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스토커
“요즘 이 녀석 행보는 당최 예측할 수가 없다니까.”
핸드폰을 내려놓은 이성실이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이성실은 유수한의 전화를 받았다. 사실 배우가 회사 대표에게 다이렉트로 연락하는 일이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보통 직속 매니저에게 전달한 후에 차근차근 단계를 거쳐 대표까지 닿는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유수한의 경우는 그 모든 단계를 건너뛰고 이성실에게 가장 먼저 소식이 전해졌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특별 대우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특별 대우를 하고 있는 격이었다.
“그 드라마가 뭐였더라.”
웬만하면 괜찮은 대본은 다 읽어 보는 이성실이었지만, ‘시한부 아빠’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선 방송사에서 밀어주는 드라마도 아니었거니와 6부작으로 오히려 단막극 형식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무턱대로 신인 배우를 밀어 넣기에는 6부작인 ‘시한부 아빠’는 사이즈가 컸고, 기성 배우는 별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드라마였다.
“이거군.”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본을 찾아낸다. 이성실은 시놉시스를 켜 놓고 짧게 생각에 잠겼다. 여배우가 특히 그렇겠지만, 엄마 역할은 보통 기피한다. 엄마 역할을 하는 순간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해서, 좋은 대본도 엄마 역할이라는 이유로 얼굴이 조금씩 알려지는 중인 신인 배우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만큼 여배우에게 나이는 절대적이다.
물론 남자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애 딸린 유부남 역할? 젊은 배우라면 당연히 기피하려 할 것이다. 아직 주연급이 못 되는 배우라면 한 번쯤은 메인 롤로 고민을 하겠지만, 이미 주인공급이 된 이상 하려 하지 않는 역할이 애 아빠였다.
해서.
“이놈이 이걸 하겠다고?”
이상할 수밖에.
이성실은 시놉시스를 읽으며 생각에 잠겼다. 전체 줄거리는 흥미롭다. 판타지가 섞였고 역할 자체는 젊다. 20대 후반 설정이었고 숨겨진 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인 1역이었다. 늙은 시한부를 연기할 배우와 젊은 청년을 연기할 배우가 있다.
“흐음.”
지금까지 유수한이 머리를 다친 후에 선택한 작품은 모두 평균 이상이었다. 아니, 평균보다 더 상회하는 성적을 냈다.
처음 노숙자 역할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성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망가지는 걸 싫어하는 유수한이 복귀작으로 선택한 역할이 ‘노숙자’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는 결국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한탄이었다. 더 높게 올라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배우가 추락하는 건 이성실 역시도 입맛을 쓰게 했다.
하지만, 결국 성공했다.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가며 지금 자리까지 온 유수한이었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성실은 말없이 ‘시한부 아빠’ 시놉시스를 내밀었다.
“일단 유수한이 이 작품에 관심 있다고 하니 사내에 공유하고 내일 오전에 전체 회의 잡아 줘.”
“네.”
“그리고.”
“네.”
“정은택 감독 미팅, 이번 주 내로 주선해.”
“네, 알겠습니다.”
매니지먼트를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우에게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배우 스스로 생각하게 하여 작품을 선택하게끔 한다. 그래야만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었다.
물론 놓치기 아쉬운 작품은 은근슬쩍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걸 거부한다고 해서 기분 상하거나 하지 않았다.
연기는 배우가 하는 것이고 매니저는 매니저답게 보조만 해 주면 된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이성실이었기에, 이번에도 유수한의 생각을 믿기로 했다.
* * *
상암동 고깃집.
유수한은 손에 잔뜩 뭔가를 들고 있었다. 오늘은 ‘식사남녀’의 종방연이었다. 오늘도 역시 팬들이 유수한을 반겼다. 주문 제작한 케이크를 구경하고 ‘빛유’ 사람들의 환영도 받았다. 유수한은 차에 선물을 실어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고깃집에 들어왔다.
“시간이 진짜 너무 빠르다아.”
옆에 앉은 주민하가 턱을 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사전 제작이라 그런지, 드라마가 더 빨리 끝난 기분이었다.
물론 시즌제를 생각하고 있는 드라마였고 10부작 밖에 안 되니, 다른 미니시리즈와 비교해서 짧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자자,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좋은 소식 알려 드리겠습니다!”
