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82화 (82/175)

82. 누나, 나랑 결혼해 주라

[OKEN] 유수한 효과를 기대했던 MBS ‘시한부 아빠’ 첫 회 시청률 4.1%

MBS ‘시한부 아빠’의 첫 회 시청률은 4.1%였다. 다소 아쉬운 출발이었지만, 반등의 여지는 있었다. 실시간 시청률을 분석하면 초반에는 3%대로 시작했고 점차 오르는 추세였다. 그 말은 한번 ‘시한부 아빠’를 보기 시작한 시청자가 다른 채널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1회는 여러 가지 상황 설명이 필요했기에 빌드업 구간이었다. 2회부터 점차 스토리가 풀리며 시청률도 조금씩 오를 거라고 판단했다.

[HOT] 유수한과 명서진이 낳은 것 같은 딸 이유빈 +165

‘시한부 아빠’가 방송되고 나오는 반응은 주로 딸에 대한 이야기였다. 딸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는 이유빈이었다. 여덟 살에 웃는 얼굴이 유수한과 닮아서 캐스팅된 아역이었다.

- 근데 유수한 딸 캐스팅 기가 막힌다 존똑임

└ 무표정은 엄마 닮았고 웃을 때는 아빠 닮음;;;;

└└ ㅇㅈ 진짜 딸 같더라

└└└ 캐스팅 미쳤음

캐스팅 관련해서는 유수한은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같은 역을 공유하는 배우 박건태 역시 유수한과 비슷한 모습이 있었다. 우선 감독은 60대 이진우로 키가 큰 배우들을 찾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목소리나 분위기가 유수한과 비슷한 배우를 추렸다.

명서진은 주말극을 주로 하던 배우였다. 주말극 특유의 올드한 이미지가 쌓여 가고 있었기에, 미니시리즈로 호시탐탐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 명서진은 ‘시한부 아빠’ 제의를 거절했었다. 하지만 유수한이 합류한 걸 알고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건 당연했다. 요즘 뜨고 있는 상대 배우를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여러모로 정 감독이 신경 쓴 캐스팅은 조화로웠다. 누구 하나 분위기에서 튀는 사람이 없었다.

“대본 다들 숙지하셨죠?”

오늘 유수한은 아침부터 설렜다. 봉인되어 있었던 ‘시한부 아빠’의 마지막 회 대본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며 단숨에 읽어 내렸다.

결말은 생각했던 것을 뛰어넘었다. 유수한이 생각한 결말은 단순했는데, 안혜진 작가는 마지막 대본을 꽁꽁 숨기며 봉인할 가치가 있는 결말을 내놓았다.

문득 유수한은 ‘시한부 아빠’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더 자극적인 제목으로 바꾸느냐 마느냐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타이틀이었다.

처음 유수한은 ‘시한부 아빠’가 전체적인 줄거리를 포현하면서도 다소 뻔한 타이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결말을 확인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 제목만큼 이 드라마를 잘 설명할 타이틀은 없다는 것을.

“자, 아마 마지막 대본 리딩이 될 것 같네요.”

현재 촬영은 순조롭다. 첫 회가 방송었고 하루의 휴식을 취했다. 마지막 대본을 확인한 지금 남은 촬영은 일주일 남짓이었다.

“기분이 새롭습니다.”

정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부디 오늘은 시청률이 잘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유수한은 대본을 펼치며 생각에 잠겼다. 이진우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유수한은 한 가지 착각을 했다. 이진우라는 인물이 과거 김대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진우는 김대한과 비슷하지 않았다.

만약 김대한이 이진우처럼 치열하게 살았다면 결말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진우는 자신의 처지에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발전하려고 노력했다. 오히려 환경은 김대한보다 이진우가 더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한보다 멋지게 살았다.

김대한은 유수한이 되어서야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유수한이라는 사람이 돈이 있고 잘생긴 얼굴을 가진 배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늘 김대한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에 절어 살았다.

발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고마워.”

선정혜 역을 맡은 명서진을 바라보았다.

“날 찾아와 줘서.”

