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76화 (76/175)

76. 시한부 아빠(가제)

「작가님, 이거 맛있는데 드실래요?」

‘노예식당’ 7회 선공개 영상은 유수한 다정 모음집이었다.

소소한 장면을 하나하나 모아서 만든 영상으로, 출연자를 관심 없이 바라본다면 만들 수 없는 영상이었다.

「맛있죠? 더 드세요.」

유수한은 ‘노예식당’에서 말 그대로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였다. 제작진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고 미션에서도 강한 편이었으며 일도 착착 잘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은 주로 먹는 거에 쓰던 유수한이었다.

- 저거 뭔데 저렇게 맛있게 먹어?

└ 파인애플 석가래.

- 유수한 과일 중독인가? ㅋㅋㅋㅋ 맨날 시장 가서 과일 사 먹더라

└ ㅋㅋㅋㅋㅋ ㅁㅈ

└└ 심지어 맛있게 먹음... 위꼴...

- 나도 줘 나도 입 있어 난 먹여 줘

└ 자라

└ 2222 좀 자라

과일을 스태프에게 나눠 주는 모습을 시작으로 유수한의 다정한 모습들이 등장했다. 비가 오는 날, 윤지우와 함께 우산을 쓴 유수한의 어깨가 젖어 있었다. 단순한 배려였다. 윤지우는 여자였고 노예 중에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배려였다.

- 유수한 어깨 젖은 거 존나 멋지다

└ 어깨 태평양이야 뭐야

└└ 어깨 넓어서 더 젖은 듯

└└└ 진심 남자다 남자 ㅋㅋㅋㅋㅋㅋ

여자들은 사소한 모습을 좋아한다. 유수한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모습이었지만, 여자들에게는 의미가 다르게 전달되는 듯했다.

「형, 제가 설거지 마무리할게요. 쉬세요.」

다음 장면은 영업을 마무리하고 가게를 정리하던 순간이었다. 하루 종일 같이 고생했지만, 유수한은 일을 찾아서 하는 성격이었다. 그저 조이수가 설거지를 하려 하기에 대신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조이수는 선배였고 불 앞에서 하루 종일 일하느라 고됐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야, 얼마 안 남았는데 내가 할게.」

「괜찮아요. 어서 쉬세요.」

조이수는 땀에 절어 있었고 못 이기는 척 고무장갑을 유수한에게 주었다. 유수한은 아무 말 없이 설거지를 했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 미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생겨서는 설거지 존나 잘하네 ㅋㅋㅋㅋ

└ 마지막에 물기까지 싹 닦는 거 완벽하다

└└ 아니 금수저라서 일 못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갓벽함?

└└└ 22 ㅇㅈ 얼굴도 갓벽 집안일도 갓벽 역시 내 남편감이다

└└└└ ???? 뭔솔? 유수한 제 남잔데요?

└└└└└ 미친 것들아 취했으면 잠이나 자라

하다 하다 이제는 설거지 잘하는 것도 칭찬받는다. 생각보다 쉽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일은 굉장히 쉽다고 느껴졌다. 그저 조금 더 움직이고 더 생각하고 배려하면 되는 일이라, 유수한에게는 그 무엇보다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이거 좋아하니?」

마지막 장면은 편집됐던 영상이었다. 7회 선공개 영상에는 지난 회차에서 보여 주지 못한 미공개 컷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업 중에 꼬마 손님이 울고 있었고 그걸 달래기 위해 유수한이 사탕을 들고 나타났다.

「이걸 먹으면 달콤해서 기분도 좋아질 거야.」

능숙한 영어.

우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다정하게 말하는 유수한의 모습은-

- 저 응애에요 옵하 저 응애 응애 저도 울어요 사탕 주떼요

└ 거기 119죠? 여기 미친 사람이 있어서요

└└ 119는 무슨 112를 불러야지 이 사람아 ㅡㅡ

└└└ 119든 112든 당장 보내 어디든 ㅋㅋㅋㅋㅋㅋ

- 와 씨, 나도 오늘부터 애기다. 유수한 앞에서는 애기가 될 거다

└ 중증이다 ㅋㅋㅋㅋ

└└ 음, 애기는 애기네 쓸애기?

수많은 사람들을 애기로 만들었다.

