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엄청난 재능충인가
드라마 ‘시간’ 종영 후 유수한은 딱 하루를 쉬었다. 밀린 잠도 잤고 운동도 하고 오랜만에 강철수를 만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사냥개’의 감독 김승찬을 만났고 특별출연을 매듭지었다. 유수한은 하나하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오빠, 잘생겼어요!”
시청률 공약으로 걸었던 사인회였다.
명동 한복판에서 3시간 동안 사인을 하겠다는 공약을 걸었고, 제일 먼저 그 공약을 지키기로 했다. 명동 거리, 미리 협조를 구하고 즉석 사인회장이 꾸며졌다.
처음 명동에 도착했을 때는 거리가 한산했다. 예전에는 명동이 나름대로 핫한 거리였는데, 이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수한이 등장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저 오늘 아침부터 기다렸어요.”
이미 전날에 K엔터 공식 SNS에서 사인회 예고를 했다. 장소와 날짜는 고지했지만, 정확한 시간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침에 여기저기 카페나 식당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다.
“안 힘들었어요?”
유수한의 물음에 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는 밥 먹고 카페에 있었어요. 그리고 시작하기 전부터 번호표 나눠 줘서 편했어요!”
그 대답에 유수한이 씩 웃었다. 정확한 시간을 고지하지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몰릴 거라 예상했다. 당연히 새벽이나 아침 같은 이른 시간은 아니라도 적어도 유수한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일찍 오지 말라 해도 올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번호표였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기다리라고, 사인회장을 꾸미는 시간에 줄을 선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주었다.
“여기 선물이요!”
자잘한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이 꼭 있다.
이미 공지로 선물 금지라고 못 박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팬이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유수한은 팬들이 자신에게 돈 쓰는 걸 싫어했다. 일하면서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돈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연예인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예쁘죠?”
“티셔츠네요?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사실 브랜드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저 G로 시작하는 저 로고는 아무래도 명품 같은데. 순간 이게 얼마짜리냐고 말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 냈다.
“저도 사람이라 선물 받는 거 좋아하는데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편지만 가져와요. 저한테 돈 쓰지 마세요. 알았죠? 돈은 내가 쓸게요.”
덥석.
유수한은 팬에게 미리 준비한 조말란 향수를 주었다. 사인회에서 줄 선물을 고민했는데, 직접 뭔가 준비를 하는 건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돈이었다. 말로만 돈 쓰겠다고 하지 말고 직접 실천하기로 했다. 향수는 중성적인 향으로 골랐다. 혹시나 남자 팬이 올 수도 있을 테니.
“형.”
그리고 그 생각이 무섭게 덩치가 산만한 남성 팬이 다가왔다.
“한번 안아 봐도 됩니까?”
유수한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항상 아기자기한 여성 팬을 보다가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남성을 보는 순간, 긴장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수한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윽.”
너무 세게 끌어안아서 숨이 막힐 뻔했다.
“사실은 제 여자 친구가 팬이라서 꼭 안고 오라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지금 회사에 있어서 형 못 보러 오거든요.”
“네, 그러시군요.”
“그래서 끝나고 제가 똑같이 안아 주기로 했습니다.”
“그럼 악수도 할까요? 똑같이 악수해 주세요. 제 느낌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유수한이 손을 내밀자, 여자 친구 대신 사인회에 온 남성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근데 진짜 잘생기셨네요?”
“감사합니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했다.
“여자 친구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은지입니다.”
“네.”
사인을 하고 향수를 건네주었다.
3시간 동안 사인회는 힘들지만, 보람도 있었다. 드라마 팬도 만났고 연차 내고 왔다는 이경민도 보았다. 꽤 많은 ‘빛유’ 팬이 왔고 처음 보는 얼굴을 알아 가는 재미도 있었다.
[HOT] 오늘 성황리에 마친 유수한 사인회 후기(feat.조말란) +289
사인회를 마치고 차에 올라탄 유수한은 커뮤니티를 돌며 후기를 찾아보고 있었다.
