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뇌물의 효과
어?
「두 번은 못 하겠는데?」
‘식사남녀 – 시즌1’의 마무리는 끝났고. 지금은 짧은 에필로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윤수는 이번에는 맥주 두 잔에 떡실신이 된 강인한을 부축하고 있다.
「꼴랑 맥주에 취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주당 이윤수에게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키는 왜 쓸데없이 커서!」
이윤수도 여자치고는 큰 편이었지만, 강인한 역시도 남자치고 큰 편이었다. 거기에 운동을 주기적으로 해서 덩치도 크다.
「어디 가서! 술 먹지 말아야 해! 이 양반은! 나니까, 허억, 나니까 곱게 넘어가는 거야! 못된 여자 만났으면 큰일 날 양반이야! 이 사람은!」
그런 남자를 여자의 몸으로 끌고 가려니 힘들 만도 했다.
「아악!」
또 강인한의 무게를 못 이긴 이윤수가 바닥에 넘어진다. 예전과 같았다. 술에 취한 강인한을 부축하며 가다가 이렇게 바닥에 넘어진다.
심지어.
「눈 내리는 것도 똑같냐?」
몸을 일으킨다. 엎어진 채로 잠든 강인한을 똑바로 눕혀 놓은 이윤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강인한은 저번보다 더 취해서 아예 정신줄을 놓은 모습이었다.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이윤수가 볼을 쿡 찔러 본다.
「얼굴은 참.」
늘 생각한다.
「내 취향인데.」
차마 잘생겼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이윤수는 가만 강인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리는 눈송이가 이마에 닿아 녹아내리자, 강인한이 차가운 듯 미간을 좁힌다.
그 모습을 보던 이윤수가 손가락으로 좁힌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럼 이제 아무도 없는 거네요?」
오늘 이윤수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말수가 적어서 짧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꽤 인상 깊은 대화였다.
「그럼 됐어요.」
짧은 에필로그가 끝났다.
* * *
[OKEN] tnV ‘식사남녀’ 마지막 회 13.7% 시즌2 제작 확정!
시청률이 상승했다.
강인한과 이윤수의 러브라인이 가속될 거라는 기대감을 남겨 두고 ‘식사남녀 – 시즌1’이 끝났다. 한 작품을 마무리 지으면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오는데, 이번에는 기분이 조금 달랐다. 예전 같으면 정말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시즌2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HOT]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직진여주가 나올 식사남녀 시즌2 +106
직진여주.
원작 ‘식사남녀’는 느린 러브라인이었지만, 특징이 하나 있었다. 여주 이윤수가 먼저 강인한에게 관심을 가졌고 천천히 감정을 자각하며 직진했다는 점이었다.
드라마 ‘식사남녀’도 그 노선을 그대로 따라갔다. 시즌1에서 뚜렷한 러브라인은 없었지만, 이윤수는 반복되는 만남에 강인한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할 때는 철두철미한 그가 음식을 눈앞에 둘 때는 달라지는 모습에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게 곧 호감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관계에는 시발점이 필요하다. 그 시발점은 시즌1 마지막 회에 터졌다. 강인한이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강인한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걸 계기로 이윤수는 시즌2에서 본격적으로 사랑을 쟁취할 준비를 할 터였다.
- 직진여주 너무 좋고요 무뚝뚝한 강인한이 바뀔 거 생각하니 존나 설레고요???
- 어제 진심 숨멎 이윤수가 강인한 얼굴 쳐다보는데 왜 이렇게 설레냐?
└ 22222 뭐 한 것도 없는데 왜 섹텐이 느껴짐?
└└ 3333
└└└ 4444444
- 이윤수 하는 말 존웃 ㅋㅋㅋ 어디가서 취하지 말래 ㅋㅋㅋㅋ
└ 근데 공감함 ㅋㅋㅋㅋ 나였으면 응... ^^
└└ 맞아... 위험하지.. 강인한 술 취하면 위험해.. ^^
└└└ ㅋㅋㅋㅋㅋㅋㅋㅋ 연애하면 술 못 먹게 할 듯 ㅋㅋㅋㅋㅋ
- 강윤 커플 너무 좋다 얼굴만 봐도 배가 불러
강윤 커플은 강인한과 이윤수의 커플명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니 반응도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즌2의 기대감은 충분했다. 러브라인이 아직 본격화된 건 아니었기에, 시즌2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오랜만에 유수한은 차기작을 위한 자리를 가졌다. 드라마 ‘시간’을 하면서 영화 ‘사냥개’ 특별출연을 했고 뒤이어서 숨 가쁘게 ‘식사남녀’를 찍었다.
