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85화 (85/175)

85. EXIT

MBS ‘시한부 아빠’의 공식적인 촬영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방송뿐이었다. 이번 촬영을 하면서 얻어 가는 게 많았다. 처음 하는 아빠 역할도 신선했고 버겁던 감정 연기도 경험이 쌓였다.

처음에는 6부작이 걸림돌이라 생각했는데, 뒤늦게 생각하면 짧아서 다행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감정 연기가 주였기 때문에 길어졌다면 배우도 시청자도 지쳤을 것이다. 짧고 굵게 끝내는 게 여러모로 더 나았다.

“형, 여기 커피요.”

“고마워.”

촬영도 끝났겠다, 유수한은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늦잠이라고 해도 평소 기상 시간보다 1시간 늦어졌을 뿐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유수한은 짧게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김승찬 감독을 만나는 날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미팅을 갖기로 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여러모로 좀비물은 하고 싶은 장르였다. 좀비는 서양에서 주로 쓰던 소재였다. 한국에서도 하나둘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걸 요즘은 K-좀비라고 불렀다.

“수한 씨, 오랜만이에요.”

김승찬이 반갑게 유수한을 반겼다. 영화 ‘사냥개’에서 유수한 효과를 만끽했던 김승찬이었기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영화 ‘사냥개’는 550만 관객을 동원했다. 손익분기점을 돌파했고 김승찬에게 감독으로서의 안정을 찾아 주었다. 영화 하나를 히트 친다고 해도 그다음 작품을 말아먹으면 기회를 다시 잡기 힘들다. 그렇기에 두 번째 영화가 중요했는데, 이정환의 훌륭한 연기와 히든카드 존재 덕분에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VIP 시사회 이후에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아, 여긴 시나리오를 맡아 줄 작가님이에요. 오한성 작가님.”

남자 작가였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한성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손을 덥석 잡는다. 오한성 작가는 주로 영화계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살고 있었다. 함께 작업하는 감독이 여럿 있었지만, 영화가 아닌 드라마는 처음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드라마 작가들에게 도움을 요청 중이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중요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배는 채워 줘야 그다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오 작가도 이번 기회를 완벽하게 붙잡으려 노력 중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수한 씨는 더 잘생겼네요?”

오한성 작가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그는 밤새 글과 씨름하느라 고생 중이었다. 글이 나오지 않을 때면 줄담배를 피웠고 그러다 보니 목도 많이 간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늘 감사히 받는다. 예전 김대한이라면 잘생겼다는 말을 못 들었을 텐데, 유수한이 되면서는 매일 듣는 소리가 잘생겼다는 말이었다.

“우선 오 작가가 시나리오 집필 중인데, 아직 완성본은 없어요.”

김승찬 감독이 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오 작가와 기획 회의를 했고 이제 막 집필을 시작한 상태였다.

“사실 아직도 기획 단계에요.”

오 작가가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지금은 캐스팅 단계도 아닌데, 김 감독이 뭐가 그리 급해서 미팅을 잡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래서 나도 나름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열심히 글을 썼는데, 아직 누굴 보여 줄 만한 단계는 아니거든요.”

그렇기에 오 작가는 밤을 새우며 단 1회라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은 기획 단계였고 그렇기에 글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김승찬 감독은 주연 배우로 유수한을 점찍었다. 작가에게 캐스팅 권한까지는 없기 때문에 별말은 안 했지만, 지금 시점은 일러도 한참 일렀다.

“우리 아직 갈 길이 멀거든요.”

오 작가가 입을 다물고 김승찬 감독을 쳐다보았다.

“아니,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유수한 씨를 미리 붙잡아 놓고 싶어서 그렇죠.”

유수한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김승찬 감독의 영화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기획 단계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만약 뭐라도 있었다면 진작 보여 줬을 사람이었다.

“우선.”

김승찬 감독이 시놉시스를 내밀며 말했다.

