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60화 (60/175)

60. 탈덕은 지능순

야심 차게 준비했던 팬미팅을 성황리에 마쳤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저녁을 먹은 유수한은 본가에서 하루를 보냈다. 늦게 일어나고 싶었지만, 운동 약속이 잡혀 있었다.

“으.”

긴장을 너무 해서 온몸이 근육통으로 욱신거렸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던 유수한이 핸드폰을 찾았다.

[빛유/후기] 팬미팅 너무 재밌었어요!!!! 진짜 너무 감동 ㅠㅠㅠㅠㅠ +3

[빛유/후기] 매일 새벽 취켓팅 참전한 보람 있다 진심 +7

[빛유/후기] 방에 티셔츠 걸어둠 ㅋㅋㅋㅋㅋㅋㅋㅋ +18

[빛유/잡담] 아니 친필로 티셔츠 전부 사인한 거 ㄹㅇ임? 사실이면 존나 부럽다... +29

침대에 누워 팬들이 쓴 글을 읽는다. 어제 팬미팅은 유수한에게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종이비행기는 색별로 하나씩 모아서 가지고 왔다. 돈 쓰지 말라는 유수한의 말대로 팬들은 돈이 크게 들지 않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빛유/잡담] 팬미팅에서 영화 이야기한 거 기억남? 그거 혹시 진짜 아님? +97

유수한은 어제 힌트 하나를 날렸다.

보도 자료가 하나도 나지 않았기에,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소식이었다. 이미 차기작 발표가 난 상황이지만, 다른 것도 있다고 팬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비밀을 지켜야 하기에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빛유/잡담] 애매하다 상황극에서 갑분 영화여서 이상하긴 했는데, 증거가 너무 없음 +27

[빛유/잡담] 그냥 한 말 같은데? 이미 식사남녀 찍기로 했는데 뭔 영화.. ㅋㅋㅋ +6

팬들이 갈팡질팡한다.

상황은 점차 그냥 한 말로 치부되는 듯했다. 유수한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볍게 씻고 옷을 챙겨 입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tnV ‘식사남녀’는 최근 캐스팅 작업을 모두 완료했다. 전체 대본 리딩 일정이 잡혔고 유수한은 슬슬 드라마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요즘 유수한은 고민되는 게 있다.

[언어 능력의 달인(S)]

처음에는 왜 이런 아이템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언어 능력과 연기는 별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끔 배역에 따라 언어 능력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가장 주로 사용하는 건 영어였고 가끔 일본어나 중국어, 희귀하게는 러시아어도 나올 때가 있었다.

그리고.

[언어 능력의 달인(A)]

등급에 따라서 성능이 달라진다. S급은 어떤 언어든 모두 포괄 가능하지만, A등급은 무작위로 3개 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운 더러우면 영어가 포함되지 않을 확률도 있다는 뜻이었다.

해서.

유수한은 최대한 공부를 통해 언어 능력을 키우려 했다. 뜻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발음에 신경 쓰며 말만 잘 내뱉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또 쉽지가 않다. 살면서 공부라는 걸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지금 유수한의 머리는 흡사 돌과 같았다.

“안녕하세요. 추선영이라고 합니다.”

급하게 언어 능력을 키워 줄 선생님을 구했다. 우선 가장 급한 영어부터 해결해야 했다. 중국어나 일본어는 잘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조금 어색해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유수한입니다.”

영어를 가르쳐 줄 선생님은 20대 중반이었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재였다. 현재는 취업 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고 있는데,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서 되레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모든 수험생이 알고 있는 유명 학원에서.

“저 이거 다 비밀인 거 아시죠?”

미리 계약할 때 비밀 조항을 넣은 유수한이었다. 배우로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고 머리가 돌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요. 저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인터넷도 잘 안 해요.”

추선영은 안심하라는 듯 밝게 웃었다.

미리 대본에서 영어 부분만 따로 모아 준비해 둔 유수한은 한글로 발음을 모두 적어 놓았다. 추선영은 영어 밑에 한글로 적어 놓은 발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기본이나 문법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니라서 편한 마음으로 온 추선영이었다.

“우선 쉬운 거부터 시작해 볼까요?”

추선영은 유수한이 준 종이를 보고 있었다. 다양한 영어가 있었고 그중에 가장 발음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문장을 골라냈다.

“이거.”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 체크한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This ramen is spicy but very delicious.(이 라면은 맵지만, 아주 맛있습니다.)”

먼저 추선영이 시범을 보였다.

천천히 억양이 어떤지, 어떻게 말해야 발음이 좋아 보이는지 알 수 있도록 다시 천천히 문장을 읽었다.

