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지금까지 정유환이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방연.
시작할 때는 끝이 아득했는데, 끝을 내고 나니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듯했다. 유수한은 미리 보라에게 컨펌받은 의상을 꺼냈다.
보통 종방연에 참석하는 배우들 모두 편한 복장을 고수하지만, 기자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사진 찍히는 걸 의식하게 된다.
유수한은 슬랙스에 화이트 셔츠를 입었다. 가장 깔끔한 게 좋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슬랙스와 셔츠는 실패하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9월 중순의 날씨는 완벽하게 여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어 걷어 올린 유수한이 핸드폰을 챙기며 준비를 마쳤다.
“역시 예상대로 오늘 한우네요.”
매니저는 차에 올라타는 유수한을 반기며 밝게 웃고 있었다.
“좋냐?”
유수한의 물음에 매니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수한을 케어하면서 한우 같은 걸 얻어먹은 적이 손에 꼽았다.
성공한 드라마의 종방연은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였기 때문에 매니저는 벌써부터 한우로 배를 채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 술 한잔해.”
“네?”
“오늘 내가 운전할게. 편하게 마셔.”
“정말요?”
매니저가 반색한다.
“그래. 괜찮으니까 오늘은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헤벌쭉.
화색이 돈 매니저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어차피 유수한으로 살게 된 이상 술은 멀리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마시더라도 과음은 금물이었다. 이미 기존 유수한은 술로 폭망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연예이슈] SBC 효자 드라마 ‘시간’ 과연 어디까지 치고 올라갈까?
여러 기사들을 읽어 본다.
[OKEN] 15회 시청률 21.7% …… ‘시간’의 거침없는 시청률 오름세에 SBC 싱글벙글
[연예토킹] 민서온X유수한 “다시 청혼하는 거야.” …… 2049 시청률 1위
15회에 대한 기사를 읽어 보고.
[연예뉴스] 2022년 최고의 드라마 ‘시간’ 종방연 현장 취재!
종방연의 기사도 하나둘 올라오고 있었다. 기사를 읽다 보니 어느새 종방연 장소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유수한을 반기는 건.
차라라라락.
요란한 카메라 세례였다.
“종방 소감 부탁드립니다!”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린 유수한이 기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직 마지막 회가 시작되지 않았기에 종방 소감을 말하기에는 일렀다. 매니저는 그냥 지나가도 된다는 눈짓을 보냈고 유수한이 느리게 기자들에게 목 인사를 했다.
몰려든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일일이 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그저 정중하게 눈인사 정도로 마무리 짓는다.
“어?”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종방연 장소에 들어선 유수한은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마주하고 눈이 커졌다.
“서프라이즈!”
주문 제작 한 슈가 케이크를 들고 있는 팬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수한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가늘어진다. 힐끔, 매니저를 보니 그 눈을 피하는 김민수였다.
“또.”
유수한이 운을 떼기 무섭게 이경민이 치고 나왔다.
“또 잔소리하려고 하죠?”
지금까지 아이돌 덕질만 했지만, 종방연에 서포트를 준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주 생각했지만, 가만 보면 유수한은 나이에 맞지 않게 꼰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젊꼰. 젊은 꼰대.
“이거 봐요. 예쁘잖아요. 여기 얼마나 예약하기 어려운지 알아요?”
이경민의 말대로 슈가 케이크는 예뻤다. 앙증맞게 올라간 정유환 캐릭터 모형도 귀여웠다. 케이크를 보는 순간 처음 보는 거라 놀라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아무렇지 않게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도 오빠가 돈돈 거리니까, 선물도 제대로 준비 못 하겠다니까요.”
팬들의 성화에 유수한이 한풀 꺾인 듯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사실 하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분위기를 보고 꾹 눌러 냈다.
“이거 신기한 게 뭔지 알아요? 밑에 케이크는 먹어도 되고 위에 올라가 있는 모형들은 따로 보관하면 돼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모형은 굉장히 귀엽고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배경에 시계가 있는 걸 보니 드라마 제목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듯했다. 정유환은 부스스한 머리를 보아 초반부를 표현한 듯했고 셔츠는,
“이거 왜 벗고 있어요?”
