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61화 (61/175)

61. 너 나중에 나랑 영화 찍자

한겨울, 12월 중순.

유수한은 ‘식사남녀’ 드라마 촬영을 시작했고 어느새 영화 스케줄도 다가왔다. 늘 반듯한 머리에 정장 차림이 아니라 오랜만에 캐주얼 차림이었다.

한겨울임에도 장현우가 고수하는 찢어진 청바지에 검은 폴라티, 겉옷은 무스탕. 오늘 하루는 드라마 촬영 측에 양해를 구하고 온전히 영화만을 위해 사용된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일찍 촬영장에 도착한 유수한은 돌아다니며 인사를 한다.

현장에는 이미 주인공 형사 김필성 역을 맡은 이정환과 범죄 조직 ‘J’의 실체이자 보스인 장재진 역을 맡은 조이수가 현장에 와 있었다.

“어, 반가워요. 내 이름은 알지?”

이정환은 실제로도 털털한 성격이었다. 딱 보면 자유로운 영혼처럼 느껴진다. 조이수는 30대 초반으로, 연기 잘하는 젊은 배우로 유명했다. 이정환의 연기 내공이 보통이 아닌 만큼, 대적하는 그 상대역 역시 연기력이 중요했다.

“반갑습니다. 조이수라고 해요.”

가볍게 악수를 하고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영화 ‘사냥개’ 촬영은 마무리 단계였다. 액션이 가미된 영화인 만큼 두 사람은 부상을 달고 다녔다. 이정환은 팔을 걷으며 붕대를 보여 주었다.

“보이지? 까딱 잘못하면 그냥 다치는 거야. 이런 영화 찍을 때는 늘 조심해야 해.”

이정환은 유수한이 오토바이 액션을 직접 소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전문가도 힘들어하는 액션이 오토바이였다. 차라리 카 액션이 나았다. 근데 그 액션을 일반 배우가 소화한다고 하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겠습니다. 선배님.”

유수한의 담담한 말에도 이정환은 걱정을 거두지 못하는 눈치였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조이수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

“근데 이 친구 액션 잘한대요.”

“맨몸 액션은 나도 잘해, 인마!”

이정환이 조이수를 보며 힐난을 한다. 나름 이정환은 액션에 자신이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촬영을 하며 체득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쌓여도 못 하는 액션이 있었다. 조이수가 물을 마저 마시고 말을 덧붙였다.

“형, 영상 안 보셨죠?”

“무슨 영상?”

“이 친구 오토바이 타는 영상.”

“영상을 찍었어?”

“보면 납득되실걸요? 감독님이 괜히 액션 맡겼겠어요?”

유수한은 액션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액션 연기의 달인(S)]만 있다면 무슨 액션이든 수월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정환의 걱정 역시도 연기로 보여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리허설 먼저 갑시다!”

잡담을 끊는 목소리.

유수한은 가죽 장갑을 끼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가볍게 연습할 때 말고는 타지 않았던 오토바이였다. 촬영장에 준비된 오토바이는 지금까지 연습했던 기종과는 차원이 달랐다.

멋있다.

딱 봐도 멋이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와 함께 헬멧을 쓴다.

부와아아아아앙-!

우렁찬 배기음 소리를 들으며 유수한이 씩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자 아웅다웅 다툼을 벌이고 있던 김필성이 눈에 보인다.

열세에 몰린 김필성을 장재진의 부하가 둘러싸고 있었다. 가까이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오토바이를 피해 물러선다.

끼이이이익!

가볍게 슬라이딩 턴을 한 장현우가 바닥에 주저앉은 김필성을 보며 헬멧을 벗는다.

“선배, 나 기다렸어?”

원래 대사는 ‘나 좀 기다렸으려나.’였다.

뭔가 입에 딱딱 붙지 않아서 감독과 상의했던 유수한이었다. 조금 더 가볍게 툭 던지는 듯한 어투로 바꾸었는데, 기존 대사보다 더 잘 맞는 느낌이었다.

“그래, 기다렸다. 이 새끼야.”

김필성은 화낼 기운도 없는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선배는 장재진 쫓으러 가요. 한 명 정도는 감당 가능하지?”

“뭐래, 이 자식아.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여기는 어떡하고? 이 인간들 네가 다 감당하겠다고?”

“네. 충분해요.”

대형 쇼핑몰 야외 로비.

장재진의 부하가 더러 있는 공간. 김필성은 장재진을 겨우 제압했고 이제 수갑만 채우면 되는 순간, 급습한 장재진의 일당 때문에 되레 열세에 몰렸다.

그리고.

분위기 환기를 하듯 나타난 장현우.

“……그래, 너라면 괜찮겠지.”

