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대본 보내 주세요
대본을 보는 일은 즐겁다.
이강은은 대본을 읽어 보고 결말이 궁금해진다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대본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괜히 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물론 이미 유수한은 절반은 이강은 피디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애초에 김승만 감독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연출할지 이미 계산을 세우고 온 듯했다. 이강은은 드라마판 ‘식사남녀’가 원작과 다른 점은 ‘한식’이라고 말했다.
낫플릭스와 계약했으니 전 세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 증거로 낫플릭스에서 한국 콘텐츠가 가지고 있는 비중과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드라마판 ‘식사남녀’의 음식은 한식이 비중의 80%를 차지할 거라고 말했다. 원작 웹툰 ‘식사남녀’는 에피소드마다 중요 포인트 음식이 두세 가지 나온다. 그 음식은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때때로는 관계를 진전시키는 매개체 노릇도 했다.
그리고.
1회를 장식할 음식은.
“분식이구나.”
한국인이라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민 음식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매운 떡볶이는 물론, 김밥과 김말이 같은 튀김도 함께 나온다. 물론 점심에 백반을 먹는 모습도 보이지만, 주요 에피소드 음식은 떡볶이였다.
“맛집을 이미 섭외했다고 했어.”
떡볶이.
맛있는 만큼 그 열량도 폭발적인 음식은 유수한이 되면서 김대한이 포기해야 했던 음식 중에 하나였다. 매운 국물 떡볶이도 좋아하지만, 달달하면서도 입에 짝 달라붙는 진득한 떡볶이도 좋아했다. 그 맛을 짧게 상상한 유수한이 입맛을 다셨다.
“1회부터 고등어조림으로 점심을 먹고 저녁으로 떡볶이에 바삭바삭한 튀김이라니.”
이강은 피디는 약속하고 또 강조했다.
유수한이 먹는 걸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음식으로 꼬드기고 있었다. 식은 음식 따위로 입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말했다. 항상 첫 컷은 따뜻한 음식으로 찍게 해 주겠다고. 유수한을 살살 꼬여 냈다.
“일은 일이야.”
작게 한숨을 쉬고 머리를 흔든다.
웹툰 ‘식사남녀’는 음식이 주였고 러브라인은 서서히 진행한다. 200회가 지나서야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주인공의 감정선은 느리고 차분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드라마는 러브라인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이강은은 이 부분을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론지은 것이 시즌1에는 러브라인보다는 음식에 중점을 둬서 원작의 느낌을 살리고 시즌2에서 두 사람의 관계성을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극을 마무리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그것도 시즌1이 잘 됐을 때 하는 소리였다.
“재밌어.”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편성 시간은 목금 밤 11시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술이 간절해지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도 많으니 혼술을 즐기는 사람도 꽤 많은데, 이 드라마는 그 포인트를 딱 짚을 작품이었다.
“맛있겠다.”
유수한은 대본을 정신없이 읽어 내린다.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입맛을 다시며 왕성한 식욕에 시달리고 있었다.
9권의 대본을 다 읽으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유수한이 동트는 걸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 이른 시간, 하지만 이강은은 직장인이었으니 출근을 준비할 시간일 터였다.
고민하던 유수한이 전화를 걸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 유수한입니다. 식사남녀 10부 대본 보내 주세요.
그 말은 ‘식사남녀’에 출연하겠다는 소리였다.
* * *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164>
어느새 11월 중순.
다시 차곡차곡 쌓여 가는 포인트와 함께 눈을 떴다. 요즘은 포인트 걱정에 대해서 한시름 놓고 있었다. 우선 12월에는 포인트를 대거 획득할 기회가 무궁무진했다.
시상식 참석만 해도 3 포인트인데, 올해 유수한은 KBC와 SBC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방송사의 연기대상이 겹치는 바람에 시간 조절이 필요했다.
SBC는 미니시리즈인 만큼 KBC는 포기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건 유수한에게는 조금 예민한 부분이었다.
