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나이 많은 꼰대 빌런
[OKEN] 김승찬 감독 영화 ‘사냥개’ 10월 17일 크랭크인!
[연예뉴스] 이정환X조이수 ‘사냥개’로 뭉쳤다 …… 10월 중순 크랭크인
영화와 관련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유수한의 이름은 없었다. 극 후반에 카운터를 날릴 히든 캐릭터였기 때문에 김승찬 감독은 유수한을 대외비에 붙였다.
유수한은 특별출연이었기에 촬영도 별로 없었고 아직 일정이 잡힌 게 없었다. 지금은 팬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팬미팅 준비 중이었고, 더불어 차기작도 물색하고 있다.
“딱 눈에 띄는 게 없네.”
처음 유수한이 되었을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수한을 싫어했고 거리를 두려 했다. 더불어 회사 대표마저 유수한에게 거는 기대가 없었고 재계약 역시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본’이었다.
“애매해.”
처음에는 대본을 찾아다녔다면 지금은 알아서 시나리오를 가져다준다. 유수한은 이제 찾는 게 아니라 고를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물론 어떤 대본은 오디션을 봐야 한다거나 타 배우와 경합이 붙는 작품도 있었지만, 대본만큼은 원한다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형, 이건 어때요?”
김민수가 대본 하나를 들며 물었다.
“응, 별로야.”
똥손도 저런 똥손이 없다.
김민수가 권유한 대본은 붉은빛이 형형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들어갈 드라마가 없었고 내년 상반기도 어느 정도 캐스팅 마무리 단계였다. 대본을 이리저리 보고 있지만, 금빛은 극소수였고 대부분 붉은색이었다. 초록색도 드물었으니, 이 판에서 작품 하나가 성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아.”
김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tnV 대본 중에 괜찮은 거 있었어요.”
바로 오늘 아침에 들어왔던 따끈한 대본이었다. 김민수는 지금까지 대본에 대한 권한이 없었지만, 유수한이 다시 궤도에 오르며 위치가 소폭 상승했다.
“그래?”
“지금 가져올게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매니저 안목을 크게 믿지는 않았다. 김민수는 성실하고 착하고 부지런한 녀석이었지만, 작품을 보는 안목은 좋지 못했다. 추천하는 대본마다 모조리 붉은색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거예요!”
가끔 똥손도 금손이 될 때가 있다.
“줘 봐.”
대본을 든 유수한이 미간을 좁혔다.
“어?”
처음에는 분명 금빛이었다.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대본이라 화색이 돌았는데, 지금은 초록빛이었다. 미간을 좁히며 유수한이 대본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
“뭐지.”
갑자기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대본을 볼 때 색이 일정했다. 하지만 이 대본은 금빛이었다가 초록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붉은빛이 돌았다. 어떤 것인지 확실히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대본이었다.
지금은 다시 금빛.
“묘하네, 이거.”
유수한이 의문이 섞인 눈으로 미간을 좁혔다.
* * *
“그 정도야?”
김승찬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유수한이 오토바이 연수를 시작했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토바이 액션 자체가 까다로운 작업이라 다치지 않는 선에서 배우에게 일정 부분을 맡길 생각이었다.
“네. 솔직히 저보다 잘 타는 거 같아요.”
“그게 가능해?”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오토바이를 사랑해서 배달업을 시작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스턴트맨 최민우는 조금 허탈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오토바이를 타면서 숱한 위기에 처했다. 영화 촬영 중에 다쳐서 다시는 다리를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들었고, 라이딩을 하다가 경차와 부딪혀 골반뼈가 으스러지던 순간도 있었다. 그 숱한 위기 속에서도 최민우는 살아남았다.
위험을 감수하며 라이딩을 즐긴 만큼 자부심도 있었다. 오토바이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대한민국에서 오토바이 액션을 자신보다 잘할 사람이 없다고 믿었다.
“재능충.”
최민우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냥 어마어마한 재능충이더라고요.”
시무룩한 최민우와 달리 김승찬은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대역을 쓰지 않고도 배우가 직접 액팅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흡족한 일이 없었다. 아무리 키가 비슷한 사람을 쓴다고 해도 유심히 화면을 보다 보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영상 찍어 왔어요.”