씩 미소를 지은 장현우가 헬멧을 쓴다.

다시 시동을 걸고 슬금슬금 몰려드는 장재진 부하들을 향해 오토바이를 거칠게 몬다. 재빠른 오토바이를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장현우는 그들을 농락한다.

장현우는 그들을 놀리듯 굴다가 이내 진압봉을 들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하나둘 진압봉으로 후려치고. 빠른 오토바이에 대응을 못하던 장재진 부하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끼이이이익.

“하아.”

헬멧을 벗은 장현우가 누군가에게 다가간다.

장재진 부하 중에 가장 핵심 인물. 마약 유통은 물론 살인까지 뒷수습했던 일명 K. 김 비서였다.

“야.”

진압봉에 맞은 팔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며 장현우를 노려보는 김 비서.

“이 개새끼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김 비서를 같잖다는 듯 보던 장현우가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집어 던진다. 그 헬멧에 얼굴을 맞은 김 비서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저벅저벅.

쓰러진 김 비서에게 다가간 장현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스트라이크.”

여기까지가 장현우의 분량이었다.

자유로운 영혼 장현우는 현재 휴직 상태였다. 오늘 등장한 것도 김필성이 혼자 장재진을 뒤쫓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고 도와주러 나타난 거였다.

다시 김필성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바닥에 뒹굴고 있던 장재진의 하수인들이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현우는 현장에 없었다.

“저거 미친놈이네.”

이정환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저건 잘 타는 정도가 아니잖아?”

아무리 오토바이에 조예가 깊은 배우여도 직접 연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이정환이었다. 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며 진압봉을 휘두르는 모습은 여유가 넘쳤고 장현우와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액션뿐만 아니라 연기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캐릭터 연구를 많이 했는지, 짧은 분량임에도 장현우가 살아 있었다.

특히 오토바이에서 내려와 김 비서를 헬멧 하나로 제압하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이 녀석, 너 이놈 이리 와 봐.”

다 필요 없고 이정환은 유수한이 마음에 들었다.

“너 나중에 나랑 영화 한번 찍자.”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영화계에 알 박은 배우에게 인정받았다는 건 좋은 의미였다. 유수한의 영화 데뷔는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연예뉴스] 이정환 주연 ‘사냥개’ 크랭크업

[OKEN] 영화 ‘사냥개’ 크랭크업 김승환 감독 “촬영장은 늘 어메이징 했다!”

공식적인 촬영 종료.

유수한은 핸드폰으로 기사를 찾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영화 ‘사냥개’는 후반 작업에 돌입한다.

“거의 다 왔습니다.”

지금 유수한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움직이고 있었다. 지방 촬영이었고, 쉬는 날을 맞이한 강인한이 맛집 탐방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사전 촬영이라고 해서 스케줄이 조금은 숨 쉴 틈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매일이 촬영이었고 새벽 늦은 시간에 끝나는 일도 잦았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도 기대가 된다.

* * *

드라마 ‘식사남녀’ 촬영은 즐겁다.

지금 유수한은 기름진 탕수육과 자장면, 고기짬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음식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칼로리가 엄청나다는 거였다.

그리고.

“와, 진짜 감독님 최고!”

늘 다이어트에 집중해야 하는 여배우 주민하 역시도 들떠 있었다. 주민하 앞에는 물을 채운 고량주가 한 병 놓여 있었다. 정갈한 음식이 세팅되고 유수한은 그 음식을 갈구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자! 바로 들어갑시다!”

음식을 먹는 장면은 이미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고, 미리 협의한 것처럼 음식이 식기 전에 촬영한다.

“레디, 액션!”

카메라가 돌아가고 강인한이 된 유수한이 젓가락을 들었다.

“어떻게 여기서 팀장님을 딱 만나죠?”

바다를 보러 혼자 여행을 온 이윤수는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강인한처럼 혼자 맛집 탐방을 하러 다니는 걸 즐기는 이윤수였다.

하지만 강인한은 썩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누굴 곁에 두는 성격도 아니었고 요즘 따라 이윤수가 눈에 거슬리는 강인한이었다.

“조용히 하고 밥이나 먹읍시다.”

말 많은 이윤수를 딱 잘라 내고 강인한은 제 앞에 놓인 자장면을 비볐다. 그 눈이 빛나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윤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그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장면에만 집중한다. 음, 면발을 크게 한 입 맛본 강인한이 미간을 좁히며 감탄한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달달한 자장면을 먹는 유수한이 너무 맛있어서 짓는 리얼한 표정이었다.

“부먹? 찍먹?”

어느새 이윤수는 소스 그릇을 들고 있었다. 저 그릇을 들었다는 것은 이윤수는 부먹이라는 뜻이었다.