KBC는 단막극이긴 했지만, 유수한에게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준 소중한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소속사와 의논한 결과, KBC는 1부에 참석하고 SBC는 2부부터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상 받을 가능성도 높았다. KBC는 다시 라이징 스타로 떠오른 유수한을 챙겨 주기 위해 단막극 상은 물론 사이드로 인기상까지 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에 맞붙은 SBC는 우수상 정도는 가뿐히 안겨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최소 두 개의 상을 기대하고 있다. 그 말은 포인트가 덩실덩실 몰려올 거라는 뜻이었다.
“왔군.”
유수한은 현관 앞에 수북이 쌓인 택배 상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팬미팅 때 팬들에게 나눠 줄 역조공 물품이었다. 팬미팅은 예매 오픈 하루 전날 팬클럽 선예매를 진행했다. 팬클럽 선예매는 말했던 것처럼 금액이 책정되어 있지 않았고 그 이후 예매는 티켓값이 만 원이었다. 그마저도 유수한은 자신의 돈으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소속사에서 말렸다. 그렇게 되면 연예인 얼굴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고.
사실 만 원 가지고도 실랑이를 벌였다. 회사에서는 최소 3만 원을 외쳤고 유수한은 만 원 이상은 안 된다고 말했다.
“자, 해 보자.”
역조공 물품은 티셔츠였다.
남녀노소 다 입을 수 있는 공용 티셔츠였고 브랜드는 A사였다. 사이즈는 모두 통일. 남성에게는 적당한 사이즈였고 여성은 루즈핏으로 입을 수 있는 100사이즈, 즉 L였다.
사이즈를 고민을 많이 했는데, 체형에 관계없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사이즈를 생각했다.
사실 사이즈 같은 경우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팬이라면 사이즈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스타가 준 선물이었으니, 입지 못하고 고이고이 모셔 둘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음.”
가볍게 종이에 사인을 연습했다.
팬미팅 장소는 대학로에 위치한 아트센터였다. 수용 인원은 오피석을 제외하면 750석이었고 유수한은 총 750벌의 티셔츠에 친필 사인을 해야 했다. 처음인 만큼 적당한 크기의 공연장을 찾았다. 또 돈도 좋지만, 손으로 직접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친필 사인을 하나하나 하게 되었다.
“해 볼까.”
손을 풀고 조심스럽게 티셔츠 포장을 뜯었다. 천천히 사인을 하고 옷을 들어 살펴본다. 나쁘지 않았다. 밑에 문구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말을 적었다. 첫 번째 문구는 감사하다는 말이었다.
딩동.
열심히 사인을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확인하니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보라가 보였다. 포장을 도와줄 귀중한 인력이었다.
“어서 와.”
물론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 두 사람에게 명품 지갑을 선물한 것이다. 요즘 유수한은 돈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김대한은 언제나 가난해서 늘 티끌을 아끼는 삶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써도 써도 돈이 바닥나지 않아서 늘 인생이 신선하고 흥미로우며 짜릿했다.
“보라가 전문가니까 옷을 개켜서 다시 비닐 포장지에 넣어 줘.”
겉옷을 벗기 무섭게 지시가 내려진다.
“민수가 옷을 받아서 상자에 담으면 돼.”
“넵.”
특히 보라는 소중한 인력이었다. 전문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옷 다루는 솜씨가 남달랐다. 거기다 미적 감각도 유수한보다 뛰어났다.
“굳이 비닐 포장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럼?”
“바로 개켜서 상자에 넣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보라가 티셔츠를 차곡차곡 개키며 말했다.
“이렇게 사인이 보이도록 접으면 보는 순간 감탄하잖아요.”
마치 유수한의 팬이 된 것처럼 감격하는 표정까지 지어 준다. 그러다가 다시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오는 보라였다.
“그러네.”
보라는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필요한 거 챙겨 왔어요.”
