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계약 위반
답 댓글이 하나 달렸다.
드라마에서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유수한의 모습에 정신 못 차리고 댓글을 달았던 추선영이 황급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삭제]
댓글을 지우고 작게 한숨을 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달라졌다. 노력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력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아.”
전화가 오고 있었다.
뭔가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번호였고, 방금 계약을 위반하는 댓글을 달았기에 더 기분이 이상했다.
설마 연예인이 커뮤니티 댓글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다니겠어.
“네, 추선영입니다.”
그리고.
[유수한입니다.]
난데없는 그 연예인의 전화였다.
추선영은 유수한의 개인 번호를 알지 못했다. 지금 거는 번호도 세컨폰이었다. 유수한은 개인 정보가 담긴 핸드폰 하나와 일만 사용하는 핸드폰이 따로 있었다. 지금 추선영에게 연락한 핸드폰은 일만 할 때 쓰는 핸드폰이었다.
[혹시 방금 댓글 썼다가 지우셨습니까?]
그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무슨 댓글이요?”
우선 모르는 체해 본다.
[유수한이 영어 진짜 못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댓글이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
연예인이 대형 커뮤니티를 돌며 반응을 모니터링한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말씀하세요. 화내려는 건 아니니까.]
유수한은 항상 핸드폰으로 반응을 확인한다. 대형 커뮤니티 두세 개 정도는 아이디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유수한의 개인 정보로 가입한 건 아니었고 소속사에서 모니터링하는 아이디를 따로 얻었다.
오직 일만 하기 위한 계정으로, 글을 쓰지는 못한다. 그저 모니터링 용도였다. 방송이 있거나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반응을 체크했다.
생각보다 유수한은 주도면밀한 성격이었다.
작은 반응 하나 넘기지 않았고 연기적인 부분은 특히 그랬다. 고쳐야 할 단점을 찾고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추선영이 운이 좋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하필 유수한이 그 사이트를 보고 있을 때 댓글을 달았기에.
글도 아닌 댓글인 만큼 운이 더럽게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너무 놀라서 댓글을 쓰고 말았어요.”
계약 조항에 비밀 유지가 있었다. 중도에 그만두었다고 해도 비밀 유지는 계속 지켜야 할 의무였다. 특히 유수한은 일반인도 아니고 연예인이었다.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
[조심해 주세요. 바로 삭제하셨지만, 제게는 좀 예민한 부분이라서요.]
유수한은 언어의 달인이 되었다.
물론 유수한이 [라이프 체인지] 시스템 덕분에 언어의 달인이 되었다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몸을 사려야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한순간에 변했다는 건, 역시 이상할 일이니까.
“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어요…….”
추선영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게 되셨어요?”
하지만.
궁금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물론 유수한이 영어에 통달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발음을 한순간에 바로잡기는 쉽지 않았다. 심지어 유수한은 기초도 없던 상황이었다.
[열심히 했습니다.]
유수한은 태연하다.
[노력하니 되던데요?]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추선영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어 실력이 한순간에 늘어났다. [라이프 체인지]를 모르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런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
유수한이 힘주어 말했다.
[다음에는 이런 전화가 아닌 계약 위반으로 법적 대응을 할 테니까요.]
* * *
통화를 마친 유수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세게 말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허허실실 웃는 것도 좋지만, 단호할 때는 그 누구보다 강하게 나가야 했다. 추선영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댓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도 의아할 일이었다. 영어를 전혀 못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달라지다니. 하지만 계약 조항은 살아 있고 중도에 그만두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사실은 없다.
[HOT] 집착광공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맛집광공이었던 유수한 +204
방금 1회를 끝낸 ‘식사남녀’의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유수한이 ‘노숙자’ 역할도 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는 역할도 했지만, 기본적인 이미지는 말끔했다. 잘생긴 얼굴의 실장님. 강인한 역할은 그 실장님 스타일을 고수하는 듯했지만, 사뭇 달랐다. 음식에 집착하는 그 모습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 몰랐지 유수한이 소시지 광공일 줄은...
