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내 심장을 향해 쏴라
“현재 ‘식사남녀’ 시즌2의 촬영은 내년 봄에 잡혀 있습니다. 김승찬 감독의 ‘EXIT’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해서 일정에서 배제했습니다. 지금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걸 찾아 보고 있는데, 유수한 씨가 직접 검토 후에 진행하겠다고 전달받은 상태입니다.”
소속 배우가 열심히 일한다. 예전에는 일하는 것보다 노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 뺀질이가 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유수한 씨는 현재 업계 평가가 좋습니다. MBS ‘시한부 아빠’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드라마는 물론 영화까지도 제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요즘 유수한은 차근차근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이성실은 유수한의 발전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특히.
“선택하는 작품마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작품 보는 눈이 좋아졌다.
K엔터에서 작품 보는 눈이 좋은 연예인은 대표적으로 민서온이었다. 민서온은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지만, 선택하는 작품이 실패하는 경우가 없었다. 항상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낸다. 그렇기에 민서온이 톱스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유수한은 애초에 작품 보는 눈이 탁월한 편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역할만 고집하는 성격도 있었는데, 최근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 ‘시한부 아빠’가 그렇게 뜰 줄은 몰랐으니까.”
애초에 ‘시한부 아빠’는 기대작이 아니었다. 방송사에서도 홀대하는 작품이었고 캐스팅 작업에도 난항을 겪고 있던 작품이었다.
유수한이 처음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이성실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어딘가 정말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에도 유수한은 이번에도 성공을 거머쥐었다. 이번 ‘시한부 아빠’는 유수한의 공이 컸다. 당초 예정대로 신인 위주의 캐스팅을 하고 방영 시간대 역시 저녁 8시였다면 지금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유수한의 합류로 더 좋은 시간대로 옮기고 남은 주연 캐스팅에도 힘을 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대본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확실했다.
유수한은 대본 보는 눈이 좋아졌다.
“예능 제의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능?”
“근데 배우가 예능은 싫어해서요.”
“일회성으로 들어갈 만한 예능은?”
“일단 MBS의 ‘나의 하루’ 들어왔습니다.”
“아, 그거면 괜찮은데?”
유수한은 예능을 기피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 피디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노예식당’ 시즌2는 아직 확실히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다. 이정환을 비롯한 조이수, 윤지우는 물론 유수한도 스케줄이 빡빡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노예식당’은 돌아올 것이다. 이 예능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어지는 메리트가 크기 때문이었다.
MBS 간판 예능 프로그램 ‘나의 하루’는 일상 관찰 프로그램으로, 연예인이 나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보여 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이건 내가 직접 물어보지. 어차피 당장 들어갈 작품도 없는데, 지금 이미지 굳힐 겸 한번 출연하는 것도 좋으니까.”
뭐든 일이 쏟아진다는 건 좋은 현상이다. 유수한은 점차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예능으로 과거 세탁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러려고 예능에 출연하는 것도 맞으니까.
“광고는?”
“아직 싱글인데 이례적으로 유아용품 브랜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패스해.”
“네.”
굳이 아빠 이미지를 구축할 필요는 없었다. 연기는 연기일 뿐, 유수한은 아직 젊다. 앞으로 더 올라가야 하는 배우인지라, 육아와 관련된 제품은 모조리 거절하고 있었다.
“좋아. 유수한은 여기서 마무리.”
이성실이 다음 브리핑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 * *
유수한은 다시 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다녀오고 침대에 누워 쌓인 시나리오를 읽었다. 요즘은 수확이 영 좋지 못했다. 금빛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종종 보이는 것도 초록빛이었다.
“이제 슬슬 금빛 작품이 하고 싶은데.”
사실 작품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좀 쉬어도 된다. 날은 점차 추워졌고 포인트는 착착 모였다. 요즘은 시나리오를 찾아보는 일을 주로 하지만, 가끔은 영화관에 가서 소소하게 포인트를 사냥하고 있었다.
