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니
손으로 네모 칸을 만든다. 깨어나지 못하는 수아를 그 네모 칸 안에 집어넣는다. 이진우는 생각했다. 손으로 만든 이 네모 칸에 이 순간을 담을 수 있다면.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선명하게, 마치 사진이 머리에 박히는 것처럼 담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 해?」
문을 열고 나타난 선정혜가 손가락으로 네모 칸을 만들고 수아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진우를 보며 물었다.
이진우는 가만 수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틀어 선정혜를 본다. 이번에는 네모 칸 안에 선정혜가 담겼다.
「그냥.」
미소를 짓는다.
결단을 내렸고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 순간에도 수아는 죽어 가고 있다. 곤히 잠든 얼굴이었지만, 무의식 세계에서 어떤 고통을 받고 있을지 그 누구도 몰랐다.
「정혜야.」
이진우가 수아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 주는 선정혜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바라보는 선정혜는 그 누구보다 작았다. 다시 만났을 때, 이 여린 사람을 죽을 때까지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이진우였다.
「응.」
선정혜는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잘될 거야.」
뒤에서 선정혜를 끌어안으며 이진우가 말했다. 그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신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진우 혼자 준비하고 있는 이별이었다.
「다 잘될 거야.」
소중한 것을 놓고 가야 한다.
미래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진우는 지금의 기억을 안고 죽어 갈 것이다. 작은 위안을 해 보자면 예전처럼 쓸쓸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정혜와 수아는 이진우를 잊겠지만, 이진우는 행복했던 짧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진우야.」
선정혜가 미간을 좁혔다. 손에 들고 있던 젖은 수건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이진우를 보았다. 며칠 전부터 이진우가 이상하다는 걸 선정혜는 느끼고 있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그렇다고 버림받을 거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 물음에 이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 가는 거 아니지?」
「내가 어딜 가.」
「너 이상해.」
「이상할 일 없어. 걱정 마.」
노인은 말했다.
[잘 생각해 보게. 딸이 죽는다 해도 다시 자식을 못 낳는 건 아니지 않은가?]
터무니없는 말로 이진우를 현혹했다. 그 순간, 이진우는 깨달았다. 눈앞에 보이는 이 작자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악랄한 악마라는 것을.
「수아는 내가 지킬 거야.」
질긴 이 삶을 이어 간다고 해도 딸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수아를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수도 없었다. 수아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텐데, 다른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수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진우가 선정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일이 있다는 핑계로 병원에서 나왔다. 이진우는 걸음을 옮긴다. 처음 과거로 왔었던 그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가끔은 걸음이 무거워져서 멈추는 순간도 있었다. 순간 엄습하는 두려움에 뒤돌아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왔는가?」
노인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낯익은 물건 하나. 작은 앉은뱅이 식탁이 이진우 눈에 보였다.
「차 한잔하지.」
익숙한 장면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과차. 그 차는 이진우가 노인에게 대접했던 차였다. 이진우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다가 이내 노인 앞에 앉았다.
「그거 알고 있나?」
노인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차와 작은 식탁만이 먼 미래의 물건이라는 걸 말일세.」
「…….」
「지금 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란 말이지.」
「…….」
「마치 자네처럼.」
다시금 노인은 차를 마신다. 이진우는 가만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를 응시하던 이진우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정체는 대체 뭐지? 끝없이 고민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더군. 신인가? 진정 날 고통스럽게 하려는 악마인가?」
이미 결론을 내린 질문이었으나 노인에게 확답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이진우는 추측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을 원했다.
「글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말해 주지 않겠다는 거군.
「그렇다면 날 과거로 보낸 이유가 뭐야? 날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노인은 대답 없이 이진우에게 차를 권했다. 이진우는 그런 그를 보다가 미간을 좁힌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죽음이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대해서 들어야만 했다. 그 정도의 권한은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고통스러웠나? 나는 그저 자네가 원하는 대로 가족을 만들어 주었을 뿐인데.」
이진우의 속이 뒤틀린다.
「걱정 말게.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노인은 원하는 대답을 끝끝내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진우는 숨을 내뱉고는 찻잔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차를 입에 머금는다. 익숙한 향과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조심히 가시게.」
그 목소리를 끝으로 이진우는 정신을 잃었다.