노트북에 영상을 열고 재상 버튼을 눌렀다.
“보이세요? 저 이거 딱 한 번 시범 보였어요.”
화면에서 유수한은 커브를 돌며 속도를 내고 있었다. 기울인 몸은 아스팔트에 아슬아슬 닿을 듯했고 직선 코스에서 바로 중심을 잡으며 속력을 더욱 높였다.
“그냥 말만 하면 다 돼요.”
다음은 장애물을 넘는 모습이었다. 속도를 붙이며 장애물을 타고 올라간 유수한이 오토바이를 타고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승찬의 입도 떡 벌어졌다.
“연습 시작한 지 며칠 안 됐잖아.”
“그니까 환장하는 거죠.”
“허.”
“이런 재능충이 딱 나타나면 저 같은 범재가 얼마나 허탈해지는지 아세요?”
최민우는 기가 죽은 상태였다. 유수한에게 더한 것을 시켜 보고 싶었지만, 입을 이내 다물었다. 말하는 족족 성공하는 걸 보고 더 어려운 것을 쉽게 해낼까 봐 두려운 탓이었다.
“어디서 이런 물건을 데려온 거예요?”
“추천받았어.”
김승찬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액션 잘하는 배우 있다고 추천받았는데, 나도 몰랐지.”
이렇게 월척일 줄은.
사실 김승찬은 코앞에 촬영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잘생긴 외모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칠 정도로 실력이 좋은 ‘장현우’ 중심으로 스토리를 그려 낸다면.
“여성 팬까지 확보 가능하잖아?”
그런 계산이 나온다.
화끈한 액션과 남자들의 끈끈한 우정을 주로 그리는 김승찬은 항상 여성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난 영화가 50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한 끗이 모자랐다. 만약 유수한이 주인공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번 영화 잘되면 스핀오프 한번 하세요.”
“그으럴까아?”
아직 뚜껑을 열어 보지도 못했건만, 이미 흥행한 감독처럼 김승찬이 히죽 웃었다. 상상만 해도 좋은 눈치였다.
“원래 헬멧 쓰고 액션이었잖아요?”
최민우가 쓰린 마음을 진정하며 말을 이었다.
“아예 헬멧 벗고 하죠. 얼굴 아깝잖아요.”
대역이 필요 없는 배우였으니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 * *
[연예이슈] tnV ‘식사남녀’ …… 드라마 가상 캐스팅 화제
김민수가 가져온 대본은 ‘식사남녀’였다. 웹툰 원작으로 음식이 큰 비중을 가지는 작품이었다. 아직 편성 전이었고 드라마 판권이 팔린 후에 드라마 가상 캐스팅이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문제는 그 가상 캐스팅에 유수한은 없었다.
“대표님.”
이성실은 대본 하나를 들고 나타난 유수한을 보았다. 드라마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빠르게 영화 특별출연도 확정 지은 마당에 또 일거리를 가져오는 유수한을 이상한 눈으로 본다.
“이 드라마 관심이 생겨서요.”
유수한은 빠르게 대본을 읽어 보았다.
남자 주인공 ‘강인한’은 일에 있어서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성향을 가진 남자였다.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으며 한 번 결혼에 실패한 남자였다. 그런 강인한에게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먹는 거였다. 점심시간에 홀로 맛집을 찾아 떠나는 생활을 하던 그에게 골칫거리가 나타난다.
강인한 : 왜 저 여자가 자꾸 보이지?
혼자만의 식사 시간을 가지는 걸 좋아하는 그였기에, 맛집마다 눈에 띄는 ‘이윤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를 피하려 동선을 짜도 어김없이 맛집에서 마주치게 되고. 두 사람은 식사를 중심으로 얽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좀 쉬지 않고?”
이성실은 진심으로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다. 작년 말부터 올해까지 유수한은 제대로 쉬지 않고 달렸다. 아직 영화 촬영 스케줄이 잡히지 않았지만, 특별출연도 확정 지은 상태에서 맹렬히 달리는 모습이 걱정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갑자기 또 회까닥 돌까 봐 무섭다.
