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급구] 꽃노예 삽니다
치익.
맥주 캔을 딴다. 물론 무알코올 맥주였다. 짧았던 노예 생활을 마치고 유수한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전 촬영으로 진행했던 ‘식사남녀’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고 쉬는 중간에 예능까지 찍고 왔다.
오랜만에 고된 노동을 하고 왔기 때문에 당분간을 순수하게 쉴 생각이었다. 물론 소소한 포인트를 수확하면서.
오늘 유수한은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왔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영화관을 들렀다. 연기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 유수한에게 궁극적인 목표는 본품 구매였다.
“시작한다.”
밤 9시 40분.
본래 편성은 토요일 밤 9시 30분이었으나 오 피디 예능은 늘 광고가 완판 된다. 이것저것 광고가 흘러나오다 보면 10분 정도는 늦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스운 게 시간대가 아주 기가 막혔다.
목금은 ‘식사남녀’가 방송일이었는데, 그다음 날이 ‘노예식당’ 방송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드라마가 방영이 시작되면 금토일 내내 유수한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 유수한 tnV 직원이냐? 틀면 나오네.
이런 소리 듣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식사남녀’가 첫 방송 한 것은 아니지만, 틈틈이 예고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증거로 ‘노예식당’ 방송을 기다리면서도 ‘식사남녀’ 티저를 보았다. 앞으로의 방송 일정을 생각하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tnV 직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오프닝이 생각보다 괜찮네.”
촬영 중간에도 오 피디는 편집을 진행하고 있었다. 때때로 후배에게 현장을 맡기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때마다 가편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눈치였다.
오프닝은 노예가 된 이정환을 시작으로 조이수, 윤지우, 유수한 순으로 나왔다. 아마 노예가 된 순서 같았고 이정환은 도배를 하는 모습, 조이수는 스쿠터를 타고 장을 보러 가는 모습, 윤지우는 홍보 전단지를 그리는 모습, 유수한은 여자를 꼬시는 모습-
“잉? 난 왜 저런 모습이야?”
물론 말로는 여자를 꼬셨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문 앞에 서 있는 유수한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 순간 후광이 CG 처리되었다. 지나가던 여성들이 홀린 듯 들어오는 모습이었는데, 유수한이 보기에는 여자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튼.
- 유수한 오프닝 존잘이다 ㅅㅂ
└ 후광 CG 존나 적절하다
└└ ㅇㅈ
└└└ 존나 건실한 청년 같아 근데 존잘인게 함정 ㅋㅋㅋㅋㅋㅋ
반응은 좋았으니 됐다.
짧은 오프닝이 끝나고 본격적인 방송이 시작됐다. 1회는 유수한도 기다렸다. 제일 늦게 도착한 유수한이었기에 앞서 있었던 일들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귀로 들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유수한은 그리 상상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어서 오세요!」
첫 시작은 작은 회의실이었다.
그 안에 오 피디와 이수정 작가가 앉아 있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이정환의 소속사 대표 강수찬이었다.
「일단 기획안부터 보시죠.」
테이블에 놓인 기획안을 강수찬이 본다. 빠르게 편집되고 오 피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 이정환 씨 스케줄이 어떻게 될까요?」
「없습니다.」
「없어요?」
「네.」
「하나도?」
「네, 전혀.」
「잘됐네요.」
해맑게 웃는 오 피디의 얼굴은 가끔 굉장히 얄미웠다. 유수한도 방송이 아니라 실제로 오 피디를 만나 보고서야 알게 됐다. 이 사람이 얼마나 얄미운 사람인지.
「그럼 사겠습니다.」
「네?」
오 피디의 영문 모를 말에 강수찬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정환 씨를 사겠습니다.」
「정환이를요?」
「네.」
오 피디의 음흉한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제 노예로 사겠습니다.」
“정환 선배는 저렇게 팔렸구나.”