“뭐가 없을까.”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대본을 뒤적거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점에는 쉬어도 괜찮다. 당장 차기작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년 봄에는 ‘식사남녀’가 기다리고 있었고 김 감독의 좀비물도 한창 기획 중이었다. 게다가 고정 예능도 있다. 이 정도면 유수한은 한동안 쉬어도 될 정도였다.
[라이프 체인지]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813>
오랜만에 포인트 확인을 한다. 이것저것 일을 바쁘게 하다 보니 포인트가 착착 쌓이고 있었다. 연말에 MBS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면, 잘하면 올해 안에는 본품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유수한은 그때 비로소 마음 놓고 쉴 생각이었다. 지금은 이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빌리는 입장이었다. 본품을 구매하는 그 순간, 급한 마음도 가라앉을 듯했다.
“오냐, 민수야.”
이미 쌓인 대본은 다 읽었고 초록빛이라도 구미가 당기는 작품을 찾을 수 없었다. 때마침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예능?”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이건 대표님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셨는데, 제가 새로운 작품 전달하면서 겸사겸사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예능은 싫다. 유수한은 아무리 일하는 게 좋아도 예능 출연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 피디 예능도 이미지에 도움이 되니까 출연하는 거지, 아니었다면 칼거절 했을 것이다.
[MBS ‘나의 하루’라는 프로그램이고요. 일상 관찰 예능이에요.]
본 적 있다. 유수한도 쉬는 날에는 텔레비전을 본다. 거실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로 이것저것 찾아 보는데, 예능도 종종 볼 때가 있었다. 작위적인 프로그램이 아니어서 한결 낫지만, 이 집에 카메라가 설치된다고 생각하니 좀 떨떠름하다.
“내 사생활은 좀 지키고 싶은데.”
그 생각도 강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이 안에 방송 작가와 피디가 들어온다. 집 안 곳곳 숨겨 둔 카메라는 물론 카메라팀도 들어오겠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집이 어질러진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사생활이었다.
[하긴, 요즘 형 친구도 없고 운동만 하러 다니잖아요. 그래서 재미없긴 할 것 같아요.]
요새 김민수가 부쩍 말이 많아졌다.
“너 요즘 편한가 보다?”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됐고. 새 작품 들어온 거 있다며.”
[넵. 전화하기 전에 메일로 쐈습니다.]
“오냐.”
급하게 전화를 끊는다. 예상치 않은 스케줄 전달에 생각이 많아졌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오직 새 작품 생각뿐이었다.
핸드폰으로 메일함에 들어간다. 드라마는 물론 영화까지 작품을 확인하고 있던 유수한이었다. 그리고 오늘 도착한 건.
“영화군.”
드디어.
“금빛이야.”
찬란히 빛나는 금빛.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금빛 대본이었다.
유수한은 천천히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 그동안 호시탐탐 영화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시한부 아빠’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시작은 좋은 작품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작품성, 흥행 여부까지 확실한 금빛. 그토록 기다렸던 금빛 대본이었다.
[내 심장을 향해 쏴라 – 고운영 감독]
우선 시놉시스를 읽어 본다.
고운영 감독은 여성 감독이었다. 독립 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하던 감독이었고 이번에 처음으로 상업 영화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좋지 못했다. 투자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캐스팅이 좋아야 한다. 투자처를 찾고 있었고 좋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었다.
주인공에 톱스타를 캐스팅할 것.
그렇기에 고운영 감독은 대형 매니지먼트에 시나리오를 뿌리고 있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어울리는 배우가 있었지만, 그 배우는 톱스타도 아니었거니와 유명 배우도 아니었다. 창작자로서 고집을 부리자니 투자가 원활하지 않을 것이며 제작사에서도 반기지 않았다.
뭐든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세상이었다.
“주인공이 북한 사람이구나?”
영화 ‘내 심장을 향해 쏴라’는 주인공 ‘서윤한’의 이야기였다. 남파 임무를 위해 북한에서 파견된 서윤한은 재개발을 앞둔 달동네에서 살고 있다. 그의 정확한 직업은 간첩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총기를 잘 다루는 남자였다.
남한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렸고 죽을 둥 살 둥 하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었다. 서윤한은 점차 이 생활에 익숙해져 간다.