“해 볼까요?”

비장한 눈으로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연습했던 문장이었다. 영어 발음도 들어 보고 계속 연습했기 때문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디스 라면 이즈 스파이시 벗 베리 딜리셔스.”

또박또박.

영어인데 이상하게 한국어 같은 영어가 완성됐다. 순간 추선영의 얼굴이 굳었다. 분명 계속 연습했다고 들었는데, 발음이 왜 이렇게, 아니, 문제는 발음이 아니었다. 억양. 억양이 가장 문제였다.

“자꾸 중간중간 억양이 위로 올라가거든요? 우선 일단 쭉 일정하게 뱉는 연습을 하고 가다듬는 걸로 할게요.”

추선영이 다시금 시범을 보여 주었다. 처음보다 더 느리게 알아듣기 쉽도록. 유수한이 다시금 영어를 읽었다. 종이에 푹 고개를 숙인 채로 또박또박 최선을 다해서.

“아뇨! 왜 자꾸 위로 올라가요? 일단 일정하게 쭉 내뱉는 걸 연습하기로 했잖아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입과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해 볼까요?”

점점 유수한은 식은땀이 난다. 왜 자꾸 머리로는 알겠는데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했다고 하지만 이건 조금 심했다. 이제야 알았는데 유수한은 영어 울렁증이 있었다.

그건 학교 다닐 때 생긴 울렁증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낯선 영어와 친해지는 일이 힘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사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한보다 더 쉽게 영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어 수업, 갑자기 수업 도중에 지목 당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영어 지문을 읽어야 했다.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수준이라, 항상 진땀 흘렸던 유수한이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추선영은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쉬운 문장마저도 한글로 발음을 또박또박 쓴 걸 보고 이상하단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래도 가끔 영어 울렁증이 있는 사람은 기본적인 단어 하나하나를 모두 한글로 적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미안한데요. 알파벳은 읽을 줄 아시죠?”

그 말에 유수한은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추선영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어릴 적 학교에서 곤욕을 치르게 했던 영어 선생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알, 알파벳은!!!!”

유수한이 떨리는 눈으로 외쳤다.

“이번 주에 다 외웠어요!!!”

실제로 유수한은 알파벳을 읽을 줄은 알았지만, 알파벳 순서는 몰랐다.

* * *

포인트는 모래알 같다.

배우라는 직업은 왜 이렇게 필요한 게 많은지. 그리고 이 몸뚱이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왜 얼굴 잘난 것밖에는 없는지. 처음 목표는 오직 본품을 사는 것이었다. 머리가 나빠서 배우고 뭐고, 그냥 출석 포인트 차곡차곡 모으고 영화나 보러 다녀도 충분히 본품을 살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문제는 막상 연기를 시작하니, 배우라는 직업에 정이 들었다는 거였다. 팬이 생기자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고 완벽한 배우가 되고 싶었다.

[라이프 체인지] 시스템은 아무것도 없는 김대한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 1,000 포인트를 얻는 데 집중한다면 머리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사야 하나?”

결국 추선영이 백기를 들었다.

1시간 동안 가르쳤지만, 계산 끝에 못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간도 별로 없었고 대본상에 외국어가 나오는 장면은 얼마 없음에도 그랬다. 결국 추선영은 돈을 포기했고 유수한 역시도 아이템을 구입할지 고민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잘 생각해 보자.”

외국어는 1회에 몰빵되어 있었다. 초반에는 캐릭터 설명이 중요했기 때문에 강인한이 외국어 하는 장면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는 중간에 전화 통화로 일본어와 중국어를 한다. 결국 이 세 장면 때문에 100 포인트를 사용해야 하는가, 그 기로에 서 있었다.

물론 외국어를 잘한다는 건 배우에게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글로벌 시대, 동양인도 해외 진출을 많이 하는 시대였다.

특히 한국은 콘텐츠 강국이 되면서 할리우드에서도 한국 배우를 기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문제는 유수한은 그런 야심은 없다는 거였다.

할리우드 진출?

그런 건 꿈도 꾸지 않는다. 한국에서 편하게 한국어 하며 살고 싶었다. 사실 이제 그만 포인트를 착실히 모아 본품을 사고 싶다는 생각도 강했다.

그렇기에 아이템을 지르는 건 [액션 연기의 달인(S)]가 마지막일 거라고 믿었다.

“당장 다음 주가 대본 리딩.”

그 시간 동안 외국어를 마스터할 수 있을까?

당장 잘 가르친다고 소문났던 추선영도 포기한 마당에, 다른 사람이라면 유수한의 외국어 울렁증을 고칠 수 있을까?

