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51화 (51/175)

51. 끝은 새로운 시작

일산 한우 전문점.

종방연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케이크 커팅식을 위해 주연 4인방과 작가, 감독이 한자리에 모였다.

플라스틱 칼을 함께 든 유수한은 이대로 자르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예쁘기도 했고 주연 4인방이 들어간 케이크라 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스윽.

아쉬움도 잠시, 케이크가 부드럽게 갈라진다.

“이제 드라마 시작하기 10분 전인데, 우리 감독님과 작가님 소감 들어 보겠습니다!”

드라마가 시작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소고기를 구우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제일 먼저 일어난 이승혁 감독이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열었다.

“참 시간이 빨라요. 그렇죠? 겨울에 우리 작가님을 만나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네요. 드라마 제목이 ‘시간’이라 그런가? 이상하게 이번 드라마는 더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SBC가 쏘는 날이니까 부위별로 마음껏 드시고 가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김우리 작가.

“저는 시간이 얼마 없어서 짧게 할게요. 드디어 제가 이번 드라마를 통해 ‘만년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뗐어요. 모두 현장에서 고생한 스태프와 배우분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마이크가 돌아간다.

“이번에는 우리 주연 배우분들 소감 들어 보겠습니다.”

늘 그렇듯 처음은 민서온이었다.

“늘 그렇듯 마지막은 좀 아쉽네요. 오늘이 지나면 은서를 보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좀 울적하고요. 하지만 연기를 하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소감.

유수한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어떤 말을 할지 고민했다. 이내 마이크가 유수한 손에 들린다. 일어선 유수한은 마이크를 쥔 채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처음과 달라진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짧게 숨을 내뱉은 유수한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생각나는 말이 참 많네요.”

유수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드라마는 제게는 참 많은 의미가 담긴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못 미더웠던 저를 믿고 유환이를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환이를 연기하면서 저 역시도 많이 배웠습니다. 가끔 정유환이 저와 비슷하다고 느꼈거든요. 아, 그러니까 예전의 제 모습이요.”

시간이 없다. 유수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보며 소감을 마무리했다.

“정유환을 만나서 행복했고. 작은 소망을 덧붙이자면 오늘 시청률이 잘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이어진 최은호의 소감 역시도 캐릭터답게 굉장히 길었다. 그리고 마지막 주민하는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는 아주 짧고 굵은 소감을 내놓았다.

“앞에서 다들 좋은 이야기를 해서 짧게 말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술 잔뜩 먹고 다 함께 기어서 집에 들어가요!”

딱 주민하의 시원 털털한 성격다운 소감이었다.

술 잔뜩 먹고 기어가자는 그 말에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었다. 유수한은 고기를 구우며 마지막 광고를 지켜보았다.

“다들 오늘 시청률 몇 프로 예상해요?”

이승혁 감독이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물었다.

“전 23%요.”

최은호가 가장 먼저 대답했고.

“전 28%?”

주민하는 그냥 막 던졌다.

“저는 그냥 20%만 넘겨도 만족할 것 같아요.”

그리고 민서온은 적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고기를 굽던 유수한이 골몰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 24.3%요.”

정확히 소수점까지 찍어서 말했다.

“뭐야? 그렇게 정확하게?”

“뭔가. 그럴 것 같아서요.”

전회 시청률이 21.7%였다.

보통 시간의 시청률은 흐름을 타면 평균 3% 정도 상승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마지막 회였다. 그것도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평소에는 드라마를 보지 않던 사람도 유명한 드라마가 마지막 회라고 하면 한 번쯤을 채널을 돌려 결말을 확인한다.

“아, 정정할게요.”

그럼 그 사람들을 대략 1%라고 계산하면.

“전 25.3% 봅니다.”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 * *

「사실 나도 이건 예상 못 했어.」

마지막 16회.

정유환은 구치소에 수감된 정이환을 만나러 왔다.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정이환은 동생을 보자마자 눈에 광기가 돌았다.

「형이 이렇게 초라해질 줄이야.」

이런 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늘 높은 곳에서 정유환을 내려다보던 정이환이었다. 마치 높고 두터운 벽처럼 느껴져서 함부로 덤빌 생각도 감히 하지 못했었다.

「어차피 곧 나올 거잖아.」

주가 조작을 비롯해 살인 청부에 비자금 조성까지.

그 외에 자잘한 혐의까지 포함해서 최소한 10년 이상은 교도소에서 썩어야 하지만, 권력이 있는 사람은 달랐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형이 사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볼까 해.」

늘 정이환은 동생을 정신병원에 가두지 못해 안달했다. 항상 정이환은 동생에게 말했었다. 사회에 나와서 안 될 구제 불능이라고.

「서정완이 죽었어.」

정유환이 노려보고 있는 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걔가 남긴 유서가 꽤 재밌네. 그걸 먼저 찾으려고 애썼는데, 안타깝게 됐어.」

서정완은 죽음을 맞이했다.

유서를 작성한 후에 그는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목을 맸다. 그리고 유은하는 끝까지 정유환에게 집착했지만, 결국 현실을 깨닫고 유학길을 선택했다. 악인 중에 가장 평탄한 결말이었다.

「알려 줄 게 하나 더 있어.」

정유환은 올곧은 눈으로 정이환을 보았다. 늘 움츠리던 눈빛이 아닌, 두려워서 겁에 질린 눈빛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깨어났어.」

「!」

미동이 없던 정이환이 움찔한다.

「너지?」

정유환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네가 아버지 그렇게 만들었잖아.」

권력욕.