감정에 몰입한 유수한의 눈이 젖어 있었다.

“네 덕분에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명서진은 당황했다.

그저 대본 리딩이었다. 마지막 회 대본을 받은 건 아침이었는데 고작 서너 시간 만에 유수한은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했다. 물론 그건 배우라면 놀라울 일은 아니었지만, 그 감정이 온전히 전달되었다.

“뭐가?”

오늘 명서진은 그저 서로의 호흡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촬영장에서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가늠하는 용도로 대본 리딩을 생각했는데, 유수한의 감정에 그대로 취해 버렸다.

“진우야. 난 너에게 해 준 게 없는데, 넌 왜…….”

선정혜는 여기서 울면 안 된다. 명서진은 이 극의 결말을 알고 있지만, 선정혜는 몰라야 했다. 이진우가 느끼는 감정을 선정혜는 몰라야 한다. 그런데 유수한의 연기를 지켜보다 그대로 감정에 동화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몰라야 하는 선정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결국 대사를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연기를 하다 보면 인물에 동화되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본 리딩에서는 그런 일이 흔치 않았다.

대본 리딩을 하는 이유는 촬영을 하기 전에 배우 간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대사 톤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감독은 연출을 어떻게 할지 힌트를 얻는다.

촬영 감독은 앵글을 어떻게 잡을지 계산하며 작가는 자신이 만든 캐릭터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대본 리딩을 진행한다.

해서, 명서진은 자신의 감정에 당황스러워했다.

“왜 이렇게 슬프죠?”

그 이유는 유수한 때문이었다.

“진우는 다 주고 더 줄 게 없는데, 왜 맨날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명서진은 어느새 8년 차 배우였다. 그 시간 동안 다양한 배우를 만났고 많은 배역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배우로서 연기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가 아닌 인기를 좇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느끼는 충격이었다. 유수한의 연기는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곱게 자란 배우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실상 만나 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 참 부끄럽네…….”

명서진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배우가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마지막 회인 만큼 다들 차분히 대본 리딩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안혜진 작가는 힐끔 정은택 감독을 보았다. 서로 눈빛 교환을 하며 만족한다는 감정을 공유했다.

언제나 그렇듯 시청자는 까다롭다. 배우의 감정을 건드리지 못하면 시청자도 마찬가지였다. 대본으로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 있어야 했다.

여러모로 배우들의 연기는 마음에 들었다. 특히 타이틀 롤을 맡은 유수한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신파라고 해서 감정이 지나치게 젖어들면 곤란했다. 어느 정도 캐릭터의 성격을 유지하며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그걸 유수한이 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렇듯 유수한의 연기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감정이 녹아 있었다.

정혜 : (영문 모를 눈으로) 진우야. 난 너에게 해 준 게 없는데, 넌 왜 고맙다고만 해?

그렇기에, 이 대사를 치며 명서진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거였다. 사실 유수한 캐스팅은 말 그대로 화제성을 노린 것이었다. 사실 이렇게 굴러 들어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기에, 더 감사한 배우였다.

그리고.

“서진 씨, 제가 보지 말까요? 제가 보면 좀 슬프죠?”

실제 마주한 유수한은 모든 면에서 더 좋은 배우였다.

* * *

이진우가 익숙해진 일상 첫 번째.

「우리 딸…….」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를 감당하라.

「또 아빠 배 위에서 잤구나.」

처음 낯가리던 수아는 언젠가부터 아빠 배 위에서 자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이진우는 무거운 호박에 짓눌리는 꿈에 시달렸고 일어나 보니 귀여운 딸이 배 위에 엎드려 있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짓누르고 자는 딸의 모습을 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주었다. 늦은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이진우의 마음을 가볍게 할 정도였다.

「왜 벌써 일어났어?」

이진우가 익숙해진 일상 두 번째.

「아침밥 먹고 가야지.」

선정혜가 해 주는 밥이었다. 처음 선정혜는 이진우가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는 걸 몰랐다. 그녀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아침을 차려 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이진우는 바빴다. 신문 배달을 마치고 난 후에는 바로 공사장에 달려가 막노동을 했고, 가끔은 면접도 보러 다녔다.