물론 사전에 논의된 이야기겠지만, 강수찬은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아마 오 피디는 중요한 사실을 지우고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을 론칭한다고 설명했을 것이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오 피디 예능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테고 암묵적인 출연 협의를 한 후에 미팅을 가졌을 텐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노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소속사 대표의 리얼한 반응을 이끌기 위해.
“악마 같은 사람.”
유수한이 혀를 찼다.
「저기, 오 피디. 혹시 이걸 나더러 혼자 다 하라는 거야?」
어느새 끌려온 이정환은 허름한 식당을 보며 말했다. 유수한이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환경이었다. 식당이었던 곳은 맞지만, 그대로 방치한 지 오래되어서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어 보였다. 그나마 주방에 가스레인지나 기본 여건은 제작진이 해 놓았지만, 다른 부분은 꽝이었다.
「여기 최소 도배는 해야겠는데?」
「네, 하세요.」
「테이블도 없잖아!」
「네, 사세요.」
「청소는? 청소도 혼자 해?」
「네, 그럼요.」
얄미운 양반.
오 피디는 팔짝팔짝 뛰는 이정환을 보고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하나하나 대꾸했다. 결국 이정환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우선 청소부터 시작했다. 바닥은 물론이고 천장에 붙은 거미줄을 열심히 치우는 모습, 먼지를 털어 내는 모습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와, 선배가 방도 치운 거네?”
일단 이정환은 잠을 제대로 자야 했기 때문에 숙소를 치우는 모습이 밤늦게 이어졌다. 거미줄을 치우고 먼지를 털고 바닥을 닦고. 다행히 침대나 침구는 정상적이어서 한시름 놓는 모습이 보인다.
「어때요? 할 만하죠?」
오 피디의 말에 이정환은 마시고 있던 물을 집어 던질 뻔했다. 이정환이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지, 오 피디를 붙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도저히 혼자서는 답이 안 나와.」
오 피디는 말해 보라는 듯 허허실실 웃었다.
「노예 영입 더 안 되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 피디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됩니다!」
「뭐, 뭐, 된다고?」
「네!」
「근데 왜 말 안 해 줬어?」
「안 물어보셨으니까요.」
유수한은 보았다. 이정환의 입술이 실룩거리는 것을. 그건 순간 욕을 내뱉을 뻔했다는 뜻이었다. 오 피디는 새로운 노예 영입을 설명했다. 애초에 3명 정도는 새롭게 노예를 영입할 생각이었고 이정환은 노예 대장이었다. 즉 주인님.
그 설명을 들은 이정환은 한결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고생을 혼자 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생각하신 분 계세요?」
이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이수.」
얘 놀고 있어.
그렇게 조이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분 하락 당했다.
“재밌다.”
그리고 유수한은 속 없이 웃고 있었다. 본인이 없는 동안 다른 노예들이 당하고 산 게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고생을 제일 안 한 노예가 유수한, 본인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생각보다 편집은 스피디했다.
이정환은 유수한보다 열흘이나 빨리 컨딩에 도착했고 고생도 제일 많이 했다.
하지만.
“엥?”
「다음 노예는 누구 생각했어요?」
「유수한.」
그 열흘이라는 시간은 단 40분 만에 처리되었다.
「비주얼 노예가 필요해. 지우는 남자 담당, 수한이는 여자 담당. 오케이?」
“나 벌써 나와?”
그렇다. 이정환은 고생은 대부분 편집되었다.
조이수, 윤지우 합류가 초고속으로 이루어졌고 유수한이 나오려는 순간.
“아, 광고.”
중간 광고가 흘러나왔다.
* * *
[오 피디 미친 거 아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도배하는 것도 저렇게 편집했다고? 도배가 1분도 안 나왔다고? 얘 돌았지? 어?]
중간 광고 시간.
오 피디보다 7살이나 많은 이정환은 극대노했다. 그럴 만도 했다. 물론 혼자서 고생한 시간은 사흘이었지만, 그동안 이정환은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스태프들은 고생만 시키니 보는 것도 짜증 났고 오 피디가 괴롭힐 때마다 시원하게 욕을 갈기고 싶었다.
