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81화 (81/175)

81. 아저씨가 우리 아빠예요?

- 집이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 바람 소리 뭐야 ㅋㅋㅋㅋㅋㅋ

- 연기 자연스럽다 사람이 바뀌었는데 그냥 젊어진 것 같음

└ 유수한 연기 늘었네...

└└ ㅇㅈ 말투도 비슷해

SNS에 퍼지는 반응을 읽어 보았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같은 역을 두 사람이 공유하기 때문에 인물이 바뀌어도 같은 역할로 보여야 했다. 그동안 유수한은 60세 이진우 역할을 맡은 배우 ‘박건태’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특유의 말투를 익혔다. 대본 리딩에서도 박건태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았고, 폭넓은 대화까지 하며 이번 드라마를 준비해 왔다.

그 결과.

「이보시오. 대체 여기가 어디요?」

유수한은 젊은 이진우의 모습을 그려 내면서도 노인 이진우의 모습을 가져왔다.

「대체 이게…….」

지금 이진우는 혼란스럽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은 젊어져 있었고 세상 역시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죽은 건가?」

사후 세계.

순간 이진우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사후 세계였다. 6개월 시한부를 선고받았으니, 이 비현실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근거는 역시 죽음이었다.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이진우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거리를 헤맨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1990년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당연한 세상에서 살던 이진우는 삐삐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윽고 걸음을 옮기던 이진우가 가판대에서 신문을 발견했다.

덥석.

신문을 든 이진우가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역시 날짜였다.

「1993년 10월 23일.」

쿵.

심장이 내려앉는다. 지금 이진우는 30년을 거슬러 왔다. 신문에서 다루는 소식 역시도 1993년도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었다.

[찻값은 내 꼭 보답하지.]

생각에 잠긴 이진우는 정체불명의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시 신문을 제자리에 놓은 이진우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다.

「저 사람 맨발이야.」

「그러게. 옷도 이상하고, 거진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걸음을 옮기던 이진우가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고, 죽어 가던 몸과 다른 젊음은 그에게 활력을 주었다. 발바닥이 아픈 줄도 모르고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걸음이 느려질 즈음, 그는 깨닫는다.

「현실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 턱끝에 맺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쾌청한 하늘.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 서 있던 이진우는 이내 미간을 좁히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유수한 연기 리얼하네? 저런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보임 ㅋㅋㅋㅋㅋ

- 2인 1역 하면 한 사람이 튀는 경우가 많은데 유수한이 톤을 잘 맞추네

└ 맞아 같은 사람 같음

└└ ㅇㄱㄹㅇ 이진우가 진짜 젊어진 느낌 ㅇㅇ

└└└ 자연스러워서 저런 경험이 있나 착각할 정도임 ㅋㅋㅋㅋㅋㅋ

반응을 읽던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지만, 유수한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연기했다.

서울역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김대한은 잠에서 깨어나니 유수한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의 충격을 기억하고 있다.

이진우 역시도 같은 충격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끝나 가고 있음을 깨달은 이진우였기에, 다시 젊음을 되찾았을 때의 혼란함을 그 누구보다 잘 표현해 낼 수 있었다.

혼란에 이어 느껴지는 감정은 역시 ‘환희’였다. 죽을 날을 받아 두고 살던 이진우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으니 순간 기뻤을 것이다. 설령 이곳이 사후 세계라고 할지라도 젊음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역시 잠겨 있군.」

돈 한 푼 없는 이진우는 걸어서 예전에 살던 단칸방을 찾아왔다. 기억을 되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맨발로 달음질을 쳤던 이진우의 발바닥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달칵.

다시금 문을 열어 보려 시도하지만, 굳게 잠긴 문이 갑자기 열릴 턱이 없었다. 돈은 집 안에 있는 상태였다.

핸드폰은 물론 삐삐도 없다. 1993년도는 삐삐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이진우가 삐삐를 갖게 된 건 95년도였다. 돈이 없어서 한 푼 두 푼 아껴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제발…….」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기에 가망이 없었다. 밖에 나온 이진우는 방과 연결된 작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젊은 이진우는 가끔 문단속을 깜빡할 때가 있었다.

스윽.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본다. 덜컥, 순간 걸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다시 힘주어 여니 힘겹게 문이 열렸다. 생각해 보면 이 단칸방에 있는 작은 창문은 늘 빡빡했다. 오래된 집이라 창문마저도 노후한 탓이었다.

「흡!」

힘을 주어 좁은 창문에 매달린다. 성인 남자가 들어가기에는 작은 구멍인 데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여길 모양새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아, 두 번은 못 할 짓이군.」

이진우는 탁탁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개켜져 있는 작은 방이 눈에 보인다. 이곳에서 이진우는 무려 10년간 살았다. 집을 둘러보는 이진우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네.」

누렇게 때가 탄 벽지를 손바닥으로 훑는다. 이 집은 쉽게 습기가 차서 벽지에 곰팡이가 잘도 슬었다. 집을 가볍게 둘러본 이진우는 벽에 걸려 있는 큰 달력을 쳐다보았다. 하나하나 계획이 적혀 있었다.

당장 다음 주, 25일 월요일에 면접이 잡혀 있었다. 이 시기 이진우는 막노동을 하면서 회사에 취직하려고 발버둥 쳤다.

이진우는 복싱 선수였지만 사고로 발목이 으스러지면서 예전 기량을 찾지 못했고, 결국 선수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배운 것도 없던 이진우는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혀야 했다.

