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54화 (54/175)

54. 너 아웃

tnV 소속 감독 김승만.

그는 능력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은 위치에 있는 감독이었다. 연출력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사사건건 작가와 신경전을 벌이며 심지어 배우에게도 텃세를 부리는 감독이었다. 그런 그가 계속 작품을 맡아 연출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tnV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송사 사장의 동생이었다. tnV는 공중파에 비하면 소속 피디들의 학벌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요즘은 학벌이 중요한 세상은 아니었다. 예전과 달리 케이블 채널의 영향력이 커지며 공중파를 위협할 수준까지 올랐다.

김승만이 맡았던 드라마 중에 가장 잘된 드라마는 김동숙 작가가 집필한 작품이었다. 그때는 김동숙 작가의 파워가 원체 강한 터라 차마 김승만도 텃세를 부릴 수가 없었다. 김동숙이 하라는 대로 연출을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고집이 들어가지 않은 그 작품이 연출력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김동숙 작가에게 기로 눌린 것이 두고두고 자존심이 상했던 김승만은 그 이후로는 신인 작가나 힘이 없는 작가의 작품에만 참여했다. 그는 작품의 성공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작품을 만들어 가며 권력을 휘두르는 그 맛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그래, 내 작품에 관심이 있다고?”

유수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내’ 작품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통 ‘우리’ 작품이라고 말하지. 말 하나하나,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그의 성품을 증명하고 있었다.

“네.”

유수한은 계속 술을 권하는 김승만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그는 지금 이 자리가 공적인 일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라는 걸 망각한 듯했다.

“지금 내 작품에 주인공 하고 싶다는 애들이 널렸거든.”

거들먹거리며 김승만이 말을 이었다.

“그 누구야. 윤지형, 알지? 그 사극으로 빵 뜬 애. 걔도 하고 싶다고 찾아왔고. 서지훈도 찾아왔어. 웹툰이 원체 잘돼서 하겠다는 애들이 많아서 내가 고르고 있거든. 여주는 말할 거 있나. 주민하라고 아나? 걔 소속사랑 미팅 했는데, 난 주인공 안 해 본 여자애는 딱 질색이라.”

어쩌라는 거지.

“그래서 지금 보여 줄 게 있나? 이렇게나 하겠다고 줄 선 배우가 널렸는데.”

유수한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은 김민수는 좌불안석이 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김승만 감독에 대해 소문을 익히 들어 왔고 이성실에게도 주의를 받았다. 생각 이상으로 무례한 사람이니 최대한 말을 줄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비이성적인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글쎄요. 저도 들어오는 작품이 많아서 고르고 있던 참입니다. 이 드라마는 말 그대로 관심이 생긴 정도였구요.”

유수한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건방지네?”

그 태도가 김승만에게는 도전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럼 여길 왜 왔는데? 잘 모르나 본데, 난 시간 낭비가 딱 질색인 사람이거든. 결국 간 보러 왔다 이거 아니야?”

“그건 감독님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유수한은 보통이라면 언쟁을 피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는 태도에 참고 있던 이성이 가늘게 끊어지고 있었다.

“감독님도 결국 간 보고 계시잖습니까. 배우 이름을 거론하며 누가 괜찮을지 대놓고 간 보고 계신데, 저는 왜 간 보면 안 되는 걸까요? 제 이름을 걸고 출연하는 작품인데, 신중한 게 당연하죠.”

김민수는 눈이 커진 채로 유수한과 김승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배우 미팅을 했던 김승만은 차분하게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유수한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옛날이라면 이런 일도 없다. 배우는 그저 감독이 쓰는 도구답게 납작 엎드려야 마땅한데, 요즘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배우가 갑이었다. 특히 이름이 난 배우라면 더더욱. 배우의 몸값을 감당하기 버거워졌다. 김승만은 여전히 옛날에 갇혀 있는 인물이었고 늘 입맛대로 배우를 고르려 했다.

문제는.

이번 작품은 나이버 인기 웹툰이었고 그만큼 화제성이 좋아서 이름이 덜 알려진 신인 배우를 캐스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생각보다 건방지네?”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김승만은 오만방자하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네?”

김승만이 소주를 연거푸 들이켜며 말했다.

“너 아웃.”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재킷을 챙겨 입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문을 여는 그 순간.

“저도 더 이상 못 참겠네요.”

침묵을 지키던 정서진 작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도 감독님 아웃입니다.”

너 아웃.

* * *

정서진 작가.

KBC에서 단막극을 두 차례 집필했고 오랜 시간 동안 김동숙 밑에서 일해 왔던 작가였다. 처음 장편 드라마는 SBC에서 시작했고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입봉작 성적이 처참했기 때문에 그다음 작품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tnV ‘식사남녀’는 정서진 작가에게는 귀중한 기회였다. 탄탄한 원작이 있었고 오랜만에 글 뽑아내는 속도도 좋았다. 방송사에서 힘주는 드라마인 만큼 캐스팅 역시 화려하게 장식할 예정이었다.

“괜찮으세요?”

정서진 작가는 밖에 나오자마자 화를 삭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요즘 부쩍 담배가 늘었다. 모두 김승만 탓이었다.

잘 굴러가던 드라마가 오만방자한 김승만 하나 때문에 골로 가고 있었다.

“속은 후련해요.”

정서진이 유수한을 보며 말했다.

“지금 화병 걸리기 일보 직전이었거든요.”

유수한에게 김승만은 처음 만난 사람이었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이지만, 정서진은 지난 6개월 동안 징글징글한 김승만을 견뎌 오며 살았다.

“솔직히 잘한 짓인지 모르겠어요. 참고 또 참으면 어쨌든 작품은 나오잖아요. 극본 정서진으로. 근데 못 참겠더라고요.”