영어 발음을 교정한다고 해도 다음 산이 존재한다. 일본어는? 중국어는? 할 수 있나? 공부 머리는 없고 지금까지 돌머리로 살아왔는데?

“현재 포인트는 192.”

쉬는 동안 포인트 쌓는 일에만 집중했다. 영화관도 자주 갔고 팬미팅을 개최하며 5 포인트도 수확했다. 운동도 하면서 차곡차곡 모인 포인트에 연말에 시상식을 통해 대거 포인트를 뽑아 낼 생각이었다.

“지금 6개월 연장 상품이 하나 남았고 3개월은 세 개. 1개월짜리는 10개나 남아 있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도박을 한다고 생각하고 S등급이 아니라 [언어 능력의 달인(A)] 사는 게 나을지, 그 부분도 고민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S등급이 아니면 답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할걸…….”

그런 고민도 부질없었다. 김대한 시절에는 입에 풀칠하는 게 가장 시급했다. 독립할 때를 생각해서 작은 돈이라도 모아야 했고 공부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그렇다고 타고난 머리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으니.

지나간 세월에서 김대한은 늘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러니, 공부를 하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가지는 것은 옳지 못했다. 치열하게 살았던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니까.

“나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데.”

톱스타?

되면 좋겠지만, 지금 이대로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좋았다. 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고 싶은 배역을 마음껏 하며 살고 싶다. 일 벌이는 건 딱 질색이었고 해외 진출은 별로 관심도 없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이대로 죽어라 노력해서 언어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그 상태에서 ‘식사남녀’ 연기를 시작하게 된다면?

[연예뉴스] 유수한 영어 발음 논란 …… 쉬운 단어도 못 읽어서 성우가 직접 더빙해

[OKEN] 다시 떠오르던 배우 유수한, 외국어 못해서 곤욕 치러

백퍼 이런 기사가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대형 커뮤니티에서 조롱거리가 될게 분명했다.

[HOT] 유수한 영어 못해서 더빙한 거 알아? 이것도 발연기지? +1500

촬영장에서 영어를 못해서 NG가 계속 나고. 영어 울렁증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그러다 보니 외운 영어 문장도 자꾸 잊어 먹어서 피해를 끼치고. 화가 난 스태프가 NG 컷을 인터넷에 뿌린다면 대형 커뮤니티가 들썩일 것이다.

- 유수한 있는 집 아니었음? 머리 텅텅인가 보네

⌞ ㅇㅈ

⌞⌞ 애초에 머리가 썩 좋아 보이지 않음

⌞⌞⌞ 멍청한데 엘리트 연기가 말이 되냐?

⌞⌞⌞⌞ 똥멍청이

⌞⌞⌞⌞⌞ 존나 깸

분명 이런 댓글이 터져 나올 것이고 이미지는 말 그대로 요단강을 건널 것이다. 지금까지 유수한이 차곡차곡 쌓았던 이미지가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물론 이 상상은 극단적이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예전에 점점 궤도에 오르던 배우 한 명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나가, 자신의 지식수준을 그대로 드러냈다가 이미지가 망가진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 소속사에서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금했지만, 그때의 모자란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다.

[빛유/잡담] 나 이제 탈덕함 ㅇㅇ 내 배우가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음 ㅉㅉ +199

- 저도 탈덕해요

- 나도 못 버티겠음 딜리셔스도 제대로 못 읽는 배우가 어디 있냐?

- 지능 있으면 탈덕해야 함

- 탈덕 ㄱㄱㄱㄱㄱㄱ

- 탈덕은 지능순

“안 돼!”

극단적인 상상 끝에 유수한이 핸드폰을 찾았다.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쪽팔리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연예인은 작은 실수를 해도 만회할 기회가 없었다. 그 실수는 죽을 때까지 박제되어 따라다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언어 능력의 달인(S)]

멍청한 배우로 박제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아이템을 구입하시겠습니까?]

[YES] [NO]

눈물을 머금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YES]를 눌렀다.

[100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차곡차곡 모은 포인트가 날아간다.

핸드폰 화면에 아이템 카드가 날아왔다. 눈부신 빛이 쏟아지고 이내 머리에 수많은 언어가 스며 들어온다.

“This ramen is spicy but very delicious.”

이렇게 쉬웠나.

“디스 라면 이즈 스파이시 벗 베리 딜리셔스!!!!!”

고작.

“이걸 못 해서……!”

크윽.

핸드폰을 침대에 떨어뜨린 유수한이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멍청했던 유수한은 아이템 덕분에 멍청하지 않게 되었다.

근데 그 사실이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다.

“하, 나중에 해외 진출이나 할까?”

허망한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