「고마워. 이렇게 안 해 줘도 되는데…….」

선정혜는 말없이 된장국을 앉은뱅이 식탁에 내려놓았다. 이진우 집에는 있는 게 없어서 선정혜가 챙겨 온 살림이 더 많았다.

처음 아침밥을 챙겨 주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선정혜는 기함했다. 대체 뭘 먹고 사는 걸까. 그렇게 바쁘게 다니면서 끼니를 거르는 게 습관인 듯했다.

「오늘 또 면접 있잖아.」

「응, 알고 있었구나.」

「달력이 크니까…….」

그 말에 멋쩍은 듯 이진우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햄 구웠으니까 든든히 먹고 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식사에는 계란에 부친 햄이 놓여 있었다. 어제 선정혜가 장을 보고 오겠다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햄을 사 가지고 올 줄은 몰랐다. 물론 가격이 가장 저렴한 동그란 햄이었지만, 이진우에게는 별로 구경하지 못한 고급 반찬이었다.

「요즘도 밥 잘 안 챙겨 먹고 다니지?」

수저를 들며 선정혜가 물었다.

「응? 아니야. 공사장에서 밥 잘 줘.」

「집에서 말이야.」

연애했을 때도 이진우는 끼니를 툭하면 걸렀다. 말로는 체중 관리 때문에 그렇다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돈 아끼려고 굶는 걸 생활화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이진우는 선정혜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진우야.」

아직도 선정혜는 이진우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선뜻 수아를 딸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정혜가 아는 이진우는 소탈하고 착한 남자였다. 그렇기에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그와의 결혼을 꿈꿨을 정도였다.

「미안해.」

그리고.

「내가 그때 철이 없었어.」

「네가 미안할 건 하나도 없어.」

「그냥, 네가 좋아서 붙잡고 싶었나 봐.」

「정혜야.」

「내가 강요한 거였잖아. 애만 가지면 다 될 줄 알았거든.」

지난날, 부모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선정혜는 이진우를 덮쳤다. 말 그대로 그건 선정혜가 이진우를 덮친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 와서 말하기 쑥스럽지만, 사실이 그랬다. 선정혜는 이진우와 함께 살고 싶었고 영원을 약속하고 싶었다.

90년대에는 젊은 나이에 일찍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두 사람의 결혼은 그리 이른 결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정혜는 헤어지고 나서도 임신했다는 사실이 싫지 않았다. 여전히 이진우를 잊지 못했고 왜 이별 통보를 한 건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를 사랑했으니까.

「너에게 내가 짐이 됐네.」

이진우가 말없이 밥을 한술 크게 떴다. 입에 욱여넣고 햄 하나를 먹는다. 오물오물. 입이 터져라 밥을 먹던 이진우가 국물 한 모금을 떠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도 남자야.」

이진우가 미소를 지었다.

「나도 널 원했다고. 설마 나도 남잔데, 정혜 네 마음 하나 모를까 봐.」

지금의 이진우에게 선정혜는 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죽기 직전까지도 염원하던 것이 지금 이루어졌다. 그는 더 열심히 차가운 세상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나.」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한 가지 작은 비밀이 있었다.

이진우는 한 살 연하였다.

「나랑 결혼할래?」

무거운 분위기를 부수려고 했던 말인데, 선정혜가 미간을 팍 찌푸린다. 그러다가도 우스운지 고개를 숙이며 웃고 있었다.

「얼른 먹기나 해.」

「응.」

이진우가 다시 수저를 들며 말했다.

「근데 진심이야.」

힐끔, 고개를 들어 선정혜를 본다.

「결혼하고 싶어.」

지금은 좁은 단칸방이라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같이 살아야 하지만, 계속 이 자리에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기회가 주어졌고 이진우는 가족을 선택했다. 이미 이진우는 미래를 살고 왔기에,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나 취업하고 조금 더 넓은 집에 가면-」

이진우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 나랑 결혼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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