담뱃재를 툭툭 털며 정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뭐, 배우들이 줄을 서?”

기가 막힌 듯 정서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나온 배우들 있죠? 사실은 김승만 때문에 못 하겠다고 했던 배우들이에요.”

“예?”

“윤지형, 서지훈, 강수호, 그리고 주민하도 학을 떼고 도망갔는데, 저렇게 허세를 부리는 거라니까요?”

처음 tnV의 ‘식사남녀’는 분위기가 좋았다. 완성도를 위해 사전 제작을 확정 짓고 캐스팅 작업에 나섰다. 대본은 현재 절반 이상 정서진 작가가 집필한 상황이었고 캐스팅 역시도 무난하게 흘러갈 예정이었다.

문제는 김승만.

“그 인간이 다 파투 냈어요. 배우는 초장에 잡아야 한다나? 미친놈이라니까요. 이제는 소문나서 배우들이 오지도 않아요. 가끔 신인 배우나 얼굴 들이밀지. 그러니, 지금 유수한 씨에게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데, 정신 못 차렸다니까.”

그 말을 들은 유수한이 짧게 혀를 찼다. 모든 배우들에게 같은 짓을 반복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지금 나온 배우들은 모두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었다. 들어오는 작품이 없다면 모를까, 무례하고 갑질하는 감독을 만나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고생하셨어요.”

유수한이 진심을 다해 위로했다.

“작가님 대본은 정말 좋았어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모두 작가님 대본 때문이었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대본이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게 궁금했던 것도 있지만, 대본 자체의 퀄리티가 좋았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김승만이 잘릴 경우 작품은 금빛이고.

김승만이 잘리지 않고 정서진도 잘리지 않을 경우에는 초록빛.

그리고 정서진이 잘리고 김승만이 남아 있다면 붉은빛인 거다.

“그럴 만한 인간이었어.”

차에 올라탄 유수한이 질린다는 듯 혀를 찼다.

* * *

“왜 갑자기 정서진이 그만둔 거야?”

tnV 드라마국.

“캐스팅 작업은 왜 아직도 이 모양이고?”

김철민 국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드라마 ‘식사남녀’ 제작을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사전 제작인 만큼 완성도에 중점을 두었고 배우 캐스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 김 국장 귀에는 이름만 들어도 납득이 되는 배우들이 하고 싶다고 줄을 섰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단 한 명도 출연 확정을 짓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요즘 배가 불렀다니까. 정서진이 하기 싫다 그랬다고.”

김승만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럼 캐스팅은?”

“뭐, 걔네도 배가 불러서 글렀어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김승만을 보며 김철민이 화를 냈다.

“결국 지금 배우들 다 놓친 거 아니야? 윤지형, 서지훈, 강수호 날렸고. 어제는 유수한 만났다고 안 했냐? 유수한도 날렸냐? 어? 여주는? 내가 주민하 괜찮으니까 하자고 했지? 근데 지금 이게 뭐냐?”

여전히 김승만은 태평했고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건 김철민뿐이었다. 애초에 김승만이 이 드라마를 맡게 된 것부터가 미스였다. 윗선에 계속 김승만은 안 된다고 말했지만, 결국 늘 그랬던 것처럼 김승만이 능구렁이처럼 똬리를 틀었다.

김철민 역시도 김승만이 누구의 동생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참고 또 참으려고 했으나 도가 지나친다.

“주민하 박고, 유수한 들어왔으면 그림 딱 나오는 거 아니냐? 너 머리가 안 돌아가냐? 드라마 ‘시간’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커플의 재회! 딱 각 안 나오냐고.”

“아니, 안 되는 걸 어떡해? 사람이 우선 인성이 먼저 아니에요?”

“네 인성이나 좀 챙겨!”

부글부글.

김철민이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떨었다. 배우만 날린 게 아니라 작가까지 날려 버린 김승만을 어디까지 두고 봐야 할까.

예전처럼 무명이나 대중에 덜 알려진 신인 배우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방송사에서 가장 기대하는 작품인데 신인 배우 따위로 만족할 리가 없다.

더군다나 작품 기획부터 함께했던 작가가 날아갔다. 무슨 상황인지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김승만이 작가와 잘 지냈던 적은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면 김동숙뿐이었다. 김동숙은 차마 김승만이 어찌할 수 없는 거물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아무리 윗선에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어도 아닌 건 아니었다.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김철민이 전자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정서진 돌려놓고.”

“네?”

“유수한 잡아와.”

“네?”

“유수한이 한다고 하면 주민하도 따라오겠지.”

“아, 그게 무슨. 형님!”

“내가 왜 네 형님이야?”

빽만 믿고 이리저리 사고만 치는 김승만 뒤처리도 힘들다. 예전부터 김철민은 김승만이 저지르는 사고를 수습하기 바빴다. 그리고 국장이 된 지금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승만은 실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이 지나치게 많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놈이었다.

“못 하면.”

김철민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네가 아웃일 줄 알아.”

그 말에 김승만의 얼굴이 굳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김철민은 입 밖에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김승만은 머리를 숙이는 일 따위는 못 한다.

물론 김동숙 작가에게는 잘만 머리를 숙였지만, 그는 늘 급을 따지는 인간이었다. 김승만은 감독이 왕이고 배우는 감독이 쓰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도구는 자아가 없어야 했고, 도구를 쓰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단독] 유수한, tnV ‘식사남녀’ 캐스팅! …… 차도남 변신!

가장 자극적인 방법을 시도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기사를 날리면 배우가 알아서 기어들어 올 거라고 믿었다. 어차피 하고 싶어서 찾아온 배우였고, 이렇게 확정 박아 주면 오히려 좋아할 거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김승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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