드라마 시작하기 5분 전.
케이크 커팅식을 마치고 단상에 올라간 건 조연출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있는 얼굴은 밝았다. 촬영할 때는 피곤에 절어서 말 거기도 미안한 얼굴이었는데, 그동안 잘 쉬었는지 오늘은 반질반질했다.
“우리 식사남녀가!”
우렁찬 목소리.
“어제 시즌2 확정 지었습니다!”
좋은 소식이다.
tnV ‘식사남녀’는 시즌제를 목표로 두고 시작했다. 초반 잡음이 있어서 출발은 좋지 못했지만, 사전 제작을 통해 탄탄한 작품성을 선보였다.
이강은 피디는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작품에 녹였다. 음식 하나하나를 신경 썼고 배우의 연기력 역시도 좋았다. 그러니 시즌2 확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 방송한 9회의 시청률은 11.2%
과연 마지막 회는 얼마나 나올까.
「좋아 보이네.」
전 여자 친구와의 재회.
‘식사남녀 – 시즌1’의 마지막 회가 시작되었다.
* * *
강인한은 예전 기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쉽게 곁에 두지 않는 성격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강인한에게 지나간 사랑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리운 것이었다.
「좋아 보이네.」
가끔 강인한도 지나간 사랑을 재회하는 상상을 할 때가 있었다. 운명처럼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일. 후회했던 지난날의 실수를 만회하고 원하던 상상대로 결말을 맞이하는 일.
「응, 오랜만이야.」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강인한은 퇴근 후에 자주 가던 꽃집에 들렀다. 오랜만에 꽃 하나를 살 생각이었다. 강인한은 반려동물은 키우지 않지만, 반려식물에는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물에게 물을 주며 마음에 위로를 받는다.
「옆에는…… 남자 친구?」
강인한은 표정 관리를 하며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시간이 그만큼 지났으니, 곁에 누군가가 있는 일도 이상하지 않다.
「응, 아니, 사실은 남편이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이 씁쓸하다가도 이내 체념하게 된다.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떠나갔던 연인을 다시 붙잡을 수 있는 자격은 강인한에게 없었다.
그래도.
다시 만난다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었는데.
「잘 지내?」
지나간 인연.
이름은 이지애. 나이는 동갑, 고등학생 때부터 만나 왔던 첫사랑. 강인한의 모난 성격을 받아 주었고 함께 음식을 먹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이지애는 남편을 잠시 보내 놓고 한결 편한 얼굴로 강인한을 보았다. 오랫동안 만나던 사람이었으니, 그녀에게도 강인한은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응, 잘 지내.」
강인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나도 잘 지내고 있어.」
그래, 그거면 됐다.
원하는 상상대로 결말을 지을 수는 없지만, 사랑했던 여자가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지나간 인연은 다시 붙잡는다고 한들,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
강인한이 손을 내밀었다.
「네가 행복해 보이니 나도 좋다.」
손을 맞잡는다.
그걸로 됐다. 갑자기 마주쳐도 서로 웃으며 보낼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된 것에 만족한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질 수 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둘이 진짜 미친 듯이 사랑하다가 헤어진 것 같아서 맴찢
- 전작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더니 이번에도 똑같네 ㅠㅠㅠㅠㅠ
└ ㅋㅋㅋㅋ 전작에서는 강인한이 찌질한 놈이잖아 ㅋㅋㅋㅋㅋㅋ
└└ 아, 강인한이라고 하지 말라고요 꽃거지라고 하라고요 ㅋㅋㅋㅋㅋ
- 확실히 강인한은 전 여친 만났을 때 제일 표정이 풍부해 ㅋㅋㅋㅋㅋㅋ
└ 222222 존나 아련미 넘침
└└ 333 네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ㅠㅠㅠㅠㅠ
└└└ 44 아련미 존나 오짐
예전에 호흡 맞췄던 사람과 다시 연기를 하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달라진 캐릭터로 마주하게 된 것도 기분이 묘했다. 한초원은 늘 그렇듯 물 흐르듯이 감정 표현을 했다. 유수한의 연기를 모두 흡수하듯 받아 주고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이었다.
뭐랄까.