단추가 풀어 헤쳐져 있었다.
“그게 포인트니까.”
씩 웃는 이경민을 보며 유수한이 따라 웃었다. 팬들이 보기에는 초반 정유환도 꽤 매력적이었나 보다. 물론 외모는 각성한 후 말끔해진 모습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각성 후에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빈도수가 낮아졌으니까.
“이건 오빠가 맨날 말하는 손 편지예요.”
“우와.”
“와, 배신감. 리액션 봐.”
“아니, 난 이 케이크도 너무 고마워요.”
유수한이 웃으며 덧붙였다.
“이런 건 처음 받아 봐요.”
순간 정적이 흐른다.
“처음 받아본다고요?”
되묻는 말에 유수한이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존 유수한이 잘나가던 시절에 이런 케이크는 받아 봤을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지금의 유수한이 예전의 유수한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발언이었다.
“아니.”
유수한이 손사래를 치며 다급히 변명했다.
“빛유 여러분에게 받는 건 처음이라는 뜻이었어요.”
등에서 진땀이 나는 것 같다.
“그렇죠?”
유수한이 고개를 무섭게 끄덕였다. 들고 있는 케이크는 예쁘다. 모형들만 따로 보관하면 된다고 했지만, 케이크 자체도 디자인이 손대기 아까울 정도였다.
“이거 먹기 아깝다.”
“그럼 그대로 보관해도 돼요.”
“그러다 썩으면요?”
“그땐 뭐. 알아서 하셔야죠.”
심드렁한 대꾸에 유수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썩어서 버리는 것보다는 먹는 게 더 나았다. 케이크를 다시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어 두고 손 편지를 따로 챙겼다. 수북한 편지를 보니 흐뭇해진다.
“진짜 오빠 잔소리 너무 심한 거 아세요?”
“내가요?”
“솔직히 해 주고 싶은 거 많았는데, 잔소리할까 봐 꾹꾹 참은 거예요.”
서포트 모금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돈이 모여도 쓸 곳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딱 1시간만 열었다.
케이크 제작 비용만 나오면 충분하기 때문에 1시간만 열었음에도 충분한 금액이 나왔다. 덕분에 택시값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서포트를 하는 사람은 현장에서 충실히 움직여야 한다. 나의 배우를 정성 들여 찍고 현장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서포트 정리 글을 올린다.
사람들은 내 배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십시일반 소액을 보내는 거였다. 유수한은 케이크를 품에 안고 골몰히 생각했다.
“나도 이제 드라마 끝났고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열심히 촬영 중인 팬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조만간 팬미팅 할까요?”
그 말에 작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비용은 내가 다 낼게요.”
말리지 마.
* * *
종방연 분위기가 부산스럽다.
드라마 열성 팬들이 준비한 서포트를 유수한이 뒤늦게 구경했다. 이미 빛유 서포트팀은 드라마 ‘시간’의 종방연 서포트를 촬영한 후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은 주연 4인방의 얼굴이 들어간 케이크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여성분을 바라본다. 보아하니, 드라마 관계자는 아니었고 종방연 서포트를 준비한 총대 같았다.
“이거, 서포트 준비한 총대인데요. 혹시 사진하고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드라마 총대는 유수한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유수한의 그 소문은 조금 지나간 소문이기도 했다. 예민하고 날카로워서 팬에게도 말을 틱틱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오늘 직접 눈으로 확인한 유수한은 소문과 달랐다.
팬과 꽤나 오래 대화를 나누는 걸 지켜보았고 팬미팅을 열겠다고 말하는 것도 똑똑히 들었다. 웃는 모습이 생각보다 순수해 보였다.
그녀는 드라마 ‘시간’에 푹 빠져서 메인 커플도 파는 덕후인지라, 유수한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스윗하다는 말도 있었고 팬 덕후라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요. 뭐든 원하는 거 말씀하세요.”
