카메라가 있었고 미리 촬영 협조를 했기 때문에, 이 탈의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은 있는데 제가 지금 나의 하루 촬영 중인데, 괜찮으세요?]
일단 촬영하고 있다는 걸 밝혔다. 뭐, 다들 방송쟁이라 카메라 붙는 건 별생각 없을 것이다. 이정환과 조이수는 쉬는 날이었고 윤지우는 촬영 중이지만, 끝나 간다고 답장을 보냈다.
[좋아. 그럼 5시까지 모여. 장소는 알지?]
종종 이정환은 후배들을 부른다. 그걸 싫어하는 후배도 있었지만, 유수한은 좋았다. 친구가 없어서 가끔은 만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정환이나 조이수를 만나면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배우로서 배울 점도 많았기에, 유수한은 이정환과 연결고리가 생긴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툭.
옷을 빨래통에 넣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간다. 샤워를 하고 나오며 유수한은 ‘노예식당’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수한은 혼자 집에서 대본이나 보고 낮잠 자고 또 대본을 보는 일만 반복했을 것이다.
우선 약속은 저녁이니까 샐러드로 점심을 때운다. 참으로 기계적인 생활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생활에 익숙했던 건 아니었다.
본래 김대한은 굉장히 게을렀다. 막노동해서 버는 돈의 절반은 저축하고 남은 돈으로 술을 사 먹었다. 가끔은 막노동한 돈 전부를 술값에 털어 넣을 때도 많았다.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유희거리로 술을 찾았다. 그는 술에 취해서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걸 좋아했다.
술과 담배에 찌든 몸은 날이 갈수록 망가졌고 뱃살도 나왔다. 그렇게 살던 김대한이었기에, 새로운 환경이 주어졌을 때 달라지고 싶었다.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던데.”
짧게 인터뷰 시간이 이어졌다.
“네. 근데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구요. 어느 순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의 나태한 생활을 청산하고 계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좀 재미는 없지만, 건강한 생활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한다. 지금 유수한은 그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고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밥을 먹는다. 그다음은 방송 모니터링도 하고 대본도 보면서 충실히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 했을 일들.
“왔냐?”
지금도 그렇다.
“왔어?”
조이수가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촬영 끝나자마자 달려온 윤지우도 반갑다. 윤지우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한동안 만날 수 없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 왔으니까 주문하자.”
분명 약속은 5시였는데, 유수한은 딱 5분 전에 도착했다. 그런데도 다들 일찍 왔는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오늘 무슨 게임 할까요?”
배우 셋과 아이돌이 주로 만나는 장소는.
“스플린더요. 그거 재밌대요.”
보드게임방이었다. 보드게임을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유수한이 술을 안 마신다는 것. 두 번째는 건전한 모임이 여러모로 좋기 때문이었다.
이정환을 포함한 조이수와 윤지우는 사생활이 깨끗한 사람들이었다.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 집에서 마신다. 괜히 술집에 있다가 취객과 시비가 붙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당구장을 생각했다가 윤지우가 포켓볼을 할 줄 몰라서 기각되었다. 그래서 결론 내린 장소가 보드게임이었다.
“케이크도 먹자.”
유수한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보드게임 카페를 갈 일도 없었는데,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그에게 보드게임은 단순한 땅 먹기 게임 정도였다. 이렇게 다양한 게임이 있는 줄도 몰랐고 게임 앞에서 사람이 이토록 유치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게임하기 전에, 다들 잘 지냈냐?”
이정환은 지금 방송이라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뭔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순삭 했을 것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카메라가 몇 대나 따라붙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테이블에도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다.
“잘 지냈죠.”
조이수가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근황 토크는 짧아야 제맛이었다. 보드게임을 시작한다. 유수한은 처음으로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기계처럼 활동하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계속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은 만남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보드게임은 여러 가지를 했다. 단순한 게임도 하고 머리를 쓰는 게임도 했다.
그러다 진지한 이야기도 한다. 배우가 셋이었기에 주 이야기는 연기였다.
“수한아. 너 연기 늘었더라?”
유수한이 미소를 짓는다. ‘시한부 아빠’를 찍고 난 후에 가장 많이 듣는 칭찬이 연기였다.
“잘하더라. 근데 좀 감정 조절을 해 봐. 계속 강하게만 가면 오히려 지루하거든? 강하게 주었다가 약하게 풀어 주고. 완급 조절까지 되면 넌 아마 날 이길 거다.”
풉.
그 말에 조이수가 살짝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이었다. 이정환의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자신감도 이해한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웃어?”
“아닙니다. 형님.”
유수한은 이정환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감정을 터트리는 건 좋지만, 너무 강하게만 밀어붙이지 말라던. 늘 머리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연기를 할 때 그 생각을 잊게 된다. 앞으로 유수한이 고쳐 나가야 할 부분이었다.
“다음에 볼 때는 촬영장이려나.”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계속 ‘노예식당’ 시즌2를 위해 일정을 조절하는 중이었다. 아마 빠르면 내년 초에 하게 될 수도 있다. 어차피 스케줄을 열흘 정도만 빼면 되기 때문에, 크게 무리되는 촬영은 아니었다.
막막하고 길게만 느껴졌던 ‘나의 하루’ 촬영도 끝나 간다. 유수한은 당분간은 예능 출연이 없기를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하루/선공개] 주목!!! 유수한의 한껏 성난 근육 보고 가세요! (୨୧❛ᴗ❛)✧
선공개 영상이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