“찍먹.”

자장면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던 강인한이 드디어 음식을 먹으려 입을 벌린 게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에이, 드실 줄 모르네.”

“음식에 훈수 두지 말 것. 각자 개인 취향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부먹 취향은 어떡하고요?”

“그릇 하나 가져와서 부어 드시든가요.”

“정 없으시네.”

이윤수는 요즘 부쩍 강인한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 강인한 팀장이 음식에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사람이었다.

처음 시작은 회사에서 차로 10분 떨어진 곳에 있는 맛집으로 정평 난 백반집이었다. 그곳에서 회사가 아닌 장소에서 팀장님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이윤수는 반갑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에 진심인 건 이윤수도 마찬가지라 발길을 돌리지 않았고, 그게 시작이었다.

어딜 가나.

맛집이라는 곳은 강인한이 보인다.

“캬.”

고량주 한 잔을 마신 이윤수가 감탄한다.

“진짜 술 안 드세요?”

대꾸도 안 하고 강인한은 찹쌀 탕수육을 집었다. 푹, 달콤한 소스에 탕수육을 담그고 건진다. 뚝뚝 흐르는 진득한 소스를 보던 강인한이 미소를 지으며 입에 탕수육을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윤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회사에서나 그렇게 웃으면 좀 좋아요?”

재잘재잘.

강인한이 한숨을 쉬며 이윤수를 보았다.

“밥상머리에서 말 많이 하는 거 예의 아닙니다.”

“먹는데 집중 안 된다, 이거죠?”

“알면 고기짬뽕이나 먹어요.”

“사실 이게 한 입 먹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

강인한은 말이 없다.

자장면과 짬뽕을 한꺼번에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다음을 위해서였다. 배가 부르면 다음 코스를 온전히 즐길 수 없다.

“이럴 줄 알고 앞접시를 가져왔죠.”

이윤수는 면발과 차돌박이를 건져 앞접시에 덜어 냈다. 국물도 적셔 주고 씩 웃으며 내민다. 강인한 팀장은 다시금 눈을 빛내며 짬뽕을 받아 갔고 그 모습을 보는 이윤수는 그저 웃길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의 연기는 이미 전작에서 호흡을 맞춘 만큼 물 흐르듯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강인한은 다시 음식에 집중했고 이윤수도 먹방을 시작한다.

짬뽕을 후루룩 먹고 고량주로 입가심을 한다. 고작 물임에도 눈을 찡그리는 그 모습은 진짜 술을 마시는 것처럼 리얼했다.

강인한은 앞접시에 덜은 짬뽕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남은 자장면을 먹는 데 집중한다. 그렇다고 너무 허겁지겁 먹으면 곤란했다.

첫 촬영은 실수 연발이었다.

[수한 씨, 지금 노숙자 아니에요. 너무 단막극 때처럼 허겁지겁 먹으면 곤란해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떡볶이에 영혼이 팔린 탓이었다.

조금씩 자제를 하며 먹방 수위를 조절했고 지금은 강인한답게 깔끔하고 정갈한 먹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후.”

순식간에 음식이 동난다.

“잘 먹었습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강인한의 목소리.

“저도 잘 먹었습니다.”

뒤이은 이윤수의 목소리로 첫 컷이 끝났다.

두 사람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 드라마를 찍으며 유수한은 살이 조금 붙었다. 미리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다이어트를 했던 유수한이었다.

이유는 음식이었다.

칼로리 높은 음식을 먹다 보면 살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방지 차원에서 살을 뺐고 지금은 다시 돌아와 원래 체중이 되었다.

“오빠. 요즘 몸 관리 어떻게 해?”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주민하가 물었다.

“나 집 가면 러닝머신 1시간 뛰고 자.”

“나도 그래야 하나 봐. 30분만 뛰니까 효과가 영 없네.”

“1시간은 뛰어야 해. 땀복 입고.”

배우라면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1시간을 뛰더라도 촬영장에서 먹는 음식이 너무 좋아서 모든 힘든 것이 상쇄된다. 드라마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조연 배우들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국인에게 밥은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엔 먹는 시늉만 하세요!”

다시 차려진 음식.

이번에는 조금 식은 음식이다.

“레디, 액션!”

음식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식사남녀’의 사전 촬영은 순식간에 흘러간다. 먹고 또 먹고. 먹은 만큼 살을 빼기 위해 러닝머신을 뛰고 또 뛰고.

이렇게 더 체중 관리 하는 이유가 있었다. 12월에는 늘 그렇듯 중요한 행사가 하나 있다. 유수한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기도 했다.

바로.

[연예뉴스] 올해 SBC 대상은 누가 가져갈까?

시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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