- 나도 우연히 미팅 때문에 명동 들렀다가 운 좋게 유수한 사인 받음. 늦게 가서 번호표는 못 받고 그냥 줄 섰거든? 근데 3시간 지났는데도 다 해 주더라. 거의 5시간은 사인해 준 듯. 솔직히 요즘 유수한 다시 뜨고 있는데, 계속 색안경 꼈단 말이야. 근데 오늘 직접 만나보니까 사람이 너무 괜찮더라. 그동안 왜 사고 친 거지? 아무튼 조말란 향수도 진짜 신경 쓴 티 나고. 이러다 팬 되겠음... ㅋㅋㅋㅋ
⌞ 개 부럽다... 덕계못은 울고 갑니다 ㅠㅠㅠㅠ
⌞⌞ 맨날 돈 쓰지 말라 하더니 조말란을 뿌림 미니어처도 아님 ㄹㅇ 박스에 담긴 정품
⌞⌞⌞ 나도 요새 맨날 그 생각 함 왜 저런 사람이 그동안 사고 왜 쳤지? 진심 의문
⌞⌞⌞⌞ 영혼 바뀐 거 아니냐? 진심 다른 사람 보는 거 같음 ㅋ
⌞⌞⌞⌞⌞ 22 영혼 바뀐 거 같음
⌞⌞⌞⌞⌞⌞ 333 아님 저번에 음주 수영 논란 때 머리를 세게 박았다든가?
⌞⌞⌞⌞⌞⌞⌞ 44444 암튼 다른 사람 된 거 같음 ㅇㅇ
사람들은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유수한은 뜨끔하게 된다. 진실은 [체인지 라이프]와 유수한만 알고 있었다. 지금 유수한은 김대한이라는 사실을.
- 나 명동에서 카페하는데 어쩐지 오늘 장사 잘 되더라. ㅠㅠㅠㅠ 요즘 명동 상권 다 죽어서 장사 접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오랜만에 만석이고 테이크아웃도 잘나가고 ㅠㅠㅠㅠ 진짜 유수한에게 고마웠음 ㅠㅠ
⌞ 222 나만 느낀 게 아니었네. 나도 명동에서 장사 하는데, 무슨 일인가 했어.
⌞⌞ 3333 오늘 전체적으로 명동 활성화됐음 ㅠㅠㅠㅠ 오가는 사람 많으니까 너무 좋더라
⌞⌞⌞ 444444 진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
이런 효과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형, 돈 많이 썼는데 괜찮아요?”
“응, 괜찮아.”
어차피 지금 있는 돈은 김대한이 죽어라 모은 돈이 아니었다. 모두 죽은 유수한이 남긴 재산이었다. 애초에 유수한은 돈이 궁하지 않은 집안이었고 짧게나마 전성기 시절에 돈을 쓸어 모았다. 그 돈을 쓰는 건 정작 김대한이었다. 뭐, 상관없었다. 죽은 사람이 돈이 뭐가 필요할까.
“내일 오전에 ‘스카이 에이드’ 지면 촬영 있고요. 끝나면 바로 오토바이 연수 받으시면 돼요.”
“응, 기억하고 있어.”
슬슬 남은 스케줄도 해결해 나간다. 우선 가장 중점으로 두고 있는 건 오토바이였다. 영화 ‘사냥개’에서 장현우의 분량은 짧았지만, 오토바이 액션이 주였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배워 보려는 건데,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아이템 [액션 연기의 달인(S)]이 주는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액션이라 하면 맨몸 액션이 끝이 아니었다.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이용한 액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걸 시험하기에는 오토바이 연습장이 가장 적합했다.
“오늘 수고했어.”
차에서 내린 유수한이 매니저를 보냈다.
* * *
‘스카이 에이드’ 지면 광고 촬영장.
유수한은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 말이 어렵게 느껴졌다. 지금 유수한의 영혼은 김대한이었다. 김대한은 삶에 찌들어 공사판을 전전했고, 어렵게 모은 돈을 친구에게 털려 거리에 나앉았다. 그랬던 그가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눈 감고 웃어 볼게요.”
유수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스카이 에이드’를 든 채로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결국 연기였다. 결국 해맑은 미소를 짓는 것도 연기, 해맑은 청년을 표현하는 것도 결국 연기였다.
“네, 좋습니다!”
지면 촬영도 수월하게 끝냈다.