[아빠!]
익숙한 목소리.
[진우야!]
잊지 않으려 노력했던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이진우는 눈을 감은 채로 지나간 추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아침에 배에 느껴지는 묵직함은 그에게 따스함을 안겨 주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다리를 붙잡고 해맑게 웃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선정혜가 끓여 주는 된장국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고, 월급날이라고 사 왔던 돼지고기의 맛도 기억한다. 돈을 모아 값비싼 청혼 반지를 샀던 그 순간도 기억했다. 늘 이진우가 원했던 꿈이었고 찰나에 스쳐 지나갔던 따스함이었다.
이렇게 짧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가족사진이라도 찍어 볼걸. 수아가 키우고 싶다던 강아지 한 마리 길러 볼걸. 야구장에 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함께 보러 갈걸. 바다도 보러 갈걸. 수많은 후회가 머리를 맴돈다.
[아빠! 이거 봐 봐! 내가 아빠 그렸어! 잘 그렸지?]
어?
[아빠! 엄마가 내일 삼겹살 구워 준대! 너무 좋다, 그치?]
어?
[아빠, 사랑해요! 아빠도 날 사랑하죠?]
어……?
* * *
감은 눈을 뜬다.
이진우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딸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아빠와 그 옆에 선 엄마가 웃고 있다.
「아빠!」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가을날. 늘 혼자였던 현재의 이진우 앞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랐잖아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안 해서!」
이진우의 눈이 흔들렸다. 머리가 어지럽다. 수많은 기억들이 이진우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수아를 위해 크레파스를 사 주었던 이진우는 다음 날 딸에게 그림 선물을 받았다. 양복을 입고 밝게 웃는 이진우였다.
어느 날은 돈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선정혜가 큰맘 먹고 삼겹살을 사 와 수아가 신나서 방방 뛰었던 모습도 기억났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쪼들리는 형편이 아니었으니, 돼지고기 정도는 원 없이 먹어도 됐을 텐데.
우습다.
없던 기억들이 머리에 차올랐고 과거에 경험했던 것처럼 생생했다. 기나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따스함은 이진우가 겪었던 무수한 순간이었는데, 그 기억을 모두 잃었다가 되찾은 기분이었다.
「아빠.」
이진우의 딸 이수아.
어느새 성장한 수아는 아픈 아빠를 자주 보러 왔다. 이틀 전, 겨우 고비를 넘긴 이진우는 긴 잠에 빠졌다가 이제야 깨어났다.
「오늘은 나 기억해요?」
기억한다.
「아빠.」
그 목소리도. 얼굴도. 아이의 천진한 웃음도 모두.
「엄마! 얼른 와요. 아빠 일어났어!」
딸의 목소리 뒤로 병실 문을 열고 나타난 선정혜가 보인다. 나이가 든 모습, 그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진우는 선정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와 손을 뻗는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이진우가 청혼했던 반지였다.
「여보.」
이진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마음을 가득 채운 따스함에, 머리에 선명한 기억에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선정혜의 손가락이 이진우의 눈물을 훔쳐 준다. 그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이진우가 행여나 아플까 봐 조심하는 손길이었다.
「나 많이 걱정했어…….」
선정혜는 여전히 눈물이 많았다. 이진우의 손을 잡고 흐느끼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어디서부터 현실이었을까. 지금은 현실일까.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일까.
[자네는.]
허공을 보던 이진우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좋은 선택을 했는가?]
이 목소리는 현실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인가.
「정혜야. 수아야.」
이진우가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이별을 준비하던 그 순간에도 마음에 맴돌던 그 말.
「사랑한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든, 허상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육신은 죽어 가고 있다고 해도 마음은 죽어 가지 않는다.
가족이 곁에 있다.
이진우는 죽어 가고 있음에도 쓸쓸하지 않았다.
* * *
[연예뉴스] MBS ‘시한부 아빠’ 순간 시청률 15% 육박! 웰메이드 드라마의 탄생!
[OKEN] 최종 시청률 13.8% 마지막 결말 화제 …… 유수한이 만들어 낸 허상일까?
