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네가 필요해
[단독] 유수한, tnV ‘식사남녀’ 캐스팅! …… 차도남 변신!
tnV ‘식사남녀’의 제작이 발표된 것은 올해 초였다. 그 전부터 기획에 참여했던 정서진 작가는 팀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김승만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김철민 국장이 중간에서 중재를 했지만, 두 사람의 신경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 연출과 작가 사이의 신경전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승만의 일방적인 악감정이었다. 김승만은 항상 그렇듯 작가의 기를 확 눌러 놓으려 했다. 정서진의 대본을 일방적으로 수정하게 하려 했고, 자신의 입맛대로 스토리를 주무르려 했다.
그리고.
[연예뉴스] [단독] 유수한, tnV ‘식사남녀’ 출연 안 해 …… 사실과 다르다
[OKEN] 유수한 측, tnV ‘식사남녀’ 캐스팅 보도에 불편한 심기 드러내 …… 출연 NO!
유수한은 가만히 있다가 벼락 맞은 심정이었다. 미팅 후에 서로 그 어떤 이야기가 없었고 도리어 서로 감정만 상한 상태였다.
“왜 이런 짓을 한 걸까요?”
아침부터 K엔터는 부산스러웠다.
tnV의 일방적인 캐스팅 보도는 유수한은 물론 회사까지 곤욕스럽게 했다. 빗발치는 기자들의 전화에 딱 잘라 ‘사실무근’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캐스팅 난항이라더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이지.”
이성실이 관련 보도 자료를 살피며 말했다.
“사전 제작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지금 캐스팅도 안 된 마당에 작가도 날아갔다더니. 김승만이 되레 궁지에 몰렸다가 무리수 둔 거지.”
그 말에 유수한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미팅 때 봤던 김승만이라면 크게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배우 앞에서 같이 일하는 작가를 깔아뭉개는 태도만 보아도 충분히 정상이 아닌 사람이었다.
“이 바닥에 꽤 오래 있었으면서 머리가 참 안 돌아간다. 이 양반도.”
이성실이 태블릿 PC를 유수한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만 건드렸으면 쥐새끼처럼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연예뉴스][단독] ‘식사남녀’ 정서진 작가 “김승만 감독과 일 안 해. 비인격적인 취급에 지쳐.” ①
김승만에게 나가떨어진 정서진 작가가 인터뷰를 했다. 심지어 3부로 구성된 인터뷰였다. 그날 정서진 작가가 김승만에게 당하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유수한이었기에, 그녀가 얼마나 할 말이 많을지 잘 알고 있었다.
[연예뉴스][단독] ‘식사남녀’ 정서진 작가 “김승만은 입맛대로 작품 휘두르는 걸 좋아해.” ②
[연예뉴스][단독] ‘식사남녀’ 정서진 작가 “유수한은 피해자. 김승만이 무례하게 내쳤다.” ③
[연예뉴스][종합] 최고의 화제작 ‘식사남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충격 진실!
정서진 작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김승만을 더 사지로 몰고 있었다. 정서진 작가는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모든 것을 터트렸다.
만약 김승만이 일방적으로 유수한 캐스팅 보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수한이 딱 잘라 입장 발표를 하며 정서진 작가가 관련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연예뉴스][단독] 주민하, “식사남녀? 주인공 안 해 본 여자애는 필요 없다더라.”
유수한에 이어서 여주 캐스팅으로 거론됐던 주민하까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마 김승만이 여기저기 찌르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대차게 김승만에게 까이고 뒤늦게 캐스팅에 관련된 이야기가 도니, 주민하 측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주민하의 노빠꾸 성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실시간 검색어 1위가 식사남녀네요.”
“그래. 2위가 김승만이고.”
“3위는 저고요.”
“4위는 정서진 작가고.”
“5위는 주민하네요.”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 이런 일로 주목 받는 건 달갑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유수한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지금 ‘식사남녀’의 대본은 붉은색이었다. 여전히 대본은 사무실에 있었고 유수한도 따로 챙겨 놓았다. 대본 색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끝은 과연 어떤 색일지 궁금했다.
* * *
tnV의 드라마국이 발칵 뒤집혔다.
김승만이 둔 무리수는 ‘식사남녀’를 넘어 방송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대중들은 김승만의 행동이 지나친 갑질이라고 보고 있었고 그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김승만은 배우는 물론 동업자나 다름없는 작가에게까지 갑질을 했다. 김승만이 tnV 소속인 만큼 갑질 논란에서 tnV가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김승만, 이 미친 새끼!”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큰 사고를 친 김승만은 현재 연락 두절이었다.
