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64화 (64/175)

64. 어서 와, 노예는 처음이지?

“다음은 우수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유수한은 우수상을 예상하고 있었다.

복귀 후 대박을 터트리고 연기상으로는 우수상을 점치는 분위기가 많았다. 하지만 올해 SBC 대표 드라마가 ‘시간’ 외에는 전무했기에, 오히려 최우수상을 예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싫어.]

후보에 오른 유수한의 소개 영상이 전광판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사라져…….]

진지한 눈으로 자신의 연기를 바라본다. 저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이순자의 손길이 머리에 닿는 순간, 눈을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그 감정이 느껴졌다.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 순간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었다.

[이제 엄마…… 갈게.]

카메라가 다가와 유수한을 비춘다.

유수한은 자신의 연기를 몰입해서 보다가, 카메라 존재를 깨닫고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수한 오빠가 받으면 최우수상은 물 건너간 거네?”

옆에서 작게 주민하가 속삭인다.

우수상 후보가 곧 최우수상 후보였다. 유수한이 우수상을 받는다면 최우수상에서는 탈락이었고 우수상을 받지 못한다면 최우수상을 받을 확률이 올라간다.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우수상이든 최우수상이든,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떤 상이든 감지덕지였다.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제 발표하겠습니다. 2022 SBC 연기대상. 우수상 수상자는-”

꿀꺽.

우수상이든, 최우수상이든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역시 긴장은 된다.

“유수한 씨, 축하합니다.”

역시.

이변은 없다.

* * *

K엔터 대회의실.

큰 스크린에 SBC 시상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의실 테이블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놓여 있었고 다들 오물거리며 수상 소감을 말하는 유수한을 지켜본다. 유수한은 이번에는 차분히 수상 소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제게 다시 기회를 주신 이성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이성실에게 딸랑거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앞으로 더 좋은 배우가 되겠습니다.]

좋은 배우라.

이성실이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유수한이 상을 받는 건 올해가 처음은 아니었다. ‘어둠이 온다’ 영화로 데뷔해서 그 해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그때 유수한이 했던 수상 소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겉멋이 잔뜩 들었던 시건방진 소감.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지 의아할 정도였다.

“올해는 풍년이네요.”

올해 죽 쑨 드라마도 있지만, 대박 친 드라마도 있다. 소속 배우 둘이 나란히 상을 쓸어 담는 걸 지켜보는 이성실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연말 시상식 시즌이 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쉽게 말하면 성적표를 받는 날이었다. 배우를 얼마나 잘 케어했는지, 배우가 얼마나 더 높은 곳에 올라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여러모로 올해는 나쁘지 않았다.

폐급이었던 유수한이 화려하게 부활했고 소속사 에이스로 불리는 민서온은 생애 첫 대상을 앞두고 있다.

“대표님, 술 한잔하시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시상식을 보던 이성실이 미소를 지었다.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웃고 있는 유수한을 본다.

“역시 내가 사람을 정확히 본 거야.”

뒤늦게 자화자찬이었다.

민서온이 대상을 받는 것도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지금까지 속만 썩였던 자식이 상을 받으니 다른 감정이 찾아왔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하나.

지금 딱 이성실의 심정이 그랬다. 허구한 날, 사고만 쳐서 수습하느라 정신없게 만들었던 놈이 어느새 철이 들어서 사람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의심만 했다.

달라진 모습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이성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는다. 사람이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 믿는다.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유수한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했다.

“역시 대표님 최애는 유수한인가 봐.”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마케팅 팀장이 옆 사람에게 작게 속삭였다.

* * *

우수상도 받았겠다, 이제 유수한은 편한 마음으로 시상식을 구경했다. 상을 너무 많이 받아서 수상 소감도 바닥났다.

어느새 시상식은 막바지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올해도 역시 1시를 넘어가네요.”

방송사에서 이것저것 상을 만들어 낸 결과였다. 우수상 이후에 바로 최우수상 시상이 아니었다. ‘프로듀서상’이 있었고 그다음은 ‘공로상’이었다. 그 후에는 대상 후보자들의 홍보 영상이 흘러나왔고 그다음이 ‘최우수상’이었다.

“2시 안 넘기면 다행이지.”

현재 시간은 1시 33분이었다.

최우수상까지 마무리되었으니 이제는 화룡점정인 ‘대상’ 수상을 할 때였다. 유수한은 트로피를 만지작거리며 민서온을 보았다.