조이수는 사흘째 되는 날 멍한 눈으로 끌려왔고, 그다음 날 윤지우 역시 울상이 되어 끌려왔다.
사흘.
혼자서 버티기에 사흘이란 시간은 꽤 긴 시간이다.
[형, 진정하세요. 오 피디에게 물어보니, 미방영분은 따로 풀 거래요. Y튜브에.]
조이수가 익숙하게 이정환을 달랬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걸 Y튜브에 푸냐고!!!]
하지만 이정환의 극대노는 멈출 줄을 모른다.
[그래도 삼촌 멋있게 나왔어요. 삼촌이 혼자서 방 도배한 거, 진짜 짱짱 멋있었는데!]
역시 이럴 때는 윤지우다.
[그으래?]
무섭게 화를 내던 이정환을 순식간에 잠재운다.
윤지우는 현장에서도 그랬다. 이정환이 요리를 하다가 순간 예민해질 즈음에, 윤지우가 기가 막히게 애교를 부렸다. 애교라기보다는 살가움이었는데, 얼음을 동동 띄운 달달한 커피로 이정환의 열을 싹 내려 주었다.
조이수도 없고 유수한에게는 더더욱 없는 센스였다.
[넵! 삼촌 덕분에 우리 모두 편하게 잤어용! 삼촌이 선풍기도 구했다니, 저 처음 알았잖아여!]
최고.
윤지우 최고다.
[네, 선배님이 최곱니다.]
유수한도 딱딱하게 거들어 보았지만, 방송이 다시 시작되면서 사늘하게 묻혔다.
「제가 오늘 화보 촬영 있다고 해서요. 그, 그게 저 거기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얼굴이 저랬구나.
여권이 툭 떨어졌을 때 표정도 가관이었지만, 부리나케 달아나는 차를 보는 유수한의 얼굴도 볼만했다. 눈이 흔들리고 유수한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 화보는 무슨 노역하러 가야지
- 유수한 존웃 ㅋㅋㅋㅋㅋ 졸라 댕청해 보여 ㅋㅋㅋㅋㅋ
- 온몸으로 현실 부정하는 거 개커엽
실시간 온에어 반응을 확인하며 방송을 본다. 유수한은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소름이 돋는데,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 ㅋㅋㅋㅋㅋㅋ CG 뭐냐 ㅋㅋㅋㅋㅋㅋ 대역 죄인 같아 ㅋㅋㅋㅋㅋ
- 표정 때문에 죄 짓고 끌려가는 거 같음 ㅋㅋㅋㅋㅋㅋㅋ
- 나 저거 알아 저거 ㅋㅋㅋ 유수한 꽃거지 때 모습이잖아 ㅋㅋㅋㅋㅋ
- 아나 ㅋㅋㅋㅋ 존나 배아파 ㅋㅋㅋㅋㅋㅋ
CG는 참 재밌다.
오 피디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포승줄로 묶인 사람으로 표현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고 당황스러워서 흔들리는 동공과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저 갈아입을 옷도 없어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어쩌다가 제가 팔려서…….」
딱하다.
유수한은 자신의 모습이 딱해서 한숨을 쉬며 맥주를 마셨다.
- 끌려가는 꽃거지... 아니다, 꽃노예네 ㅋㅋㅋㅋ
- 옷도 없고 돈도 없고 가진 건 얼굴밖에 없는 꽃노예 ㅠㅠㅠㅠㅠㅠ
- [급구] 꽃노예 살 방법 없나요?!!!!
- 나도 꽃노예 갖고 싶다!!! 너 내 노예 해라!!!
- 와씨, 꽃노예 가진 이정환 존나 부럽다 ㅅㅂ
유수한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꽃노예.
* * *
‘노예식당’에게 할당된 분량은 총 1시간 20분.