유수한의 선선한 대답에 총대의 얼굴이 밝아진다. 더불어 뒤에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포트 스태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종방 소감이라도…….”
“편하게 영상 찍으셔도 괜찮아요. 일단 그럼 사인부터 할까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인 용지를 내미는 총대였다. 정유환의 얼굴이 프린트된 걸 보니 직접 만든 사인지인 듯했다.
유수한은 멋지게 사인을 하고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처음에는 카메라가 낯설기만 했는데, 이제는 카메라가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사인 이거면 돼요? 더 해 드릴 수 있는데.”
유수한의 물음에 하나둘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 케이스를 내밀었다.
“오늘 여기에 배우님들 사인 다 받는 게 목표예요.”
“오. 진짜요?”
“네. 이거 이벤트로 추첨해서 돌릴 거거든요.”
“와, 최고의 선물이다.”
유수한은 웃으며 핸드폰 케이스에 정성 들여 사인을 했다. 혹시나 번질까 봐 후 바람을 불어 말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해요.”
여전히 카메라가 유수한을 비추고 있었고 총대가 종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와.”
상자를 확인한 유수한의 눈이 커진다.
“이게 뭐예요?”
유수한의 물음에 총대가 대답했다.
“메시지 북이에요.”
“와. 이거 몇 명이나 쓴 거예요? 너무 감동이다.”
메시지 북은 꽤 두꺼웠다. 길게 쓴 팬도 있었고 간략하게 소감 평을 쓴 사람도 있었다. 유수한은 몇 장 읽어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내려놓았다.
“포토북도 준비하고 있거든요.”
“포토북이요?”
“아직 16회가 남아서 이번 달 중으로 제작할 거예요.”
“멋지네요.”
남은 것을 둘러본다.
사진 액자가 눈에 띄었다. 이은서와 정유환의 사진이었다. 여러 사진을 모아서 한 장면을 만들어 냈다.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유수한은 순간 뭉클했다.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쩌죠.”
또 버릇이 나온다.
“내가 뭐라도 더 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주머니를 뒤적이며 뭐라도 더 줄 게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오빠.”
이제 막 도착한 주민하가 팬에게 받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카메라가 황급히 주민하를 비추었다.
“공약 여기서 하면 되지 않아?”
장난스러운 미소.
“싫어.”
유수한이 주민하의 속셈을 간파하고 단칼에 거절했다.
“내 소중한 복근.”
주민하를 흘겨보며 유수한이 덧붙였다.
“함부로 대하지 마.”
앙칼진 반응에 주민하가 깔깔 웃는다. 그러더니 뒤늦게 팬분들을 확인하고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세 작품을 끝낸 주민하는 종방연에 드라마 서포트가 온다는 걸 알고 있다. 주문 제작 한 케이크를 본 주민하가 눈을 빛낸다.
“진짜 예쁘다.”
그리고 익숙하게 팬들을 보며 밝게 웃었다.
“너 사인이나 해.”
“사인?”
“핸드폰 케이스에 사인해야 해.”
“아.”
주민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분들 바쁘셔. 너 말고도 받아야 할 사람 많으니까 빨리 해.”
“알았어. 왜 오빠가 재촉이야.”
주민하가 핸드폰 케이스에 사인을 시작했다. 유수한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받은 선물이 또 늘었다. 핸드폰으로 케이크를 찍고 애정이 담긴 현수막도 찍었다.
[주말 드라마의 영원한 강자! ‘시간’ 이대로 고여 있으면 안 될까?]
현수막 문구는 드라마 티저를 참고했다. 이대로 시간이 고여 있으면 안 되겠느냐는 귀여운 투정이었다.
“이제 종방 소감 말해 볼까요?”
주민하는 열심히 사인 중이었고 유수한은 카메라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마지막 회를 보지 않아서 종방 소감이 좀 어색하네요. 이렇게 저희 드라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너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네요. 주신 선물,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유수한이 심호흡하며 마지막 멘트를 덧붙였다.
“지금까지 정유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