민서온은 담담하다. 원체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는 성향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민서온은 탄탄대로를 걸어왔고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은 배우였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대상을 손에 쥔 적은 없다. 이변이 없다면 올해 SBC 대상은 민서온의 것이었다.

“선배는 안 떨려요?”

대상은 유수한이 손에 들고 있는 우수상보다 몇 배는 좋은 상이었다. 그 질문에 민서온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조금.”

사실은 조금이 아니었다.

손을 가볍게 쥐고 있었는데, 긴장되어 땀이 나올 정도였다. 시상식에 참석하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과분하다고 생각한 상들을 받아 왔다.

하지만 역시.

대상은 느낌부터가 달랐다. 후보에 오른 배우들은 민서온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민서온의 대상 수상이 유력하다. 그 사실이 이상했고 또 기쁘면서도 묘했다. 운이 지나치게 좋았나, 그런 생각도 든다.

“오늘 언니 대상 받으면 뭐 사줄 거예요?”

벌써부터 주민하는 들떠서 회식 생각뿐이었다.

“비싼 건 뭐든.”

대상이 크긴 큰가 보다.

유수한은 평소라면 대충 대답했을 민서온이 떨리는 눈으로 진심을 다해 대답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대상 시상에는 SBC 최태호 사장과 전년도 대상 수상자 최지완 씨가 함께 하겠습니다.”

드디어 대상이다.

“대상 수상자는-”

유수한이 박수를 칠 준비를 하며 민서온을 바라보았다.

“축하합니다. 미니시리즈 ‘시간’의 민서온 씨.”

지금 민서온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유수한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오늘 받은 상은 총 5개였다. 작든 크든, 상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다면 대상은?

저 자리는 어떤 기분일까.

“언니, 진짜 멋지다.”

찰칵, 찰칵.

주민하는 어느새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유수한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로서의 동기 부여. 처음으로 시상식에 참석했고 상을 우르르 수집하듯 받았다. 아쉬운 점은 생애 딱 한 번 받을 수 있다는 신인상은 물 건너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받을 수 있는 상은 차고 넘친다. 예를 들어, 공중파 시상식뿐만 아니라 ‘천상예술대상’이라든가, 영화제 시상식도 있다.

더 높은 곳으로.

지금보다 더 높게 올라가고 싶다.

* * *

정성껏 진열한 트로피가 햇빛에 반짝거린다.

기존에 있던 트로피는 싹 치우고 직접 받은 트로피를 진열했다. 유수한은 매일 아침 진열된 트로피를 보며 마음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2023년.

아직 어색한 2023년.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크게 없었다. 정신없이 드라마 촬영을 하고, 먹은 것을 그대로 빼기 위해서 운동을 하고.

애초에 편성이 10부작이었고 사전 제작이라 어느 때보다 더 빨리 촬영이 끝났다. 아쉬운 건, 이제 배우로서 합법적으로 음식을 탐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드라마 촬영은 서서히 봄이 찾아오고 있는 3월에 끝났다.

자연스럽게 편성이 조절되었고 처음 기획했던 것과 다르게 5월 18일이 첫 방송이었다. 유수한은 달력을 보며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방송 한 달 전부터 공격적인 마케팅이 들어간다.

4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tnV의 ‘식사남녀’는 15초 짧은 티저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HOT] tnV 식사남녀 티저 공개 +98

티저는 가볍고 단순하게 이 드라마가 뭘 보여 줄지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강인한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떡볶이를 먹고 또 먹었다. 또한 튀김을 국물에 적셔 먹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윤수는 항상 술이 있었다. 떡볶이를 안주로 먹고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맛있겠다!!!! 나도 한 입만!!!

유수한은 티저 반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떡볶이는 정말 맛있었다.

- 위꼴 장난 아님 배고파

⌞ 22 이 시간에 떡볶이 돌았네

⌞⌞ 3333 맥주는 또 뭐야 존맛이겠다

⌞⌞⌞ 4444444

⌞⌞⌞⌞ 55 혼술각

이윤수는 술을 좋아하는 캐릭터라,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유수한이 맡은 강인한은 술을 못하는 사람이라 극중에서 술 마실 일은 거의 없었다.

tnV는 드라마가 이슈 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고, 예능에 진심인 방송사였다. 타 방송사에서 수집하듯 예능 피디를 줍줍하며 지금은 거대한 예능 왕국이 되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도 이상하지 않다.

“야, 민수야.”

물론 당황스러운 건 당연했다.

“민수야!”