그리고.
슬슬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에 결국 ‘시한부 아빠’에 마음이 닿은 유수한이었다.
“정은택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는 정은택 감독만 있었고 이윽고 회의실 문이 열리며 안경을 쓴 여자가 들어왔다.
“저 늦었죠? 죄송해요. 차가 밀려서.”
바로 안혜진 작가였다.
“안녕하세요. 수한 씨. 연락받고 너무 기뻐서 선물 사 왔어요.”
진심이었다.
안혜진 작가는 그 유수한이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선물을 준비했다. 다른 배우도 아니고 유수한이라면 작품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타이틀 롤을 맡은 남주였다. 분량도 많았고 남주가 6회 내내 중심이었기에 그 어떤 역할보다 중요했다.
“어, 저 받아도 되는 거예요? 첫 만남인데. 일단 감사합니다.”
유수한은 얼떨떨한 얼굴로 선물을 받았다.
“작은 거예요. 진짜 뇌물 아니니까 편하게 받으세요.”
사실 뇌물이었다.
“지금 열어 볼까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에서 박스를 꺼냈다. 묵직하다. 포장지를 뜯어 보니, 몸에 좋은 홍삼 엑기스였다.
“요새 열일 하시는 거 같아서 준비했어요.”
“아,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사실 선물을 보는 순간 뇌물이라는 걸 직감했다. 심지어 몸에 좋은 홍삼. 그 말은 이거 먹고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즉, 같이 드라마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그거 알아요? 수한 씨?”
“네?”
“안 작가 유명한 짠순이예요.”
“아.”
“그만큼 수한 씨가 좋다는 뜻이죠.”
“네, 감사합니다.”
호의적인 분위기는 참 오랜만이다. 물론 영화 ‘사냥개’ 김승찬 감독을 만났을 때도 부드러운 분위기였지만, 드라마팀에게는 처음이었다. tnV ‘식사남녀’는 첫 만남이 꽝이었고 그다음 이강은 피디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었다.
“저 진짜 너무 놀랐어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정도로요.”
안혜진 작가는 얼굴까지 빨개져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 예상했다. 주인공 물망에 오른 사람이 잘생기기는 했으나 연기력은 영 아니었다. 그러니, 유수한의 연락을 받고 좋아하는 건 작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유수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 대본은 언제 나오나요?”
“아. 6회차 대본 말씀하시는 거죠?”
“네. 읽다 보니 결말이 궁금해서요.”
“그건 비밀이에요.”
“네?”
“마지막 회 대본은 제일 나중에 보여 드릴 거거든요.”
안혜진 작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 쓰긴 했어요. 결말도 정리했고요.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주는 이 대본을 가장 늦게 봤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5회에서 굉장히 흔들리잖아요. 내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중한 딸을 살려야 하는가.”
설명을 들으며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혼란함은 결말을 모른 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물론 흐름을 보면 남주의 선택이 어떻게 될지 보이겠지만, 그래도요.”
“네.”
“아무래도 글로 확인하고 연기하는 것과 모르고 연기하는 건 좀 다르잖아요.”
“그렇죠.”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확실치 않았다. 남주가 어떤 방식으로 선택을 마무리 지을지, 그 과정이 더 중요했다. 안혜진 작가의 설명을 듣고 납득이 간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MBS에서 ‘시한부 아빠’가 그렇게 좋은 카드는 아니에요.”
조용히 있던 정은택 감독이 입을 열었다.
“고작 6부작이고. 또 저나 안 작가나 아직 신인이나 다름없거든요.”
실제로 정은택 감독은 한 작품을 연출하고 이번이 두 번째 작품이었다. 안 작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안혜진 작가는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드라마에 뛰어들었다. 필력은 좋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영화 느낌이 났고 왜 16부작이 아니라 6부작인지 충분히 알 듯했다.
“이건 부담 드리는 건 아니에요.”