└ ㅋㅋㅋㅋㅋㅋㅋㅋ
└└ 저 얼굴로 소시지 집착하는 거 현웃 ㅋㅋㅋㅋ
└└└ 집착광공은 광공이네 소시지에 집착하는 광공 ㅋㅋㅋㅋ
소시지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연기했다. 강인한 캐릭터는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 무엇에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음식이었다. 그러니 맛집의 소시지 반찬 하나도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 강인한 먹방 위꼴 오짐
- 헉헉 유수한 수트빨 헉헉헉헉
└ 변태임? ㅋㅋㅋㅋ
- 일할 때는 잘생겨서 눈 호강하는데 먹을 때는 존나 유치해 ㅋㅋㅋㅋㅋ
└ 일할 때는 으른 냄새 나는데 먹을 땐 애샛기임 ㅋㅋㅋㅋ
└└ ㅋㅋㅋㅋㅋ 그야 소시지 광공이니까 ㅋ
반응을 천천히 살펴본다.
- 주민하 안 어울리지 않아? 너무 도시적인 이미지라 그런가? ;;
└ 아직 1회임 더 지켜봐도 돼 ㅇㅇ
└└ 엥? 난 잘하던데?
└└└ 기존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연기는 존못은 아님
- 주민하 잘하던데 왜 그러냐 ㅋㅋㅋㅋ 강인한 꼽 줄 때 개 찰졌음 ㅋㅋㅋㅋ
└ 2222 합석은 국룰이라고 바로 써먹는 이윤수 ㅋㅋㅋㅋ
└└ 33 소시지 광공에게 질려서 치사하다고 구시렁거리는 것도 터짐 ㅋㅋㅋㅋ
└└└ 4444 주민하 안티가 많긴 해 ㅋㅋㅋㅋㅋㅋㅋ
└└└└ 55555 악역 많이 해서 색안경 끼는 사람 존많 ㅇㅇ
주민하에 대한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유수한이 느끼기에는 주민하의 연기는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민하는 도시적인 이미지가 강했고 서브 여주를 주로 했기 때문에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주민하의 본래 성격을 아는 유수한이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씩 주민하는 자신의 매력을 뽐낼 것이다. 기존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허무는 건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 이 드라마는 된다. 잘생긴 애 옆에 예쁜 애가 있고 예쁜 애 옆에는 맛있는 게 있음
└ 인정
└└ 아 오져따리
└└└ 잘생긴 애 옆에 예쁜 애도 모자라서 맛있는 게 또 있네 ㄷㄷㄷ
- 역시 배우는 얼굴이 최고야 유수한X주민하 진심 늘 새롭고 짜릿해
└ 진심 짜릿
└└ 난 얘네 시간 때부터 밀었다 얼굴합이 오진다고 ㅋㅋㅋㅋㅋ
└└└ 22 이 둘 얼굴합 진심 개지림
└└└└ 33333 잘 어울려
전체적인 반응은 좋았다.
특히 전작 ‘시간’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그걸 노리고 두 사람을 캐스팅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유수한은 핸드폰을 끄고 오랜만에 대본을 꺼냈다. 오늘 방송을 모니터 하고 단점을 수첩에 빼곡히 적어 놓았다.
누더기가 된 대본을 펼치고 하나하나 다시 확인한다. 강인한의 감정은 일정해야 했다. 음식에 집착할 때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표현할 뿐, 목소리나 어조에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소시지에 너무 집착했나?”
물론 자연스러웠다.
딱딱한 말투로 소시지 소유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앞으로 ‘식사남녀’에 많이 나온다. 음식에는 양보가 없는 남자.
늦은 시간.
유수한은 연기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눈이 내리는 날.
강인한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길에 포장마차에 들렀다. 가끔 그는 단골집에 찾아가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을 비운다. 특히 오늘 같은 눈 오는 날에는 뜨끈한 국물이 더더욱 생각났다.
「내가 지쳤어. 이제 내가 지쳤다고.」
과거 회상.
이제 2회차를 맞이한 ‘식사남녀’에는 강인한의 과거가 숨겨져 있다. 눈 오는 날에 마주한 연인. 강인한은 내리는 눈과 함께 이별을 고한 여자를 바라본다.
