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아빠가 기억할게
[연예뉴스] 유수한의 선택은 옳았다, MBS ‘시한부 아빠’ 10.5%
촬영장으로 향하는 길, 유수한은 ‘시한부 아빠’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3회의 시청률은 8.5%를 기록했고 4회는 딸 수아가 쓰러지면서 10%를 돌파했다.
「지, 진우야! 수아가, 수아가……!」
이진우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진우는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 누구보다 쉽게 살아갈 수 있었다.
이진우는 극도로 불안했으나, 정혜를 다독였다. 미래를 알고 과거로 회귀한 그였지만, 그에게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정혜와 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이진우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단칸방에서 살며 취업에 실패했던 이진우는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더 빠르게 단칸방에서 벗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정혜와의 만남도 그랬다. 이진우는 과거로 돌아와 진정한 행복을 얻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잘못 살아서 그래. 그래서 수아가…….」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진우에게 행복은 ‘가족’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면 반기는 가족들. 토끼 같은 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와 안겼다. 그리고 말없이 가방을 들어 주는 선정혜. 아무것도 아닌 일상은 이진우에게 행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떡해? 진우야. 우리, 우리 수아 어떡해…….」
행복은 쉽게 깨진다.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적 없는 것처럼. 선정혜가 무너진다. 울면서 내 탓이라며 가슴을 치는 정혜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괜찮아.」
내가.
「괜찮아, 정혜야.」
내가.
괜찮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자네, 원하는 가족을 얻었군. 그래, 기분이 어떤가.]
수아가 쓰러졌던 늦은 밤.
이진우는 젊음을 되찾고 처음으로 미스터리 노인을 만났다. 추레했던 노인은 정정했다. 지팡이를 들고 있었지만, 옷차림이 말끔했다. 한복을 입고 있는 노인은 마치 저승사자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못된 악마 같기도 했다.
[자네는 시한부였지? 아마, 6개월인가 남았던가.]
노인은 주저앉은 이진우에게 차분히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소를 짓는다.
[자네 딸 역시 6개월 남았겠구먼.]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 선택할 시간일세.]
이진우가 주저앉는다. 충격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찢어질 듯한 이명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떨리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자네가 죽을 겐가?]
아니면.
[딸을 죽일 겐가?]
삐이이이이이익-!
지독한 이명에도 노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듣고 싶지 않다고 귀에서 찢어질 듯한 이명을 울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노인의 목소리는 한없이 선명했다.
툭.
눈물이 떨어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노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진우는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다시 또 찾아오겠네.]
노인은 사라졌지만, 이진우의 귀에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부디 좋은 선택을 하길 바라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져야 했던 이진우가 무너진다. 딸이 아픈 이유가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바닥을 내리치며 울부짖는다.
몰랐다.
행복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불행이 덮쳤을 때, 그 슬픔이 배가된다는 것을. 머리가 어지럽다. 정혜와 수아와 함께했던 행복한 나날들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아빠!]
그 기억에 이진우가 웃는다. 서글픈 웃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와!]
빈 허공을 향해 소리친다.
[이거였어? 고작 이거였어? 날 행복하게 하고 죽게 할 셈이었어?]
가혹한 운명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진우는 지난 기억을 되새기며 감은 눈을 떴다. 울다 지친 정혜를 바라본다.
「정혜야. 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야.
선정혜의 눈물 자국을 보던 이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눈물 자국을 지우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네 탓이 아니야.」
모두 다 내 탓이야.
「네 탓이 아니야.」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 지랄맞은 노인네 죽이러 갈 사람 구합니다
- 아니, 그냥 좀 행복하게 두면 안 돼?
- 진심 어제 존나 울었음 씨앙 드라마 보면서 우는 거 존나 오랜만 ㅜㅜㅜㅜㅜ
- 진우야, 소금 좀 뿌려. 자꾸 잡귀가 꼬이잖아!
└ ㅇㅈ 팥도 뿌려야 함
└└ 이진우 아주 지독한게 붙었어
└└└ 누가 이진우한테 무당 좀 소개해 줘라
지난 내용을 떠올리던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드라마 반응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다들 미스터리 노인을 역적 취급 하고 있었다.
극이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유수한의 감정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송을 보고 난 후에는 더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 진우야 제발 행복하자
그렇기에 요즘 더 반응을 찾아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조금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이었다.
“다 왔습니다.”
어느새 촬영장에 도착했다. 유수한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대본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이제 ‘시한부 아빠’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촬영도 얼마 남지 않았다.
* * *
90년대 분위기로 꾸민 세트장.
극 후반에는 주로 이 세트장에서 촬영을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유수한은 낡은 병원을 꾸민 세트장에 올 때면 우울해졌다. 그건 수아의 엄마 역할을 맡은 명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유수한은 촬영 세팅 중인 스태프에게 인사를 하고 말없이 세트장을 돌아다녔다. 감정을 잡기 위한 방법이었다.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연다. 아직 아역배우가 도착하지 않아서 병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간다. 손을 뻗은 유수한이 빈 침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수한 씨.”