MBS ‘시한부 아빠’가 종지부를 찍었다. 유수한은 드라마를 보면서 마지막 장면을 연기한 선배 박건태의 연기를 되새기고 있었다. 젊은 이진우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흐름이 튀지 않도록 연기해야 했는데, 자연스러운 눈빛 연기로 호평을 받고 있었다.
유수한이 박건태를 관찰한 것처럼 박건태 역시도 유수한을 유심히 관찰했기에 동일 인물처럼 연기할 수 있었다.
[HOT] <시한부 아빠> 결말 다양한 해석 모음 +248
결말에 대해서는 생각했던 대로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었다.
- 난 이진우가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바꿨다고 생각함 ㅇㅇ
└ 22 그래서 노인네가 좋은 선택 했냐고 물어본 거 아님?
└└ 333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 바꾸고 다시 현재로 컴백한 듯
└└└ 44444
└└└└ 5 맞아 딸을 선택했고 현재로 돌아왔지만, 바뀐 과거를 기억하게 된 거임
이런 의견도 있었고.
- 현재 이진우 치매 아니야? 그래서 헛것 본 것 같은데?
└ 2222 큰수아가 오늘은 기억하냐고 할 때 머리 씨게 맞은 기분이었음 ㅇㅇ
└└ 33333 치매 와서 기억 잃었다가 다시 돌아온 듯
└└└ 44 치매 왔고 이틀 동안 혼수상태였을 때 환상 보고 온 것 같아
└└└└ 5555 ㅇㅇ 치매설이 가장 일리 있음
여러 가지 대사를 조합하여 생각해 낸 해석도 있었다.
-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치매도 아니고 과거로 돌아간 것도 아니면?
└ 헐 그건 너무 가혹함
└└ 솔직히 이것도 그럴듯해. 미스터리 노인네도 알고 보니 상상이었던 거지
└└└ ㅇㄱㄹㅇ 상상 결말도 그럴듯함
└└└└ ㅠㅠㅠㅠ 이건 아니었으면 좋겠음 제발
이런 극단적인 생각도 있었다. 유수한은 반응을 찾아보며 결말에 대해 생각했다. 유수한은 치매 엔딩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와 미래를 바꾸었다는 해석의 결말을 지지하고 있었다.
- 유수한 연기 진짜 늘었다
└ ㅇㅈ 내가 쟤 때문에 울 줄 누가 알았겠어;;;
└└ 3333 존나 늘었음
└└└ 44 진짜 약 빨았나 요즘 연기 개존잘
└└└└ 5555 얼굴 연기력 모두 독보적이야
이번 ‘시한부 아빠’를 하면서 유수한은 연기력에 대한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배우로서도 감정 연기에 있어서 한층 더 성장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포인트에 대한 압박이 점점 덜어지자, 더 폭넓게 작품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진우를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배우로서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진우는 감정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역이었고, 무엇보다 타이틀 롤을 담당하기에 그 어떤 역할보다 비중이 컸다. 비록 초록빛이었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시청률 역시도 준수했다.
[HOT] 갑자기 대상 후보로 급부상한 유수한? 수상 가능성은? +345
연기력을 인정받았기에 이런 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선 시기가 좋았다. 연말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은 때인 데다 방송사에서 밀어주던 기대작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 6부작이라 불가능
- 연기로는 쌉가넝인데 장편이 아니라서 애매함
- ㅋㅋㅋㅋㅋ 유수한이 대상 후보라니, 존나 세상 이상하게 돌아간다
- 최우수 예상
└ 22 가장 현실적 ㅇㅇ
└└ 333 최우수 줄 거 같음
└└└ 44444
물론 그저 대상 후보가 되었을 뿐이었다. 여러모로 다른 대상 후보자에 비해서 조건이 떨어졌다. 만약 ‘시한부 아빠’가 6부작이 아니라 10부작이었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으나, 회차를 늘렸다면 지금의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우수나 받으면 감사하고.”
유수한은 아직 대상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느껴졌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작년에 우수상을 받았으니 올해 최우수를 받는다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수한은 미리 챙겨 놓은 대본을 들고 침실에 들어갔다. 오늘은 남은 시간 동안 들어온 대본을 확인하며 차기작 후보나 추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