유수한 캐스팅 단독 보도를 냈을 때는 분명 연락이 됐었다. 김철민은 유수한 캐스팅이 무사히 성사된 줄 알았고 따로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설마 서로 합의가 되지 않은 일을 단독을 걸어 가며 보도 자료를 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테니까.
“아직도 연락 안 돼?”
정서진 입장 발표가 터지면서 김승만의 연락이 뚝 끊겼다. 유수한 측이 입장 발표했을 때는 아직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정서진의 인터뷰가 터지자 핸드폰을 끄고 홀연히 사라졌다.
“네. 핸드폰 꺼져 있고요. 지금 영민이가 집까지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수습하는 건 일을 터트린 당사자가 아니라 김철민이었다. 김철민은 이미 사방에서 쥐여 터지고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일단 사과문 준비해.”
“네.”
“내 이름으로 사과문 준비하고 그 내용에 연출 교체된다는 걸 명시해.”
“네.”
“가장 중요한 건 김승만 단독 행동이라는 걸 강조하는 거야.”
“네, 알겠습니다.”
김철민은 사과문 준비와 함께 연출 교체 카드를 들었다. 현재 일이 없는 피디를 정리해 놓고 누굴 넣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쉬이 그 누구도 선뜻 이 자리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감독 병크가 터졌으니, 연출에게 그 모든 시선이 집중될 터였다. 조금만 잘못해도 비난이 퍼부어질 게 뻔하다.
“어디 가세요?”
김철민이 겉옷을 입으며 짧게 대답했다.
“정 작가 찾아가 봐야지.”
“네?”
“일단 사과하고 연출 교체할 거다 운을 떼면서…….”
“아, 네.”
“설득해 봐야지.”
tnV의 기대작 ‘식사남녀’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작가였다. 물론 신인 작가야 아무리 병크가 터진 작품이라도 참여할 것이다. 이름 한 줄을 작품에 올리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근본이 흔들린 마당에 작가 교체는 위험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기획부터 참여한 정서진 작가가 몹시 필요했다.
그다음은.
“유수한 만나고 주민하도 만나 보고.”
배우들이었다.
김철민은 이미 그림을 그린 상태였다. 괜히 유수한을 데려오라 하고 주민하까지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올해 최고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SBC ‘시간’의 주연 배우. 더군다나 전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커플이었기에 더 뜻깊었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었다. 전작에서 서브 남주와 메인 여주였던 두 사람이 다음 작품에서 서로 주인공으로 만나는 일.
전작의 드라마 팬을 일부 흡수하고 화제성을 더욱 키우는 것, 그게 김철민이 그린 그림이었다.
“갔다 온다.”
사무실을 나서는 김철민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 * *
[연예뉴스][단독] tnV 드라마국 관계자 “김승만 PD 교체, 갑질 논란에 송구스럽다”
[OKEN] tnV 김철민 드라마 국장 …… ‘식사남녀’ 재정비하겠다
유수한은 회사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고를 친 김승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김철민 국장이 나서서 상황 수습을 하고 있었다.
“김철민 국장이 직접 만나러 오겠다는데, 어떻게 할래?”
tnV에서 올린 사과문을 읽어 본 유수한은 대강 상황이 그려졌다. 우선 김승만은 사고를 치고 연락 두절이 되었고 드라마 국장이 나서서 ‘식사남녀’ 팀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 국장이 여기까지 찾아온다는 건 유수한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로 보였다.
“김승만 PD의 잘못이지 방송사 잘못은 아니니까요.”
물론 그런 인간을 연출로 세운 방송사의 탓도 있었지만, 배우가 방송사를 등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번졌으니 드라마 합류 여부와 상관없이 대화는 필요했다.
“그래. 김 국장은 다행히 말이 통하는 상대야.”
김 국장은 이성실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지금 정서진 작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말했으며 괜찮으면 오늘 얼굴 볼 수 있느냐는 말을 꺼내 놓았다.
이성실도 방송사에서 올린 사과문을 보았기에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변명의 여지 없이 김승만의 잘못이었고 자격 없는 피디를 연출로 세운 방송사 역시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김 국장이 머리를 숙여 가며 저자세를 취하는 거였다.
“음.”