정이환은 더 빠르게 높은 곳을 오르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후계자를 정하는 것을 미적거리고 있었고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비정한 아버지였지만, 세월은 무시할 수 없었나 보다. 늘 냉대하고 눈 밖에 냈었던 막내아들을 부쩍 챙기기 시작했다.

정신병원에 가둬 놓으면 시간이 지나 꺼내 놓고.

어디 미국에라도 보내려고 했더니, 턱 하니 이름만 있는 기획팀 상무직을 막내아들에게 안겼다. 그 사실을 정이환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정유환을 성환가 사람이라고, 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닥쳐!」

쾅!

정이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유환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벽에 가로막혀 그의 모양새는 썩 보기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꼴좋네.」

마지막까지 정유환은 이죽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실시간 시청률 좋은데요?”

이 감독 옆에 앉은 조연출이 실시간 시청률을 확인하며 말했다. 열심히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다 시청률 이야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얼마나 뜨는데, 지금?”

이 감독 물음에 조연출이 대답했다.

“24.6%요. 계속 오르고 있어요.”

그 말에 이 감독이 웃으며 소주를 들었다. 이미 술기운으로 벌게진 두 눈은 여전히 술을 갈망하고 있었다.

“술맛 좋다.”

캬.

이 감독이 고기를 한 점 입에 쏙 넣었다.

“이런 날에 수한 씨도 한잔하면 좋을 텐데.”

양파절임을 곁들여 고기를 먹던 김우리 작가가 말했다. 유수한은 술을 거절하는 대신에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계속 화면에 집중했다. 이상하게 한눈팔면서 고기를 굽고 있는데, 너무 익혀서 질겨진다거나 타는 경우가 없었다.

“전 괜찮아요. 이따가 제가 운전하기로 했거든요.”

“매니저가 안 하고요?”

“저 녀석도 고생했으니까 편하게 술 한잔하라고 했어요.”

어차피 유수한은 술을 먹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매니저라도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안주도 그냥 돼지고기가 아닌 소고기였다. 무려 한우. 이런 기회를 놓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대리 만족이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잘 먹기를 바라는.

“멋지네요?”

이어지는 칭찬에 유수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뭘 이런 걸로요.”

그저 사람다운 호의였다.

보통 연예인은 주변 사람들이 지나치게 왕 대접을 한다. 애도 아닌데 모든 걸 주변 사람들이 다 해 준다. 신발을 신는 기본적인 일까지도 남의 손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다. 유수한은 그런 배우는 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기본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널 만나고 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어.」

어느새 마지막 장면.

늘 어색했던 키스신도 이제는 한결 편해졌다. 입술을 부딪히는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지나간 고통은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연인이었다.

「지금까지 ‘시간’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구에 마음이 찡해졌다가.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아파야 하는 걸까-」

발라드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춤사위를 보는 순간,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우, 왜 저랬지? 저 때 무슨 생각으로 저걸 한 거지?”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어느새 그 모든 춤을 외면한 유수한이 집게를 들고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발라드에 어울리지 않는 ‘헤이파파’ 콜라보는 유쾌했다. 한편으로 극의 여운을 무너지게 하는 건 아닌가 고민도 됐지만, 여기까지 따라와 준 시청자를 향한 좋은 선물로 생각하면 될 듯했다.

“미쳤나 봐.”

그러니까.

유수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뒤늦은 푸념이었다.

* * *

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종방연도 끝났고 드라마도 끝났다. 커뮤니티에서는 마지막 엔딩 스크롤 영상이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었다.

유수한은 하루는 온전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고 하루 정도는 쉬는 것이 머리에도 좋았다.

[연예뉴스] SBC ‘시간’ 유종의 미 거뒀다 ······ 최종회 시청률 25.8%

유수한은 최종 시청률을 근소한 차이로 맞혔다. 마지막까지 괜찮은 성적표를 손에 쥐었고 여러모로 ‘시간’이 유수한에게 많은 걸 선물했다.

[OKEN] 재기 성공한 유수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부활!

먼저, 유수한은 힘들다는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드라마가 끝난 것은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첫 미니시리즈 남주를 맡아 나름대로 마음고생이 있었으니.

그리고.

“안녕하세요.”

오늘 유수한은 영화 ‘사냥개’의 감독 김승찬을 만나러 왔다.

“반가워요. 김승찬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김승찬은 유수한의 드라마 스케줄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불발될 상황을 대비해 다른 배우도 리스트 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1순위는 역시 유수한이었다.

짧았지만, 드라마 ‘시간’에서 보여 준 유수한의 연기와 액션 실력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거기다 잘생긴 외모까지.

딱 김승찬이 찾던 장현우였다.

“드라마 잘된 거 축하해요.”

그 말대로 유수한은 요즘 바쁘다.

드라마는 끝을 맺었지만, 여러 스케줄이 밀려오고 있었다. 우선 공약을 걸었으니 수행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고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유수한은 웬만하면 예능에 나가지 않기로 이성실과 합의 보았다.

이성실도 그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오늘의 데이트’와 ‘신박한 연예뉴스’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 상태였다. 더 예능에 나가는 건 오히려 이미지 소비였다.

남은 건 광고였다.

우선 ‘스카이 에이드’ 추가 지면 촬영이 잡혀 있었고 더불어 광고를 추리고 있었다. 그 부분은 이성실에게 맡겼는데, 아마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광고를 찍을 듯했다.

“시나리오는 읽어 봤어요?”

김승찬은 이제 30대 후반의 젊은 감독이었다. 전작 ‘낯선 자의 습격’이 손익분기점을 넘어 흥행했고 이렇게 또 다른 기회를 잡게 되었다.

“네. 재밌게 봤습니다.”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장현우.”

제게 맡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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