예능치고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으나 오 피디 특징이었다. 기본이 1시간이었고 길 때는 2시간 가까이 할 때도 있었다.
이정환의 노동기는 중간중간 짧게 편집되어 삽입되었고 노예 완성 팀이 구성되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꽃노예, 운동 잘하는 거 반칙 아니냐?
└ 진심 잘생긴 선배가 땀 흘리며 족구하는 거 같음
└└ 꽃선배라고 하자
└└└ 아니 왜 이렇게 잘생김? 나 진심 취향아닌데 오늘 대가리 깼어 존나 내 취향임
└└└└ 22 나도 몰랐다 알고 보니 나 유수한 좋아하더라 ㅋ
- 유수한 소년 가장인데? 혼자 3000 대만달러 벌었음
└ ㅇㅈ ㅋㅋㅋㅋㅋㅋㅋ
└└ 3333 셋이서 오 피디에게 빌빌거렸는데 유수한 오니까 싹 정리됨 ㅋㅋㅋ
└└└ 44444 은근 쎈캐야 ㅋㅋㅋㅋ
- 복근 (° ͜ʖ°)
└ 츄릅
└└ ( ͡° ͜ ͡°)
└└└ (☞ ͡° ͜ʖ ͡°)☞
여러모로 유수한의 반응이 뜨거웠다.
족구할 때 온에어가 폭발했는데, 점프를 하면서 살짝 드러난 복근에 다들 앓고 있었다. 리얼리티는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 꽃노예, 내가 과일 사줄 테니 내게 오련?
- 과일 먹을 때 심장 아프더라 무슨 햄스터처럼 먹냐?
└ 볼록 튀어나온 볼따구니 미침 도랏
└└ ㅇㅇㅇㅇㅇㅇ 그때 나 벽 부숨
└└└ ㅇㅈ 먹이 저장한 햄스터처럼 먹더라
└└└└ 옴뇸뇸뇸뇨뇨뇨뇸!!
- 수한아. 네가 귀여워서 누나 오늘 집 부쉈어 대단하지?
참 신기하다.
다 큰 성인을 어떻게 이렇게 귀엽게 봐 줄 수 있을까.
[빛유/후기] 엉엉 울오빠 왜케 귀여워요 ㅠㅠㅠㅠㅠ +5
[빛유/후기] 귀엽고 멋지고 잘생기고 훈훈하고 뭐야 이 매력 부자는? +27
[빛유/후기] 늘 느끼지만 갭 차이에 존나 치임 ㅋ
당연히 팬사이트도 난리가 났다.
사실 반응을 찾아보면 볼수록 좀 간지러웠다. 슬슬 이런 반응에도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직은 면역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빛유/후기] 근데 오늘 오토바이 이야기 나왔잖아 그거 설마 영화 얘기 아닐까? +99
오늘 방송에는 이정환의 말실수가 나왔다. 조이수가 중간에 컷했지만, 오 피디는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낸 장면이었다.
바로 오토바이.
[빛유/후기] 같이 출연하는 배우님들 영화 사냥개 나오잖아. 설마...? +158
팬미팅 때 유수한이 던진 떡밥이.
[빛유/후기] 맞다! 맞아! 맞는 거 같아!! 빛유빠들아!!!! +58
[빛유/후기] 얘들아, 수한이 피디픽이 아니라 ㅇㅈㅎ 배우님 픽이다? +107
[빛유/후기] 이게 사실이면 우리 떡밥 하나 더 늘어난 거지? +28
[빛유/후기] 설레발은 금진데 오토바이 타는 수한이 사실이면 나 기절 +98
[빛유/후기] 예능도 충분히 놀라운데 ㅋㅋㅋ 영화까지? 나도 기절 +46
팬사이트 ‘빛나는 유수한’을 펑 터트렸다.
[빛유/자유] 얘들아? 빛유빠들아? 나만 글 안 보여?????? +0
“응, 나도 안 보여.”
유수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