유수한은 대본을 말없이 보았다.
오늘 오전만 해도 붉은빛이었던 ‘식사남녀’ 대본은 어느새 초록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테이블에 대본을 내려놓은 유수한은 골몰히 생각했다.
만약 이 대본이 초록빛을 넘어 금빛이 된다면. 김철민 국장을 필두로 ‘식사남녀’ 팀이 재정비된다면…….
“대표님은 어떠세요?”
유수한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사실 김 국장님은 사과도 사과지만, 설득하러 오시는 거잖아요. 제가 ‘식사남녀’에 합류하길 바라는 눈친데.”
“그렇지. 이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잠재우는 방법은 김승만을 자르고 정서진을 복귀시킨 후 갑질 논란이 터지기 시작한 시발점인 유수한, 너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거니까.”
이성실이 팔짱을 끼며 짧게 생각에 잠겼다.
상황은 언제 급변할지 모른다. 특히 이 바닥은 더더욱 상황이 뒤틀리는 경우가 많았다. 유수한이 처음 김승만과 미팅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잘 가던 드라마가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냉정히 말하자면 아무리 잡음이 있어도 tnV ‘식사남녀’는 여전히 화제성이 좋았다. 원작인 나이버 인기 웹툰의 인기는 무시하기 어렵다. 사전 제작이라 감독이나 작가가 똥볼 차지 않는 한 작품성도 확보되어 있다. 더불어 정서진 작가가 돌아온다면 크게 문제 될 일이 없다. 방송사에서도 조금 더 신경 쓰고 조심할 테니까.
“우선 이야기나 들어 보고 판단하자.”
이성실이 유수한을 보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야.”
유수한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미 김승만이 경질된 상황이었으니 상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보고 결정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무리 케이블 방송국이어도 tnV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 이 대표님, 이런 일로 보려니 참 민망하네요.”
김 국장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앞서 정서진 작가와의 대화가 잘 풀린 듯 보였다. 정 작가는 그날 그만두면서도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했고 그동안 수입도 전무했기에 ‘식사남녀’에 거는 기대감이 꽤나 컸을 것이다. 드라마 국장까지 나서서 설득하니 정서진의 얼어붙은 마음도 녹은 게 분명했다.
“오, 수한 씨.”
김철민은 김승만과 다르게 살가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 빚진 게 있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초면에 반말하던 김승만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김철민이라고 해요. 일단 미안해요. 나도 뒤늦게 상황을 알게 돼서 뒤늦게 사과하는 거 이해 부탁합니다.”
유수한은 서글서글 웃으며 다가오는 김철민이 밉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도 피해자였다. 인맥으로 ‘식사남녀’ 연출에 꽂힌 김승만의 뒷수습을 김철민이 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앉으세요.”
대표실에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김철민은 목이 막히는지 물을 마시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 유수한 측을 만나고 나면 바로 또 주민하 소속사로 움직여야 했다.
“우선 ‘식사남녀’ 돌아가는 상황부터 말하는 게 좋겠죠?”
김철민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정서진 작가는 다시 팀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김승만은 아웃. 새로운 피디가 올 텐데, 여성 감독은 어떤지 의견을 묻고 싶어서요. 아, 물론! 출연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편하게 들어 줘요.”
계속 김철민은 누굴 연출로 앉힐지 고민했다. 가장 아끼는 후배는 이미 금토 드라마 연출 중이었고 쓸 만한 인간은 모두 할 일이 있었다. 그러다 생각한 게 여성 피디였다. 입사한 지 8년 차, 최근 단막극 스테이지에서 연출력 호평을 받은 피디였다.
“이강은 피디라고. 혹시 들어 봤나요?”
이성실은 아는 피디였고 유수한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올해 단막극 스테이지 ‘손님’ 연출하신 피디님이죠?”
이성실의 물음에 김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봉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지만, 실력 하나는 자부합니다. 우리 tnV에서 키우고 있는 피디기도 하고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대본을 본다. 어느새 대본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다른 색으로 바뀌는 일이 없었다. 일정하게 금빛. 그 말인즉슨, 이 드라마는 잘될 거라는 의미였다.
“이강은 피디 필두로 팀을 재편할 겁니다. 김승만 라인도 정리할 거고, 캐스팅 작업 역시도 다시 시작할 거구요. 그 중심에 저는-”
김철민이 떨리는 눈으로 유수한을 보았다.
“유수한 씨가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