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활활 불타는 tnV
김철민은 정중하고 간절하며 몹시 초조해 보였다. 혹시나 유수한이 거절할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미 캐스팅 작업은 꼬일 대로 꼬인 상태였다. 김철민이 생각하기에 가장 붙잡아야 할 배우는 유수한이었다.
예전 부정적인 이미지를 딛고 다시 재기에 성공한 데다 이번 일로 피해를 받은 배우였다. 사실 이렇게 찾아와 출연해 달라 말하는 것도 염치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김철민은 간절했다.
사실 이 일은 방송국도 할 말이 없다. 특히 방송국 사장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tnV 방송국 사장 김승국은 지금까지 사고를 치는 동생 김승만을 비호해 왔다.
김승만을 ‘식사남녀’ 연출 자리에 앉힌 사람도 김승국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동생이 사고를 치고 연락 두절될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 여파로 방송국 사장 자리까지 위태로웠다.
[OKEN][단독] 갑질 논란 김승만 PD, 알고 보니 tnV 김승국 사장 동생? …… 인맥 경영 비난 쏟아져
상황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갑질 논란에 예민했다. 게다가 인맥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는 논란까지 일어나며 잡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실 제가 선뜻 출연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금빛 대본이라 해도 계산이 필요했다.
이미 오늘 ‘식사남녀’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입장 표명을 한 상태였다. 아무래 연출진이 정리되었다고 해도 말을 쉽게 바꿀 수는 없었다. 특히 유수한은 논란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사건 사고 중심에 있던 배우였다. 이제야 조금씩 긍정적인 이미지로 거듭나고 있는데, 괜히 논란의 중심인 ‘식사남녀’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작품이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논란의 중심에 있고 싶지 않아서요.”
김철민 역시도 유수한의 생각을 모르지 않는다. 이미 많은 매니지먼트에서 김철민의 연락을 피하고 있었다. 되레 신인 배우를 끼워 보고자 연락이 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건 김철민이 달갑지 않았다.
“이해합니다.”
김철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확답을 달라는 건 염치가 없죠.”
모든 상황에는 순서가 필요하다. 아직 내부적인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랴부랴 입장 표명을 했고 김승만을 처리했지만, 여전히 실타래가 꼬인 상태였다. 그럼에도 유수한을 찾아오고 주민하를 찾아가는 이유는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우선 논란이 잠잠해지고 그만큼의 피드백이 tnV에서 있을 겁니다. 제대로 된 팀을 구축하고 다시는 이런 논란이 없을 거라고 약속드릴 수 있어요. 물론 이런 말 하는 것 자체가 염치없는 일이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배우 캐스팅 건은 조금 더 이슈가 잠잠해지면 공개할 예정이었다. 물론 지금은 공개할 그 무엇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팀 정비였기 때문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김철민이 아쉬운 듯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악수를 청하고 유수한은 대표실에서 나가는 김철민을 보았다.
“저 말 잘했어요?”
이성실은 이 상황에서 한발 빠져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배우의 의견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리고 유수한은 이성실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미 급한 상대는 김 국장이었고 유수한이 그 제안을 덥석 받을 이유가 없었다.
“흡족했다.”
만약 유수한이 덥석 그 제안을 받았다면 이성실이 중간에서 중재했을 것이다. 적어도 상황이 정리된 이후라면 모를까, 지금 그 제안을 받는 건 위험하다.
뚜렷이 말한 건 없지만, 유수한은 ‘식사남녀’가 못내 탐나는 눈치였다. 다행히 기다릴 줄도 안다. 어차피 급한 건 유수한이 아니라 tnV였으니.
“잘하면 사장도 잘리겠는데?”
이성실은 이번엔 낙하산 논란이 터진 tnV를 보며 말했다.
“방송국 사장이요?”
“그래. 김승만은 지금까지 빽으로 잘 먹고 잘 살던 인간이니까.”
김승국 사장은 동생이 거하게 사고를 치자 조용히 숨어 있었다. 결국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가 폭로되었고 이 일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지게 생겼다.
사실 말은 없었지만, tnV 드라마국 내부에서는 이 논란에 속 시원해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김철민은 사고 수습을 하느라 정신없지만, 다들 무능력한 낙하산에 지쳐 있었다. 배우나 작가에게만 갑질을 했을 리가 없었다. 김승만, 그는 드라마국 내부에서도 유명한 갑질 피디였다.
[연예이슈] 발 빠르게 대처하는 tnV …… 김승국 사장 책임론은 피할 수 없다
유수한은 어디까지 불이 붙을지 구경했다.