그런 그에게 삶이 뒤틀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서윤한이 달동네에서 얼굴만 알고 있던 아이의 부탁 때문이었다.
[시내에 있는 뽑기방에서 인형 갖고 싶어요! 돈도 모았어요. 근데 전 총을 잘 못 쏴요.]
서윤한은 난감하다. 사람을 죽일 때 말고는 총을 손에 쥐어 본 적 없는 그였다. 더군다나, 얼굴밖에 모르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자니, 마음 한편이 내키지 않는다.
[아저씨 총 잘 쏘잖아요.]
아이는 알고 있다. 늦은 밤, 우연히 그의 집 앞을 지나다가 총을 손보고 있는 그를 보았기에. 당연히 아이는 그 총이 장난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총기 소지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비밀이었어요?]
앙큼한 열 살.
[비밀 지킬 테니까, 저 인형 따 주는 거죠?]
작은 타깃을 향해 총을 쏜다. 빗나가는 것 없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타깃이 넘어간다. 아이가 갖고 싶다는 인형은 큰 곰 인형. 1등을 해야만 가질 수 있는 인형이었다. 무덤덤하게 인형을 받은 서윤한이 아이에게 곰 인형을 주는 그 순간.
[이봐.]
남한에서의 인생이.
[자네 혹시 사격 해 볼 생각 없는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서윤한은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인물이다. 간첩이었고, 북에서 지원이 뚝 끊겼기 때문에 그는 하루 벌어 하루 살았다. 남한에서의 삶은 아무리 돈이 없다 한들 북한보다 삶의 질이 좋았기에, 이대로 여기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있었다.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그 갈망을 이룰 수가 없다. 그는 지금까지 타인의 심장에 총을 겨누었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내 심장을 위해 총을 겨누는 순간, 그의 인생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괜찮은데.”
생각에 잠겨 있던 유수한이 핸드폰을 들었다. 인터넷에 영화 정보를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이성실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용건이 뭔지 잘 알고 있다.
“네, 대표님.”
역시나.
- 민수에게 전해 들었지? 예능 말이다.
“아, 네.”
- 일회성으로 출연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거면 해야죠.”
이미 여러 부분에서 이성실에게 전권을 맡긴 유수한이었다. 그래도 이성실은 작품에 관해서는 터치가 없었다.
- 그래. 아마 이번 주 금요일에 촬영 진행할 것 같다.
“네.”
-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알아요.”
- 따로 매니저에게 작가가 연락한다고 하니, 민수가 정해지는 대로 연락 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차분히 이성실의 말을 들은 유수한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오늘 들어온 영화 시나리오 말인데요.”
- 응? 아,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말하는 거냐?
“네.”
- 관심 있어?
“네, 괜찮을 것 같아서요.”
역시나 유수한은 쉬지 않는다. 내년에도 스케줄이 꽉 차 있었는데, 그렇기에 내년 초까지는 쉬기를 바랐던 이성실이었다. 물론 소속사 대표 입장에서는 배우가 일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돈을 따박따박 벌어다 주니까.
- 그래. 미팅 잡아 달라 이거지?
이제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성실은 유수한의 생각을 딱 알아챈다.
“네, 맞습니다.”
- 근데 그건 알아 둬라.
“네?”
- 이 영화 이제 제작 시작하는 단계라, 자칫 잘못하면 ‘식사남녀’와 촬영이 겹칠 수도 있어.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수한에게 현재 작품이 없지 않았다. ‘식사남녀’ 시즌2가 내년 봄에 촬영 시작이었고 좀비물 역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드라마는 사전 제작이라고 해도 빡빡한 일정이 예고되어 있다.
-우선 만나는 건 돈이 들지 않으니, 약속 잡아 보마.
유수한은 빈틈없이 일을 하고 싶었다. 쉬는 건 본품을 구매한 후에 마음 놓고 쉬고 싶다. 이젠 조급하게 생각할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통화를 마친 유수한이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모든 것에 적응하고 있다.
이 몸이 마치 처음부터 내 몸이었던 것처럼.
[라이프 체인지]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813>
다시 포인트를 확인한다.
이제 본품을 구매할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