「그랬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이진우는 책장에 꽂혀 있는 낡은 책을 꺼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보았던 문제집이었다.

중졸이었던 이진우는 복싱을 그만두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취업을 하려거든 학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살길을 새롭게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지만, 뭔가를 하려 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털썩, 바닥에 앉은 이진우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감은 눈을 뜬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이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이진우가 현관문을 열었다.

「정혜……?」

뜻밖의 인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선정혜.

이진우가 사랑했던 여자였고 늙은 후에도 잊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93년도에 이진우는 30살이었고 정혜와 헤어진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럼에도 눈에 선하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이진우는 과거로 돌아왔다. 그리고 과거 이진우는 선정혜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선정혜를 바라보았다. 이진우가 알고 있던 과거가 달라지고 있었다.

「아저씨!」

그리고.

짧은 침묵을 깨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예요?」

그 말에 이진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당황한 건 선정혜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딸을 낳아 키우던 선정혜는 최근 사기를 당하고 이진우에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왔다.

헤어진 지 오래되었기에 이진우를 찾아오는 건 그녀에게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며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터졌다.

「정혜야?」

당황하는 이진우의 얼굴 너머로 카메라가 움직인다. 어느새 벽에 걸린 달력에 닿은 카메라는 10월 23일을 비추고 있었다.

「10월 23일 – 갈현동 공사 현장」

과거 이진우는 오늘 막노동을 나갔었다. 그렇기에 원래 이 시간에는 이진우가 집에 없었다. 사실상 이 시기에 이진우가 집에 있는 시간은 오직 늦은 시간뿐이었다.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날이 밝기 무섭게 신문을 돌렸으며, 그다음에는 일용직을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면접 준비를 하느라 바빴기에 선정혜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다시 이진우의 얼굴이 보인다.

「추우니까 들어와.」

서로를 바라본다. 이진우는 뒤늦게 더러워진 자신의 발바닥이 신경 쓰였다. 선정혜도 물끄러미 때가 탄 발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진우는 은근슬쩍 발바닥을 손으로 가렸다.

「이수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선정혜였다.

「내 딸 이름이야.」

그리고.

「수아, 진우 네 딸이야.」

선정혜는 담담하게 말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속은 덜덜 떨고 있었다. 수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연습했던 말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선택한 방법이 돌직구였다. 이진우가 당황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왜 이제야…….」

이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왜 그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말하는 거야?」

그로서는 타당한 질문이었다. 수아는 딱 보기에도 예닐곱은 되어 보였다. 그 시간 동안 이진우를 찾지 않았던 선정혜였기에, 이진우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선정혜는 말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수아, 일곱 살이야.」

「…….」

「너와 헤어지고 얼마 안 돼서 임신한 걸 알았어.」

담담히 선정혜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당연히 널 찾으러 갔어. 이건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이진우는 수아의 나이를 듣는 순간, 왜 선정혜가 말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파악했다. 그 즈음이라면-

「내 사고 때문에?」

그 물음에 선정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널 찾아갔는데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더라. 어떻게 말해? 정신도 못 차리는 너에게 내가 어떻게 이 사실을 말해.」

그 말을 하면서 선정혜는 아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작은 단칸방이라 따로 대화할 장소가 없었다. 그럼에도 말해야 하는 일이었다.

「혼자 키워 보려고 했어. 네가 원한다면 친자 확인도 할게.」

「정혜야.」

「내가 지금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

지금 선정혜에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이를 임신하면서 선정혜는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의 부모는 애를 낳으면 후회할 거라며 낙태를 종용했고 선정혜는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진우와 헤어졌기에 낙태를 하는 방법이 서로에게 가장 나은 방향이라는 걸 알면서도 낳고 싶었다.

아이를 선택한 대가는 부모였다. 부모는 딸을 포기했다. 전셋집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을 지원하는 대신, 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때는 그랬다.

여자는 늘 단정해야 하며 순결을 지켜야 했다. 이진우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는 정숙하지 못한 딸에게 실망했고 주위 사람 보기 부끄럽다며 결국 내쳤다.

그리고.

「내가 사기를 당했어.」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삼켜 내며 정혜가 말했다.

「전세금을 모두 날렸거든.」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살 집을 구할 때까지만. 진우야, 그때까지만 도와줘.」

이진우는 자신의 눈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선정혜를 바라보았다. 선정혜는 이진우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말하지 못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걸 이진우도 이해한다.

과거는 바뀌었다.

이진우가 오늘 집에 머물렀기에 선정혜를 만날 수 있었고,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괜찮아.」

이진우가 목이 메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정혜야.」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진우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과거의 이진우였다면 정혜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진우는 고개를 돌려 딸을 보았다. 딸은 무거운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손가락 거스름을 뜯고 있었다.

「정혜야.」

이진우가 다시금 시선을 돌려 정혜를 보았다.

「내가 간절히 원하던 게 있어.」

이진우는 선정혜를 사랑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선정혜와 헤어져야 했지만 강하게 붙잡지 못했던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마지막.

선정혜는 울면서 이진우에게 소리쳤다.

[이진우! 넌 나 없이도 살 수 있어?]

그렇게 말하던 선정혜의 목소리가 여전히 이진우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자네는 부디 좋은 선택을 하길 바라네.]

그 선택이 지금 이 순간을 말하는 거라면.

「난 가족이 갖고 싶었어.」

이진우는 가족을 선택할 것이다.

「나 지금이라도 수아 아빠 할게.」

그리고.

「하게 해 줘.」

그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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