뒤이어, 촬영장에 도착한 명서진도 당연하다는 듯 병실을 찾았다. 부모 역할이라 그런지, 병실에서의 촬영이 가장 힘겨웠다.
어린 딸이 죽어 가고 있다.
이유도 모른 채.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미어진다.
“서진 씨, 왔어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차분하게 병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촬영장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사람이 명서진이었다. 서로의 감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어떤 방식으로 연기를 할지 의논했다. 그러다, 결말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님, 참 가혹하죠?”
“네?”
“나는 가끔 그렇더라고요.”
명서진이 벽에 기댄 채 말을 이었다.
“진우에게 참 가혹하다.”
“그런가요?”
“결말에 대해 많이 생각했거든요.”
“네.”
“이게 진짜 현실일까.”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말에 대해서는 모두 생각이 달랐다. 유수한은 이진우가 되어 생각했을 때, 결말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서진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든 것은 진우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환상? 그런 거요.”
“에이,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러게요. 근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우에게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진우에게 너무나 큰 고통일 것이기에 그래야만 했다. 결말을 두고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오는 건 좋은 거다. 어떤 사람은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을 거라 말했고 어떤 사람은 감동적이라 말했다. 또 명서진처럼 한 번 비틀어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촬영 30분 후에 시작합니다!”
어느새 촬영 세팅이 마무리 단계였다.
유수한은 촬영장에서 대본을 보며 감정을 잡고 있었다. 극의 분위기는 3회부터 가라앉고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로 촬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유수한은 대본을 본다. 대본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결말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기뻤지만, 그다음은 슬픔이었다.
이진우의 불행을 지켜본다. 감당하기 어려운 선택을 앞둔 그는 울분을 토하고 절규하며 쓰러진다. 이진우의 감정을 분석하려 하지 않았다. 캐릭터 분석은 배우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접근 방법을 달리했다.
이진우 감정에 동화하는 것. 유수한은 이진우가 되려 했다. 가족이 갖고 싶은 이진우. 가족을 지켜야만 하는 이진우. 딸을 사랑하는 이진우. 그리고 선정혜를 사랑하는 이진우.
“정혜야.”
전체적인 리허설을 해 본다. 유수한은 명서진을 보며 감정을 잡았다. 어떤 식으로 대사를 할지, 동선은 어떻게 맞출지 전체적으로 명서진과 호흡을 맞추었다.
연기할 때 리허설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차에서만 머무는 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유수한은 상황이 된다면 촬영장에 나와 세팅을 기다리며 배우와 호흡을 맞추었다.
“한번 안아 보자.”
이진우가 선정혜를 끌어안는다. 정혜는 딸이 아픈 상황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진우가 이상했다.
이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정혜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몸에 닿는다.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언제고 다시 기억할 수 있게.
“왜 그래?”
선정혜는 이진우가 이상하다. 실없는 농담을 해도 자꾸만 불안함이 느껴졌다. 이진우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릴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진짜…….”
툭툭.
말해 보라며 어깨를 두드려도 이진우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다시금 채근한다. 정혜는 불안한 눈으로 진우를 보았다. 혼자 수아를 키웠을 때는 그녀는 강했다. 아니, 강해야만 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그녀는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그녀에게도 의지할 사람이 생겼다. 이진우는 선정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그 사실이 선정혜를 두렵게 했다.
엄마는 강해야 한다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못할 거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엄마도 한낱 여자였다.
아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진우는 선정혜를 믿는다. 그 손을 잡고 서로를 의지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었다.
“아무 일 없어.”
이진우가 정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갈대처럼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던 이진우는 어느새 단단해졌다.
이진우의 눈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혜를 끌어안고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노인이 서 있었다. 지팡이를 들고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노인을 응시하던 이진우가 눈을 감았다.
“수아야.”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병으로 쓰러진 수아는 마치 곤히 잠든 아이 같았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던 이진우는 끝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이진우가 무릎을 굽혀 잠든 수아를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감은 눈을 만져 본다. 손가락이 코끝을 스치고 내려왔다.
“아빠가 기억할게.”
울컥.
감정이 치고 올라온다. 이진우는 따뜻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함께 손을 잡고 놀이공원으로 놀러 갔던 기억. 아침에 일어나면 배 위에서 곤히 잠든 수아를 보던 기억. 선정혜가 차려 주는 밥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 좁은 단칸방에서 함께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던 날도.
이진우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걸로 족하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과거, 이진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사랑을 주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었다고. 그러니,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어야 마땅하다.
“수아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결국 눈물이 툭 떨어졌다.
“수아는.”
마른 입술을 잘근 깨문다. 잠시 숨을 멈춘 이진우는 모든 것을 감내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다시금 눈을 뜬다.
“우리 딸은 기억 안 해도 돼.”
아빠가.
아빠가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