- 우리 그이가 애기를 좋아하죠? ^^ 요즘 노력 중이에요.. 후훗

└ ?????

└└ 여기 또 미친 애 있네

└└└ 저기요 아프시면 약을 드시고 주무세요 제발 쫌!

└└└└ ??? 제 그인데요? 뭔솔???

반응을 보며 영상을 보니 꽤 재밌다.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서 더 즐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 유수한 영어 발음 개 쫠깃하지 않니?

└ ㅇㅇㅇㅇㅇㅇㅇㅇ 존나 쫠깃해서 개 섹시해

└└ 영어 할 때마다 내 맘속에 숨어 있는 흑염룡이 막 눈을 뜰라 함!!!

└└└ 진짜 존나 킹정 말로 다 할 수 없는 쫄깃함이야

└└└└ 댓글 다 받음 ㅇㅈ

영어 잘하는 것도 매력인가 보다.

어느새 3분가량 짧게 편집된 선공개 영상이 끝났다. 원래 선공개는 딱 구미를 당길 만한 짧은 영상이 제격이었다.

특히나, 유수한은 최근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극복했다. 그러니 다른 노예보다 더 좋은 카드였다. 물론 동정론이었으나 옛날 이미지를 생각하면 감지덕지였다.

예전이라면 당해도 싼 놈이었으니.

- 하악하악 노예식당 보고 싶다 유수한 용안 더 보고 싶음

└ ㅇㅇ 오늘 식사남녀 하는 날임

└└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보면 됨 ㅇㅇㅇㅇㅇㅇㅇㅇ

└└└ 벗뜨 오늘 식사남녀 막방임 ㅠㅠㅠㅠㅠㅠ

그렇다.

오늘 밤에는 ‘식사남녀’가 방송된다. 요즘 유수한은 주 3회, tnV에 노출되고 있으니 더더욱 주가를 올릴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었다.

* * *

[OKEN] 이정환 주연 ‘사냥개’ 8월 개봉 확정!

후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영화 ‘사냥개’의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필 영화 개봉 소식을 듣는 순간, 데스패치의 먹잇감이 되는 바람이 제대로 즐길 시간이 없었다.

김승찬은 딱히 말은 없었지만, 못내 걱정하는 눈치였다. 지난 작품을 히트치고 나름대로 성공한 감독이라고 평가받았어도 그다음 작품 역시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계속 성과를 내야만 감독으로서 위치를 굳힐 수 있다.

요즘 유수한은 다시 순항 중이다.

드라마 ‘식사남녀’는 드디어 10% 벽을 깼고 예능 ‘노예식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요즘은 포인트를 쓸 일이 없어서 본품 구매를 위한 포인트를 모으는 일도 수월해졌다.

5월 중순.

마지막 6개월 체험판 연장 상품을 샀고 틈틈이 포인트를 쌓은 결과.

[라이프 체인지]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495>

1,000 포인트의 절반 가까이를 모을 수 있었다.

순조로웠다. 이렇게 순조로워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자.”

그래야 포인트를 더 수확할 수 있으니.

유수한은 이제 본격적으로 차기작을 고르고 있었다. 눈에 띄는 대본은 따로 챙겨 두었다. 금빛이 아니더라도 평균은 하는 작품을 골라 놔야 했다.

“초반에 운이 좋았지.”

처음을 운 좋게 금빛 대본으로 시작했고 지금 특별출연하는 영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빛이었다.

작품 보는 눈.

그건 유수한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능력이었다. 적어도 최악은 면할 수 있다. 지뢰를 피하고 좋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배우로서 얼마나 좋은 능력인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배우여도 작품이 실패하는 경험을 최소 한 번은 겪으니까. 그렇기에 유수한은 나름대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음.”

대본 하나를 손에 든다.

[MBS 스페셜 <시한부 아빠(가제)> / 정은택 감독 ‧ 안혜진 작가]

장편 드라마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막극 형식의 짧은 드라마도 아니었다. 6부작. 애매한 분량의 대본이었고 색은 초록빛이었다. 짧게 시놉시스를 읽어 본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 가까스로 버티며 살아가던 한 남자는 어느 날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여기까지는 생각보다 무난하면서도 익숙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시한부 설정을 가진 아빠는 자주 등장했었으니까.