정은택이 우선 한발 물러서며 미소를 지었다.
“저희 입장에서는 유수한 씨가 남주를 맡아 주신다면 더 좋은 기회로 만들 수 있거든요.”
“좋은 기회요?”
“네. 지금 말 나오는 자리는 평일 8시 시간대인데, 아시겠지만 애매해요.”
유수한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평일 밤 10시 시간대로 옮겨 보려고 운을 뗄 생각입니다.”
그 말인즉슨, 유수한의 이름값을 이용해서 더 좋은 시간대로 옮겨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배우뿐만 아니라 작감 역시도 작품은 소중하다. 연출하는 작품이 잘되어야 감독의 위치도 올라가고 그건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배우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러 가지 출연료 문제 같은 건 소속사와 의논하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유수한 씨가 간절합니다.”
정은택 감독은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가끔 본인이 연출자라는 이유로 경력도 변변치 않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정 감독은 솔직하게 유수한을 원하고 있었다.
“다른 캐스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현실적인 문제로 들어간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아역이겠죠?”
“네, 그렇죠.”
“여러 후보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데, 일단 최종 후보는 이 세 명입니다.”
정은택이 프로필을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2순위였는데, 유수한 씨가 아빠 역할을 한다고 하면-”
그중에 가운데에 놓인 프로필을 밀어 유수한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 친구가 가장 수한 씨와 닮았죠.”
유수한이 말없이 프로필을 보았다. 사진을 본다. 하얀 얼굴에 큰 눈. 웃는 얼굴이 얼핏 유수한을 닮아 있었다. 전체적인 이미지는 달랐지만, 웃는 얼굴이 묘하게 유수한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유수한은 순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귀엽네요.”
“연기도 곧잘 해요. 주로 CF를 찍던 애기라서 걱정했는데, 카메라 테스트 하니까 끼가 있어요. 배우가 될 끼.”
고개를 끄덕인다.
미리 준비한 카메라 테스트 영상을 본 유수한도 인정했다. 큰 눈으로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았을 때, 이상하게 감정 이입이 됐다.
나와 닮은 아이가 운다고 생각하니 묘했다.
‘대표님이 간만 보고 오랬는데…….’
생각과 다르게 홀리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은택 감독은 유수한을 붙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아직 국장에게는 제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은근슬쩍 유수한 소식을 흘려 놓은 상태였다. 그래야 더 좋은 시간대로 작품을 옮길 수 있었다.
“어머, 감독님! 우리 정신 좀 봐.”
갑자기 안혜진 작가가 벌떡 일어났다.
“귀중한 손님을 두고 커피 한잔 대접 안 했잖아요, 지금!”
별거 아닌 일이었다.
유수한은 오기 전에 커피 한 잔을 마셨고 지금을 물을 마시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정은택 감독도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고 있었다.
“사 올까요?”
안혜진 작가의 물음에 정 감독이 손사래를 쳤다.
“무슨! 요즘 배달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
분위기가 밝다.
유수한은 오늘 미팅을 이성실 대표의 말대로 간만 보고 올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술수에도 넘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솔직한 모습이 좋았고 밝은 분위기도 좋았다. 이런 작가와 감독이라면 믿을 수 있을 듯했다.
“여기 커피 맛있어요. 어때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네, 좋네요.”
마음은 이미 결정 났다.
“저 이 드라마 남주 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정은택 감독과 안혜진 작가의 얼굴에 활짝 꽃이 폈다.
“이우진, 제가 하고 싶어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연기를 하면서 배우로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은 ‘시한부 아빠’가 초록빛이었지만, 언제 ‘금빛’으로 바뀔지 몰랐다. 그건 배우의 몫도 중요하다. 만약 유수한이 ‘이우진’ 역할을 잘 소화한다면 충분히 ‘금빛’으로 찬란히 빛날 수 있다.
유수한의 말에 안혜진 작가는 기쁜 나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입이 손바닥에 막혀 들리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꺄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은택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보며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커피가 맛있었나?”
“그러게요. 여기 커피가 원두 비싼 거 써서 맛있긴 해요.”
“커피 잘 샀네.”
“네, 케이크도요.”
유수한이 화장실에 간 사이, 두 사람은 잘못된 오해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