“시놉시스는 완성됐으니까 읽어 봐요.”

요즘 유수한 주가가 심상치 않다. 하는 작품마다 잘 되고 있었다. 요즘 유수한의 이미지는 다재다능한 배우였다. 얼굴도 잘생긴 것도 모자라 연기도 곧잘 하며 몸도 잘 쓰고 예능도 잘한다. 못하는 게 없는 배우는 업계에서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수한은 말 그대로 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MBS ‘시한부 아빠’가 끝나고 나서도 tnV ‘식사남녀’ 시즌2가 남아 있었고, 예능 ‘노예식당’도 시즌2를 시작한다는 소리가 돌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유수한과 계약을 진행하고 싶은 김승찬이었다.

“지금 읽어 봐도 괜찮으시죠?”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요. 커피 한잔하시면서 천천히 읽으세요.”

김승찬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놉시스에 시선을 두었다.

[낫플릭스 / 김승찬 감독 ‧ 오한성 작가]

제목은 정해졌나 보다.

‘EXIT’는 낫플릭스 10부작으로, 공개되었을 때 흥행할 경우에는 바로 시즌2 제작에 들어간다. 보통 한국 콘텐츠는 시즌2는 기본으로 진행하고 있는 추세였다. 아쉽게도 시놉시스로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작품 보는 눈은 말 그대로 대본을 보았을 때만 금빛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원인 불명 바이러스가 퍼졌다!]

좀비를 다루는 콘텐츠라면 당연한 시작.

[서울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전역에 퍼지는 좀비 바이러스!]

음.

그렇구나.

[중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가 한국을 위험 국가로 규정짓는다.]

기대를 너무 했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국을 벗어나야 한다!]

시놉시스를 읽던 유수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마저 읽기는 하지만, 찝찝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말씀드릴게 있는데요.”

더 읽어 보지 않고 시놉시스를 내려놓은 유수한이 입을 열었다.

“이거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네?”

“엑시트(EXIT)라는 제목은 대한민국을 탈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제목이죠?”

“네.”

유수한은 말없이 김 감독과 오 작가를 번갈아 보았다.

“그 말은 국뽕은 버린다는 뜻으로 봐도 될까요?”

한국에서 애국심은 특별하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도 목숨을 다 바쳐 나라를 되찾으려던 민족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애국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세요. 이 시놉시스라면 한국을 탈출하는 게 목표잖아요. 외국에서는 반응이 온다고 해도 한국에서 이걸 받아들일까요?”

좀비물은 이제 특별한 소재가 아니다. 요즘 나오는 좀비물은 하나씩 독특한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낫플릭스에서 어떻게 투자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놉시스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 없었다.

“일리 있네요.”

오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저 때문에 서두르시는 거예요?”

기획 단계는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대략적으로 기한을 정해 놓아도 그보다 길어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김승찬 감독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뭐, 배우에게 뭔가를 보여 주기는 해야 하니까요.”

사실은 조금 만만하게 봤다. 낫플릭스에서 먼저 제의가 왔다. 좋은 작품 한번 만들어 보자고. 호쾌한 액션물을 원했기에 김승찬은 늘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원했다. 영화 ‘사냥개’처럼 단순한 스토리에 액션을 끼얹는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성공했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거봐요.”

오 작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드라마는 다르다니까. 나도 이번 일 준비하면서 드라마 경험이 없다 보니, 동료 작가들 조언을 구했거든요. 영화는 끽해야 2시간이지만, 드라마는 최소 10시간이에요. 그걸 만족할 만한 탄탄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단 말이죠.”

가방에서 노트를 꺼낸 오 작가가 볼펜을 들었다. 사실 오 작가도 김승찬 감독과 작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2시간짜리 시나리오도 버거운데 10부작 대본을 쓸 자신이 없었던 김 감독이 오 작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한성 작가에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영화 시나리오를 백 편을 쓴들, 감독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잘 쓰는 작가가 곧 갑이었다. 그렇기에 호시탐탐 드라마 시장으로 옮길 눈치를 보던 오 작가였다.