[연예토크] tnV 드라마국에 부는 칼바람 …… 살아남는 사람은 누구?
마치 팝콘을 먹는 듯한 기분으로 상황을 관망했다.
* * *
[OKEN] ‘시간’ 유수한 11월 팬미팅 개최 …… 1분 만에 매진
유수한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 나갔다.
[연예뉴스][단독] ‘갑질 논란’ ‘낙하산 논란’ …… 결국 tnV 김승국 사장 해임
활활 불타고 있는 tnV와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유수한은 팬미팅 준비를 하며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있었다.
“발성이 좋아서 다듬기만 해도 몰라보게 달라질 거예요.”
팬을 위해 뭘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했던 유수한이었는데, 노래를 직접 불러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춤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았고 차라리 노래를 부르는 게 백번 나았다.
부를 노래는 ‘겁쟁이’였다.
유수한의 팬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시점은 역시 ‘겁쟁이’를 부르면서였다. 기존 유수한의 이미지를 깨부순 귀중한 노래였다.
“좋아요. 진짜 가수 하셔도 되겠는데요?”
보컬 트레이너의 너스레에 유수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코 가수가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노래 연습을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김민수 없이 개인 차를 끌고 왔다. 사적인 일에도 매니저를 끌고 다니는 연예인이 많았지만, 유수한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한발 물러서서 ‘식사남녀’ 상황을 관망하던 유수한이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대본을 찾아 보며 차기작을 물색하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회사로 가는 이유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강은입니다.”
바로 ‘식사남녀’의 새로운 감독 이강은이 회사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강은은 ‘식사남녀’를 맡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서진 작가와 폭넓게 작품 이야기를 했고 캐스팅도 정리했다. 독불장군 성향 없이 그동안 마음이 상했을 정 작가를 최대한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연예뉴스][단독] ‘식사남녀’ 이강은 피디, 삼고초려 끝에 주민하 캐스팅!
유수한과 더불어 주민하에게도 끈질긴 구애를 했던 이강은 피디였다. 듣기로 주민하는 이강은 피디를 한번 만나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라는 말을 했었다.
처음 대면한 이강은 감독은 키는 작았다. 하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다부진 체격이었고 안경을 쓰고 있음에도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예전에 수한 씨가 보여 줄 만한 성과가 없다면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요.”
그, 그랬지.
유수한은 그런 말을 했었다. 여전히 tnV는 불타고 있는 상황이었고 더불어 ‘식사남녀’ 역시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수습할지는 이강은 피디의 몫이었고 유수한은 급할 게 없었다. 이미 전작 ‘시간’을 성공시키며 재기에 성공했고 이제는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료를 좀 가져왔는데요.”
이강은 피디가 서류를 테이블에 턱 놓았다.
“이건 저희가 어떻게 마케팅할지 정리해 놓은 문서입니다.”
유수한이 서류를 확인하는 동안 이강은 피디가 종이 백에서 대본을 꺼냈다. 한 권도 아닌 총 아홉 권이었다.
턱.
대본을 내려놓은 이강은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1차 대본 작업은 끝난 상태입니다.”
“아, 근데 10부작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금빛이 찬란한 대본을 보니 절로 손이 간다. 유수한은 대본이 총 9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의아한 듯 이강은을 보았다.
“이걸 다 보시고 궁금하면 연락 주세요.”
그 대답에 유수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있는 말투였다. 이 대본을 다 보고 나면 마지막 결말이 궁금해질 거라는 투였다.
“그리고.”
더 할 말이 있는 듯 이강은이 입을 열었다.
“시즌제입니다.”
“네?”
“처음 팀을 맡았을 때는 아무것도 되어 있는 게 없어서 막막했어요. 김승만, 이 인간은 대체 뭐 하고 살았는지. 믿을 구석은 대본이었고요. 그때 총 6회차가 나온 상태였는데, 읽을수록 이건 시즌제에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 웹툰 ‘식사남녀’는 200회차를 넘어서며 장기 연재 중이었다.
“어차피 사전 제작이고 원작에 보여 줄 이야기가 넘치니까, 작가님과 상의 끝에 시즌제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 물론 제작비나 여러 가지 여건이 필요하죠?”
이강은 피디가 미소를 지었다.
“낫플릭스 계약 따냈습니다. 덕분에 제작비 여유가 좀 생겼어요. 사실 낫플릭스 계약 건은 김승만이 진작 해결했어야 할 일인데, 그 치에게 뭘 바라겠어요.”
단 보름.
이강은 피디는 그 시간 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대본 수정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 작가님이 연출 교체된 것만으로도 사이다를 마신 기분이라며 밤새우며 작업하셨거든요. 사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글은 나올 때 쭉쭉 뽑아내셔야 한다더라구요.”