「내가 잘할게.」
「아니. 그 말도 이제는 지겨워.」
「지애야.」
「넌 내가 궁금은 해?」
「…….」
「난 너를 보면 늘 궁금해. 출근은 했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 그리고.」
강인한의 전 여자 친구 역할을 맡은 배우는 유수한도 알고 있는 배우였다.
「…… 날 사랑하기는 하나?」
그 목소리에 강인한이 울컥한다.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와의 미래를 늘 생각했고 계속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넌 내가 궁금하지 않잖아.」
그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과거 연인 역할로 한초원이 캐스팅됐다.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강인한의 첫사랑이자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여자였다.
다시 대면한 한초원은 역시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다. 감정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그 떨림에 유수한 역시도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어, 강 팀장이다.」
지난 일에 젖어 있던 강인한을 깨우는 술 취한 목소리.
「이모, 저 사람이 내가 말한 그 꼰대예요, 꼰대.」
꼰대?
강인한은 미간을 좁히며 난데없이 나타난 이윤수를 보았다. 이윤수는 1차로 친구들과 술을 거하게 마시고 2차로 포장마차에 들렀다.
주말에 주로 오는 포장마차였다. 이 집은 칼국수가 일품이었고 오돌뼈볶음도 끝내주게 맛있다. 입사한 지 3년 만에 이윤수는 깨달았다.
강인한 팀장과 공유하는 맛집이 꽤 많았다는 걸.
왜 요즘따라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지 모르겠지만.
「술은 그만 마시고 어여 먹고 가!」
포장마차 이모님이 이윤수를 타박한다. 서로 친한 사이인지 말에 정이 묻어났다. 이윤수는 비틀거리며 오돌뼈볶음이 담긴 그릇을 들고 강인한에게 다가갔다.
턱.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은 이윤수가 씩 웃었다.
「여기 오면 칼국수에 오돌뼈볶음을 조져 줘야 하거든요?」
「뭘 조져요?」
「근데 내가 지금 1차를 조지고 와서 배가 무지 부르네요?」
「허.」
「같이 먹어요.」
칼국수까지 가지고 온 이윤수는 이제 강 팀장하고의 합석이 익숙해진 눈치였다.
「이모! 소주는!」
「어휴, 그만 마셔!」
「에이, 이모는. 이 메뉴에 어떻게 소주가 빠지냔 말이야.」
투덜거리며 이윤수가 직접 냉장고에서 소주를 가져온다. 잔을 세팅한 이윤수가 술을 따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금요일 밤, 눈까지 내리는 퇴근길에 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강 팀장은 야근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상사라고 해도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른 직원들은 강 팀장을 힐끔 보고 조심스럽게 퇴근을 하곤 했다.
일에 미친 남자.
그리고 음식에 미친 남자 강인한이었다.
「한잔하실래요?」
이윤수가 강인한을 본다.
「됐습니다.」
강인한을 술을 못하는 남자였다. 술 한 잔만 마셔도 취기가 돌았다. 쉽게 말해 알코올 쓰레기. 술을 한 잔도 못 한다.
「이상하다.」
이윤수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지금 되게 마시고 싶은 얼굴인데?」
강인한은 그 말을 무시하고 칼국수를 먹었다.
술은 그렇다. 마음이 힘들 때 술을 찾게 된다. 술을 한 잔도 못하는 강인한도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술을 찾았다.
그 이후로는 술을 찾지 않았다. 힘들어도 꾹 참고 견딘다.
「내일 쉬는 날이잖아요.」
이윤수는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오돌뼈를 집어 입에 넣었다. 매콤함이 입 안에 가득 퍼진다. 주먹밥 위에 오돌뼈를 올리고 국물을 살짝 적신다. 한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찰진 밥알, 고소한 김과 어우러진 매콤함이 맛의 시너지를 뽐낸다.
「술은요.」
「…….」
「혼자 마시면 맛이 좀 덜해요.」
「…….」
「물론 혼술도 맛있음.」
뭐야, 그게.
술이면 다 맛있다는 거잖아.
「책임질 수 있어요?」
강인한이 술잔을 보며 말했다.
「이거 마시면 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감당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