지금 유수한은 공항에 떨어졌다. 오전에 화보 촬영이 잡혔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던 유수한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움직였기 때문에 잠시 눈을 붙였고 도착했다는 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차에서 내렸다.

툭.

차 문은 잠겼고 작게 열린 창문으로 나온 여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뭐냐?”

멍한 눈으로 여권을 주운 유수한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눈치였다. 민수는 달아났다. 그 안에 같이 타고 있던 스타일리스트 보라와 함께 멀리멀리.

그리고.

“유수한 씨 아니세요?”

멍하니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던 유수한에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홱.

고개를 돌려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유수한의 눈에 들어왔다. 여권을 든 채로 유수한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갑자기 나타난 카메라, 싱글벙글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PD와 그 뒤에 서 있는 작가들.

아.

“이거 방송이에요?”

조금씩 상황 파악이 된다.

“어? 매니저에게 얘기 못 들으셨어요?”

“무, 무슨 얘기요?”

“유수한 씨 팔렸어요!”

“네? 제가요?”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매니저가 단독으로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조금씩 느리게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건 지금 방송이었고 이 익숙한 얼굴은 그 유명한 오 피디였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대가. KBC에서 거액의 돈을 받고 tnV로 이적한 스타 예능 피디.

“제가 오늘 화보 촬영 있다고 해서요. 그, 그게 저 거기로 가야 할 것 같은데…….”

횡설수설, 우선 현실 회피를 해 본다.

“화보 촬영이고 나발이고 어서 따라오세요. 비행기 시간 다 됐어요.”

그게 먹힐 리가 없었다.

차분히 공항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여기는 공항이었고 맨몸으로 비행기를 타게 생겼다. 카메라가 팔로우하는 걸 보니 지금 벌써 촬영 중이었고, 누군가에게 팔렸다고 했으니 사전에 이야기가 오간 게 분명했다.

“근데 저 누구에게 팔린 거예요?”

조심스럽게 오 피디에게 물었다.

“그건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전 어디로 가는 건데요?”

“그건 수속하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

쉽게 알려 주지 않는다. 예전에 유수한도 오 피디가 연출한 예능을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도 오 피디는 꼬장꼬장했고 출연자에게 뭐 하나 쉽게 내주질 않았다. 뭐만 하면 안 된다고 ‘NO’를 외치던 피디였다.

“대만?”

수속을 하고 나니 행선지를 알게 된다.

유수한은 말없이 티켓을 보았다. 최종 종착지는 정확히 가오슝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또 어디론가 가야 할지도 모른다. 머리가 복잡하다. 지금 팔렸다는 말은 따로 누군가가 있다는 건데, 그 누군가의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몇 박 며칠이나?

그것도 아직 모른다. 힐끔 오 피디를 보지만, 쉽게 말해 줄 사람이 아니었다.

“저 갈아입을 옷도 없어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어쩌다가 제가 팔려서…….”

황당하다.

누군가에게 팔린 줄도 모르고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화보 촬영을 하고 나서는 아무 일정이 없어서 운동을 한 후에 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횡설수설 중인 유수한이었다.

“갈아입을 옷은 주인님이 주실 겁니다.”

“주인님이요?”

그게 또 무슨 소리야.

“네. 거액을 주고 유수한 씨를 산 주인님이요.”

그 주인님이 대체 누굴까.

유수한이 알고 있는 연예인은 몇 없었다. 단막극에 출연했던 사람들은 오 피디 예능에 캐스팅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미니시리즈? 하지만 같은 소속사인 민서온은 요즘 칩거를 하며 집순이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고 주민하는 같은 드라마에 출연 중이라 소식을 자주 듣고 있다. 더불어 최은호는 차기작을 확정 짓고 촬영 중인데?

주민하, 주민하?

그러고 보니 이 예능은 tnV다.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역시 ‘식사남녀’ 팀일까? 같은 방송사였고 첫 방송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홍보도 할 겸, 주민하를 섭외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거듭하던 유수한은 어느새 대만에 도착했고 버스를 타고 오랫동안 움직였다. 최종 목적지는 대만의 휴양지 ‘컨딩’이었다.

“어?”

유수한이 경계하며 낡은 식당에 들어간다.

그 안에도 카메라가 즐비했고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유수한의 눈이 커졌다. 생각했던 모든 추측이 산산조각 나 깨졌다.

“어서 와! 노예는 처음이지?”

앙증맞은 분홍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사내가 두 팔을 벌리며 환영했다. 그리고 유수한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정환 선배님?”

너냐, 내 주인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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