“이거 아직 편성도 안 됐다면서요. 쉴 시간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유수한이 빙긋 웃으며 대본을 건네주었다.
“나도 읽어 본 대본이긴 한데, 몇 가지 지뢰가 있어.”
이성실이 소속 배우에게 이 대본을 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작가가 바뀔 수도 있어.”
“작가가요?”
“그렇다고 작가가 지뢰인 건 아니고. 감독이 지뢰야.”
“혹시 감독님이 작가 교체를 요구한 건가요?”
“비슷해. 감독이 지나치게 대본에 관여해서 생기는 일이야. 신인 작가야 뭐, 경력 많은 감독에게 설설 길 수밖에 없다지만, 기성 작가는 다르지.”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왜 이 대본이 다양한 색을 보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듯했다.
“그만큼 이 드라마 감독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야.”
“아.”
“뭐, 항간에는 이 드라마가 그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돌고 있지만, 그게 쉽나.”
“네.”
“아무튼 작감이 싸우기 시작하면 등 터지는 건 배우 아니면 나 같은 매니저다.”
이 작품은 웹툰이 잘된 만큼 화제성도 좋았다. 벌써 홍보를 하지 않아도 대중이 스스로 가상 캐스팅을 하며 화제성을 직접 키우고 있었다. 대본 역시도 잘 빠졌다. 문제는 이 대본을 쓴 작가가 하차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유수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이 드라마 작가가 아니라 감독이 잘렸으면 하는 생각이야.”
“아.”
“하지만 그럴 확률은 거의 없지.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히트작을 수두룩하게 낸 스타 작가에게나 통하는 말이고. 권력 싸움에서 작가가 이길 확률은 거의 없어. 더군다나, 웹툰 판권은 방송사에 있으니 작가의 힘이 그만큼 약하고.”
이성실은 대표라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소속사에 들어오는 대본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성향이었다. 유수한이 가져온 대본은 출연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작가가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탄탄한 원작이 있는 만큼 흡입력 있는 글발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가 교체된다면 대본이 어떻게 될지 미지수였다.
보통 작가가 교체되면 연출은 기존 작가의 색을 작품에서 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일정하게 흐르던 방향성이 무너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작가를 교체해서 잘된 경우는 손에 꼽았다. 그만큼 작품에서 감독과 작가의 호흡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 하고 싶다면.”
이성실이 짧게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미팅 정도는 주선해 주마.”
차라리 고집을 꺾는 방법으로 직접 대면하게 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었다. ‘식사남녀’의 연출 ‘김승만’을 만나면 바로 고집을 접을 테니까.
그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상이 아니었다.
“어, 왔어? 듣던 대로 잘생겼네?”
유수한은 초면에 반말을 하는 김승만을 말없이 보았다. 그러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한다.
독립된 공간이 있는 횟집에는 김승만 감독과 정서진 작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주차를 하고 나타난 조연출까지.
“여기는 내 밑에서 일하고 있는 애고. 이쪽은 상관없는 사람이야.”
말투 하나하나가 권위적이었다.
“이제 곧 이 작품에서 없어질 사람이거든.”
그 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정서진 작가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왜 김승만이 작가와 함께 동석했는지 알 듯했다. 그는 지금 배우 앞에서 정서진 작가를 깔아뭉개기 위해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경고였다.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하면 이와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될 거라는.
“일단 한잔하지?”
유수한은 미팅 시작도 전에 취해 있는 김승만을 보며 말했다.
“저 술 끊었습니다.”
이성실은 이 작품을 반대했다. 대본이 잘 뽑혔을지언정, 작가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계속 같은 작가가 대본을 집필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왜 이성실이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 알겠다. 직접 함께 작업할 감독의 성향을 확인하고 작품을 선택할지 말지 고민해 보라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예전과 달리 유수한은 이제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굳이 지뢰가 있는 작품은 할 필요가 없다.
“왜?”
김승만이 소주를 들며 물었다.
“감독이 주면 마셔야지.”
지금까지 겪어 본 빌런은 아무것도 아닌 수준처럼 느껴졌다.
배우가 빌런인 게 차라리 나았다. 작품의 방향성을 쥐고 있는 감독이 빌런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역시.
그만두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