다음은.
“오토바이는 처음이시죠? 자전거는 타 본 적 있으세요?”
오토바이 연습이었다.
“스쿠터는 타 본 적 있습니다. 자전거도 자주 탔고요.”
김대한은 스쿠터를 타고 치킨 배달을 한 적이 있었다. 사실 계속 배달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둔 이유는 죽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빠른 시간에 배달을 완료해야 했고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사고를 목전에 두게 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트라우마가 생겨 배달을 그만두어야 했다.
“우선 실력 한번 볼까요?”
지금까지 유수한은 스쿠터만 타 보았고 사고 트라우마가 있었다.
스쿠터보다 큰 오토바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선 심호흡을 하고 올라타 본다. 가볍게 시동을 걸어 본 유수한이 입술을 축이며 생각했다. 지금은 아이템을 믿고 그 효과에 기대 보자고.
부르르르르릉!
배기음 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오.”
유수한은 가볍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초보자용이었지만, 지금까지 스쿠터만 몰았던 솜씨로는 보이지는 않았다. 유수한이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그러다가 굴절 코스를 발견한다. 가볍게 핸들을 틀어 부드럽게 코스를 정복한다. 바로 이어지는 직선 코스에서 속도를 더 높이는 유수한이었다.
“혹시 오토바이 연수 받은 적 있대요?”
그 물음에 매니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진짜 잘 타시는데요? 이건 뭐, 바로 시험 봐도 합격할 실력인데. 아니, 그 이상 같은데?”
마지막.
유수한은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오토바이를 몰았다. 처음 트라우마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것도 점차 안정을 찾고 있었다. 아이템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액션 연기의 달인(S)]은 그 효과를 톡톡히 보여 주었다.
마치 오토바이와 한 몸이 된 듯했다.
어떻게 운전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고 그러다 보니 점차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감이 생긴다.
“대역 없이 오토바이 액션이요.”
그 말에 다들 표정이 굳는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냥 맨몸 액션도 아닌 오토바이 액션이었다. 오토바이 액션은 전문 스턴트맨도 어려워했다. 그걸 배우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으니, 당연히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위험해서 안 돼요.”
뒤늦게 도착한 오토바이 액션을 담당한 스턴트맨이 다가오며 만류했다.
“멀리서 보긴 했는데, 잘 탄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물론 그도 놀라긴 했다.
오토바이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오토바이 액션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그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적응력을 보이는 유수한을 보고 당황했다. 하지만 바로 액션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촬영 시에 쓰는 오토바이도 다르다. 치고 올라가는 속도가 차원이 달랐고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한 기종이었다.
“저 잘할 수 있는데.”
이미 유수한은 판단을 내린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액션 연기의 달인(S)]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계산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오토바이를 몰아 보았고, 타는 순간 느꼈다. 이 아이템은 모든 액션 연기를 포괄한다는 사실을.
부르르르르르릉-!
유수한이 만류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처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오토바이를 몬다. 그러다가 갑자기 매끄럽게 ‘슬라이딩 턴’을 선보였다.
물론 유수한이 알고 하는 테크닉이 아니었다.
이 정도 테크닉도 할 수 있다는 걸 안 유수한이 다시 오토바이를 몰았다. 더 속도를 높이고 한 바퀴 크게 돈 유수한이 스턴트맨 앞에서 락을 걸고 오른쪽으로 체중을 실었다.
끼이이이이익.
흙먼지가 일어나고 유수한은 헬멧을 벗으며 스턴트맨을 보았다.
“저 기술 좀 알려 주세요.”
방금 도발하듯이 ‘슬라이딩 턴’을 하던 유수한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스턴트맨은 놀랐다. 덮칠 듯 맹렬히 달려와 ‘슬라이딩 턴’을 했다. 마치 성공할 거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밸런스가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부드럽게 브레이킹을 했다.
저 테크닉이 기본적인 기술이기는 하지만, 연습 없이 이렇게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테크닉이었나?
“어디서 오토바이 배운 적 있어요?”
그 물음에 유수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스쿠터만 몰았는데요.”
엄청난 재능충인가.
온몸이 부서져라 오토바이를 타고 기술을 익혔던 스턴트맨은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