“그게 뭐야?”
“이렇게 옷만 덩그러니 담을 줄 알았다니까.”
큰 가방에서 꺼낸 물건은 포장할 때 사용하는 물품들이었다.
“사이즈는 얼추 맞을 거예요.”
하얀 종이를 상자에 넣는다. 그러더니 개킨 옷을 조심스럽게 넣는 보라였다. 상자 밖으로 튀어나온 종이를 옷 위로 덮으면 마치 전문가가 포장한 듯한 느낌이 살았다.
“이렇게.”
“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보라는 가끔 차가울 정도로 뚱하지만,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보라는 누굴 쉽게 도와줄 성격은 아니었지만, 받은 만큼은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매니저님이 상자에 종이 끼우세요. 상자 위로 겹쳐 놓으면 제가 알아서 개켜서 넣을게요.”
이제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다.
유수한은 사인을 부리나케 했고 보라는 빠른 속도로 옷을 착착 개켰다. 매니저는 서툰 대로 열심히 속도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대략 세 시간이 지난 후.
“얼마나 남았죠?”
세 사람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아주 많이.”
유수한이 아직도 산처럼 쌓여 있는 옷을 보며 말했다. 보라는 쉬면서도 옷을 개키고 있었다. 유수한은 열심히 일하는 두 사람을 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챙겨 온다.
“뭐 먹을래?”
“피자요.”
보라가 냉큼 대답한다. 매니저도 다른 의견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피자를 주문하고 유수한이 다시 펜을 쥐었다. 지금까지 작업한 건 총 300벌이었고 포장은 200벌가량 진행했다. 두 사람이 오기 전부터 유수한이 사인을 시작했기 때문에 조금 더 빨랐지만, 하나하나 세심하게 하다 보니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적당히 하고 다음에 와서 또 도와드릴게요.”
유수한은 쉬는 기간이었지만, 매니저나 보라는 아니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급한 건 아니었다.
“그래, 고맙다.”
유수한이 사인을 하며 마음을 표현했고 역시 두 사람은 몸서리를 치며 그 마음을 거부했다.
* * *
[연예이슈] 유수한, tnV ‘식사남녀’ 합류한 속사정은? “이강은 PD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 유수한 단독 인터뷰 전격 공개!
팬미팅 하루 전.
유수한은 미리 협의한 대로 인터뷰를 통해 ‘식사남녀’ 캐스팅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이미 김승만 PD의 만행으로 유수한이 출연을 단호하게 거부한 상황이었기에 납득이 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선택한 방법이 인터뷰였다. 최대한 진솔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실제로 이강은 피디의 진정성에 마음을 돌렸기에 거짓말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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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 불타던 tnV의 불길이 슬슬 잡히기 시작했고 새로운 연출진을 필두로 재정비에 나선 ‘식사남녀’는 기대했던 대로 미니시리즈 ‘시간’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올해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인기 드라마로 자리 잡았던 ‘시간’의 남주 유수한과, ‘시간’에서 남주를 절절히 짝사랑했지만 결국 그 마음을 접어야 했던 서브 여주 주민하의 만남은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더군다나, 전작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 ‘시간’ 덕후들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 난 예전부터 생각했어 얘네 얼굴합 개 지림
⌞ 222222
⌞⌞ 333333 없어서 못 먹음
⌞⌞⌞ 444 서사도 주옥같음 섭녀였는데 이제 여주래 ㅠㅠㅠㅠㅠ
⌞⌞⌞⌞ 555555 냉미남X냉미녀 조합
⌞⌞⌞⌞⌞ 6666666 츄릅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주민하가 캐스팅된 상황에서 내심 유수한도 합류하길 바라던 분위기가 있었다. 전작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드라마 팬이 있었기에 가능한 흐름이었다.
그리고.
“형님, 청심환 사 왔습니다.”
유수한은 생애 첫 팬미팅을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