[가족도 없이 외로움에 치를 떨며 살던 그 남자의 소원은 가족을 갖는 일이었다.]

차분히 시놉시스를 읽었다.

[6개월. 짧은 시간 동안 입원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토록 가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던 해외여행도 가 보고. 마셔 보고 싶었던 값비싼 위스키도 마셔 보고. 사고 싶었던 옷도 사 본다. 하지만 진정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그는 늘 공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본격적인 내용이 나오려는 모양이다.

[그는 30년 전으로 돌아갔다.]

판타지가 섞인 내용이었다.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배가 불룩 튀어나왔던 볼품없는 모습과 다르게 젊은 청년이 거울에 보였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남자는 기뻐한다.]

그리고.

마주하게 되는 현실, 아니 숨겨져 있던 진실.

[오래전 헤어졌던 여자가 남자를 찾아왔다.]

유수한이 진지한 눈으로 줄거리를 읽었다.

[작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유수한이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역시 성공 여부였다. 그렇기에 늘 금빛 대본을 찾아다녔던 유수한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공감이었다. 이 역할을 왜 하고 싶은지, 공감이 없으면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유수한은 ‘시한부 아빠’의 주인공이 꼭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하다고 느꼈다.

가족 없이 외로움에 떠는 남자.

가진 것 없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남자가 원하는 것은.

[가족. 이제 남자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가족이 더 소중해졌다. 하지만 판타지처럼 그 남자에게도 해피엔딩이 찾아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수한이 다음 장을 넘겼다.

[남자는 선택해야 한다.]

주인공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 시한부 인생에서 벗어나 다시 젊음을 되찾고 다시 인생을 찾을 기회를 얻었다.

[정든 딸은 이제 그 남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딸을 살릴 것인가?]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나를 살릴 것인가.]

* * *

오늘 밤은 tnV의 ‘식사남녀’ 마지막 회를 방송하는 날이었다.

유수한은 방송을 보기 전까지 계속 대본을 읽고 있었다. 처음 읽은 대본은 ‘시한부 아빠’였고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총 6부작.

유수한이 확인할 수 있는 대본은 5회차였다. 대본을 다 읽고 나서는 꽤 우울했다. 시한부 아빠에게 주어진 선택이 너무나 가혹해서 계속 그 감정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 대본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했기에, 차라리 외면하고픈 심정이었다. 이 드라마를 선택하게 된다면 연기를 하는 내내 그 감정에 동화되어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피하듯이 다른 대본을 읽었다. 한데, 계속 그 대본이 눈에 아른거렸다. 억지로 읽다가도 자꾸 한숨이 나왔고 멀리 치워둔 ‘시한부 아빠’ 대본이 눈에 밝혔다.

왜?

금빛도 아닌 초록빛이다.

판타지가 섞였지만 결국 신파였다.

“…….”

솔직하게 말하자면.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시한부 아빠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어떤 배우도 이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탓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유수한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널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밀어내고 있었다.

두려워서.

과거의 자신에게 사로잡힐까 봐.

“검색이나 해 볼까.”

계속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차라리 누가 캐스팅 물망에 올랐는지 확인이나 해 볼 생각이었다. 차라리 잘나가는 톱스타가 캐스팅되었다면 겸허히 그 작품을 보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예뉴스] MBS ‘시한부 아빠(가제)’ 모델 출신 배우 송은혁 캐스팅 물망

송은혁.

우연히 드라마를 보다가 봤던 배우였다. 솔직한 생각으로는 그리 연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모델 출신이었기에 얼굴도 제법 준수하고 피지컬도 좋았지만, 딱 거기에 그쳤다.

유수한은 다른 기사도 찾아보았다. ‘시한부 아빠’는 미니시리즈도 아니었기에 톱스타가 기피하는 듯 보였다.

차라리 연기 잘하는 사람이 물망에 올랐다면 모를까.

“아까운데.”

그 배우에게 가기에는 아까운 대본이었다. 어쩌면 송은혁이 이 배역에 낙점되는 순간, 초록빛이 아니라 형형한 붉은빛이 새어 나올지도 몰랐다.

“내가…….”

사실은 핑계였다.

“하면 잘하지 않을까…….”

송은혁은 핑계.

사실 유수한은 시한부 아빠를 연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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