아직은 이름이 덜 알려진 배우였지만, 시간이 흐르면 정말 좋은 배우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엥?」
새로운 반려 식물을 사고 꽃집에서 나온 강인한은-
「팀장님이 여기 무슨 일이에요?」
우연히 또 이윤수를 만났다.
「혹시 스토커입니까?」
「네에?」
「요새 툭하면 눈에 보여서.」
「제가 뭐 한다고 팀장님을 스토킹해요?」
「그러니까. 왜 자꾸 거슬리게 눈에 띕니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오르고 있다.
이윤수는 맛집에서 강인한 팀장을 하도 마주쳐서 이제 조금 편해진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 앙숙처럼 굴었지만, 처음처럼 서로에게 벽을 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딩동-」
꽃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지애가 남편과 함께 꽃집에서 나왔다.
「아.」
아직 꽃집 앞에 서 있던 강인한이 어색한 듯 미소를 짓는다. 이지애는 말없이 강인한 옆에 서 있는 이윤수를 보고 있었다.
「좋아 보이네.」
강인한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여자 친구?」
그 말에 이윤수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누구보다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은 여자처럼 보였다. 강인한은 말없이 이윤수를 보다가 시선을 옮겨 이지애를 보았다.
「글쎄.」
의문스러운 말을 던지며 생각에 잠기던 강인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스토커.」
「팀장님!」
스토커?
이지애가 커진 눈으로 이윤수를 보았다. 지금 이윤수 차림은 청바지에 두툼한 숏패딩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을 피하려 모자를 푹 눌러쓴, 말 그대로 조금 추레한 차림이었다.
「어쩌다가, 젊은 나이에 스토커를 직업으로…….」
이지애는 진지하다.
강인한은 쉽게 농담할 성격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아니에요!」
뒤늦게 이윤수가 손사래 치며 소리쳤다.
「저는 스토킹하는 사람이 아니고요, 이 사람 부하 직원이에요. 그리고 강인한 팀장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스토커요? 갑자기 스토커라뇨!」
억울한 이윤수를 두고 강인한은 이지애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어쩌다 보니, 이윤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휙.
뒤돌아서서 가 버리는 강인한을 본 이윤수가 어이없는 듯 발을 쾅쾅 굴렀다.
「이봐요! 강 팀장님! 어디 가세요? 오해는 풀고 가야죠!」
이지애는 멀어지는 강인한을 바라본다. 그러다 그 뒤를 앙칼진 고양이처럼 쫓아가는 이윤수까지 함께.
갑자기 마주친 예전 사랑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나간 연인이 아니라 친구를 만난 것처럼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곁에 좋은 사람이 생긴 것 같아서.
- 이윤수 스토커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강인한도 많이 변했다 ㅋㅋㅋ 농담도 할 줄 알고 ㅋㅋㅋㅋ
└└└ 농담에 진심이 담긴 ㅋㅋㅋㅋㅋㅋ 뼈 있는 농담 ㅋㅋㅋ
└└└└ 그래그래 그 정도 마주쳤으면 이제 사랑할 때도 됐다
강인한은 계속 걷는다.
오늘은 차를 집에 두고 온 강인한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하지만, 그날은 계속 걷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식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거렸다.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 봐도 돼요?」
어느새 옆에 선 이윤수가 물었다.
「안 돼요.」
냉정한 목소리.
「저 여자분 누군데요?」
하지만 이윤수는 물러서지 않는다. 강인한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슬슬 손이 시릴 즈음에 하늘을 보니.
「어, 눈 온다.」
새하얀 눈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강인한은 잠시 떨어지는 눈을 바라본다. 지나간 사랑에 갇혀 살았던 강인한은 오늘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떨어지는 눈.
헤어졌을 때도 눈이 내렸고 마음을 정리한 순간에도 눈이 내렸다.
「궁금해요?」
강인한이 고개를 돌려 이윤수를 보았다.
「근데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서 술을 마셔야 하는데.」
「네?」
「날 감당할 수 있겠어요?」
눈이 내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있다. 이윤수는 당황한 듯 입을 벌리고 있고 강인한은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뭐.」
짧게 생각한 이윤수가 입을 열었다.
「까짓거, 두 번 못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