유수한은 덥석 대본을 들었다. 대충 그 내용을 살펴본다. 기본적인 결은 같았고 세세한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장면도 있었고 추가된 장면도 있었다.
“제가 왜 유수한 씨를 찾아왔을까요?”
대본에 집중하는 유수한을 보며 이강은이 물었다.
“글쎄요. 절 캐스팅하고 싶어서요?”
“맞긴 하지만, 김철민 국장님이 시켜서 그런 건 아닙니다.”
“…….”
“주민하 씨는 라디오나 예능으로 성격을 알고 있었어요. 도시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요. 또 본인이 다양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다는 생각도 강해서, 저도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죠. 하지만 유수한 씨는 ‘강인한’에 맞는 모습을 찾아냈어요.”
“찾았다고요?”
“사실 ‘강인한’ 캐릭터는 말 그대로 강한 사람이잖아요. 말도 차갑고 표정도 늘 굳어 있고. 지금까지 수한 씨가 보여 준 역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찾아냈죠.”
이강은은 캐스팅 작업을 시작하며 물망에 오른 배우들을 찾아보았다. 제일 먼저 유수한이 출연한 작품을 모두 확인했고 유수한만의 ‘강인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서를 찾아냈다.
그게 바로.
“먹방이요.”
“네?”
“최근에 단막극 찍으셨잖아요.”
유수한이 보기에 이강은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질문을 던지기 전에 본인이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었고 뭔가 계속 집중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해장국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강인한이 생각났어요.”
자기도 모르게 유수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취미라고는 먹는 것밖에 없는 강인한이 맛있는 음식을 봤을 때 도는 탐욕스러운 눈빛. 정갈하지만 빠르게, 음식을 맛있게 해치우는 강인한. 국밥을 먹고 나서 꼭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속이 편해지는 남자.”
이강은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유수한 씨를 캐스팅 안 하고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여기서 단막극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때 먹방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노숙자 역할이었고 말 그대로 허겁지겁 먹기 바빴던 유수한이었다. 물론 그 모습은 강인한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전작을 찾아보고 대입해서 이야기하는 이강은을 보니 한발 물러서 거리를 두었던 마음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수한 씨는 연기를 잘하니까요.”
결정타.
“잘생기고 연기까지 잘하면 그건 반칙 아니에요?”
배우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덧붙인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연기 칭찬에 목말라 있었다. 처음 출발선에 섰을 때 막막했던 감정이 떠오른다. 연기 선생 강철수에게 혹독하게 당하고 단막극 미팅 역시도 혹독했다. 미니시리즈 ‘시간’에선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 시간 동안 칭찬에 목말라 있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만큼 인정을 받았지만, 모자랐다. 내가 필요해서 삼고초려까지 할 수 있는 사람. 처음으로 주민하가 이해가 되는 유수한이었다.
누군가가 날 이토록 원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고양감을 주었다.
“편, 편성은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 물었다.
“내년 중순, 정확히 말하자면 여름에 편성될 듯합니다. 드라마 특성상 맛있는 음식뿐만 아니라 맥주도 자주 나오거든요. 그림 딱 나오죠? 시원한 맥주 들이켜는 모습.”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술은 좀 예민해서.”
다시 이성을 되찾은 유수한을 보며 이강은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강인한은 알쓰거든요. 알코올 쓰레기. 술 마시는 건 보통 여주입니다.”
“아, 네.”
“물론 극중에 강인한이 술 딱 한 잔 마시고 꽐라 되는 모습이 나오긴 하는데,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해 줄 겁니다. 드라마에 빠지면 그런 이슈는 이슈도 아니고요.”
이미 유수한이 뭐를 경계하는지 아는 눈치였다. 유수한은 할 말이 없는 듯 이강은을 보았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 충분했다. 보여 줄 성과, 보름 동안 이강은은 차고 넘치는 성과를 가지고 왔다.
“마지막으로 어필해 보자면요.”
이강은이 주섬주섬 새로운 무기를 날릴 준비를 했다.
“한식, 중식, 양식, 일식. 각 분야 전문가 계약했습니다. 유명 레스토랑 셰프들이요. 저는 음식에 진심이거든요.”
그 눈이 빛난다.
“먹는 거 좋아하시죠?”
반짝반짝.
“일류 셰프가 만든 따뜻한 음식.”
그 말에 순간 군침이 싹 도는 유수한이었다.
“먹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강은은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김대한이었을 때 굶어서 죽은 데다가 유수한이 되어서도 다이어트에 미쳐 살았던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