“자, 보세요. 이건 제가 생각한 시나리오예요.”

오한성 작가는 혼자서 골몰히 좀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서서히 구체화하고 있었는데, 유수한의 말을 듣고 아이디어가 덧붙여졌다.

“우선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야겠죠?”

노트 한가운데에 [좀비 바이러스]라고 적은 오한성 작가가 그 옆에 화살표를 그렸다.

“일본.”

국뽕은 사이다처럼 마셔 줘야 제맛이다.

“좀비 바이러스의 시작은 일본으로 하고.”

“일본이요?”

“네. 일본은 조지고 시작하죠.”

“이왕이면 중국도 조지고 갈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근데 중국은 땅도 크고 인간도 많아서 조지면 전 세계 멸망할 듯.”

“근데 중국이 바이러스를 잘 막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근데 걔넨 다 쏴 죽일걸요.”

아무튼.

오한성 작가가 마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전염병이 도지면 어떻게 해요? 감염자 격리를 하죠? 물론 그렇게 해도 퍼져요. 이 경우에서는 일본에서 감염되어 온 사람이 바이러스 전파의 첫 번째.”

사실 말하다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출연 계약을 하러 온 배우를 앞두고 새로운 시놉시스를 말하자니,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배우와 만남을 가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오한성 작가였다.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볼펜으로 [방역]이라 썼다.

“이 전염병을 막기 위해 방역 작업에 돌입하겠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셧아웃 됩니다. 일본부터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는 일본을 집어삼키고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으로 퍼져 갑니다.”

가장 중요한 건.

“기본 캐릭터의 성격을 그대로 가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야겠죠.”

오한성 작가가 가장 큰 글씨로 [EXIT]라고 썼다.

“탈출. 방역이 진행되고 있지만, 어디든 변수는 존재하죠.”

유수한에게 제안한 배역은 군인이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군인. 사람들을 이끌고 탈출하기 위해 총대를 메는 사람이었다.

“군대.”

방역 작업의 중심은 ‘군대’였다. 그 안에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군대에 바이러스가 퍼지면 어떨까요?”

“난리 나겠네요.”

“그렇죠? 바이러스에 감염된 걸 아는 사람이 죽기 전에 탈영한다면?”

“지독해지겠네요.”

오한성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염병에 감염된 사람 중에는 이런 부류도 있어요. 혼자는 못 죽는다는 심보를 가진 사람. 거기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제 시작이었다.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주인공 집단의 성격이 달라지죠. 민간인처럼 사회에 숨어들어, 숨은 감염자를 색출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고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지면 색출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가 되겠죠.”

살은 더 붙여야 한다. 제대로 된 시놉시스도 다시 써야만 했고 갈 길이 멀었다. 오 작가의 생각은 현실을 가미한 좀비물이었다. 물론 완벽하게 현실적이지는 않겠지만, 한국 특유의 문화를 녹일 생각이었다.

“좋아요. 좋은데요.”

유수한은 설명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느릿하게 커피를 마시고 김 감독을 바라보았다.

“저도 괜찮다면 하고 싶어요.”

하지만.

“일단 기획이 마무리되시면 다시 불러 주시죠.”

유수한은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낫플릭스 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메리트가 있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뜻 계약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지금 오한성 작가가 말한 것도 100% 준비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직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출연을 결정짓는 건 무리였다.

급하게 생각했던 김승찬 감독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길게 진행해야 할 작업이었다. 우선은 기획 단계를 마무리 짓고 다시 대화하기로 협의한 후에 오늘의 미팅은 끝났다.

[온에어/불판] 진우야, 행복하자! <시한부 아빠> 6회 츄라이츄라이~ +28

그리고.

어느새 ‘시한부 아빠’의 마지막 회가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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