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초록빛 대본
하나의 기회를 제대로 잡으면 이는 다른 기회로 찾아온다.
유수한은 짧게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뀐 대본. 몸치에게는 한없이 어렵기만 했던 액션. 그 기회를 잡으니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형. 대표님께서 시나리오 우선 확인해 보래요.”
김민수는 태블릿 PC에서 ‘사냥개’ 시나리오를 다운로드해 유수한에게 주었다. 유수한은 말없이 태블릿 PC를 보았다. 실물 책으로는 항상 빛이 나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전자책 방식의 시나리오에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음?”
눈부시다.
일단 금빛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붉은빛도 아니었다. 그 말은 망할 확률은 없다는 뜻이었다. 남은 색은 초록빛. 망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박도 아니었다.
중박.
딱 중박인 대본이었다.
“장현우라고 했지.”
짧게 설명을 들었다.
특별출연이었고, 역할은 베일에 싸인 ‘사냥개’ 팀의 에이스. 장현우는 개인 사정으로 휴직 상태였다. 장현우가 없는 ‘사냥개’ 팀은 배우 이정환이 맡은 형사 ‘김필성’을 중심으로 수사를 이어 나간다. ‘사냥개’ 팀은 새로운 타깃인, 마약 유통과 돈 있는 자의 뒤처리를 주로 하는 범죄 조직 ‘J’를 쫓는다. 범죄 조직 ‘J’는 ‘장재진’이 중심이자 핵심으로, 조직명이 없음에도 그의 이름을 따 ‘J’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가장 마지막에.”
초반부를 눈으로 훑으며 넘기던 유수한이 아예 끝부분으로 움직였다.
김필성이 보이지 않던 장재진에 대한 단서를 찾고 그를 사지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주인공과 장재진의 피 터지는 혈투가 터지고 가까스로 김필성이 승기를 잡을 즈음. 장재진의 수하들이 나타난다.
다시 김필성의 열세.
그리고.
현우 : 나, 좀 기다렸으려나?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난 장현우가 헬멧을 벗는다. 그 장면을 시작으로 장현우는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이고 김필성은 오직 장재진만을 노린다.
“오토바이 액션?”
허.
생각보다 난이도가 있었다. 시나리오에는 장현우는 오토바이를 타며 그 안에 있는 장재진의 조직원들을 농락한다고 쓰여 있었다.
“재밌어 보이긴 하는데…….”
지금까지 유수한은 금빛 대본만 찾았다. 금빛이 있는데 굳이 초록빛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장현우가 등장하는 부분이 특별출연치고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말 그대로 멋지다.
오토바이를 타고 아슬아슬한 액션을 하는 것도 그렇고 캐릭터에 매력도 있었다. 더불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특별출연이었기에 스케줄을 크게 빼지 않아도 된다는 점. 영화계에 발 도장을 작게나마 찍을 수 있다는 것. 마지막은 역할 자체가 인기를 끌 만한 매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민수야.”
고민이 끝났다.
“이거 관심 있다고 대표님께 전해 줘.”
* * *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사람들을 가장 기쁘게 하는 건 역시 실적이다.
사전 제작이 아닌 이상 드라마 촬영에는 늘 살인적인 스케줄이 동반된다. 그 상황에서 실적마저 곤두박질친다면 분위기는 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드라마 ‘시간’ 현장 분위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 소고기 각이죠?”
목표했던 20%를 목전에 두고 있다. 14회에서 19.9%를 기록했으니 이변이 없는 한 20%는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꽃등심 각이죠.”
“난 살치살이 좋더라.”
이제 마지막 회 촬영도 몇 컷 남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종방연에서 어떤 메뉴를 먹게 될지에 대한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보통은 삼겹살이지만, SBC 드라마국을 구제한 드라마인 만큼 한우 정도는 먹일 듯했다.
더불어 이제 끝이 보인다. 그 말인즉슨, 이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끝이 보인다는 뜻이었다. 물론 바로 다른 작품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 기본 일주일 정도는 휴식을 취한다. 노동 끝에 얻는 달콤한 휴식.
그러니 현장 분위기가 다른 때보다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우, 바람 엄청 부네.”
오늘 촬영은 바닷가였다.
드라마 ‘시간’의 마지막 장면을 찍기 위해 강릉으로 움직였다. 당장 내일이 15회 방영 날이었고 방송국 편집실에서도 그리고 현장에서도 부지런히 컷 편집을 하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따로 후시 따야겠는데요?”
야외 촬영에서 가장 예민해지는 사람은 음향팀이었다. 아무리 사람을 통제해도 막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 특히 자연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야죠. 뭐.”
이승혁 감독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장면의 장소가 바닷가인 걸 확인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15회는 편집을 마쳤고 16회는 부지런히 편집을 시작했지만, 시간은 분명 촉박했다. 하지만 완성도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었다.
초반에는 세트장 촬영이 많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야외 촬영 비중이 늘어났다. 최대한 동시 녹음으로 커버 치고 있었지만, 부득이 사정으로 안 될 때는 후시 녹음을 해야 한다.
“자, 마지막 컷입니다!”
촬영이 시작된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정유환과 이은서는 기나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이제야 비로소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레디!”
이승혁 감독이 크게 소리친다.
“액션!”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모래사장을 걸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기도 했고 뭐라 실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서로를 보는 눈에 사랑이 담겨 있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로 마주 보고 있다.
“이상하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이은서가 말했다.
“그동안 참 시간이 흐르지 않았거든. 이제 이쯤 되면 최소한 1년은 지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하루도 지나지 않은 거야. 마음에 남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매일 울고 그리워했어. 난 그 사람 없이 살 자신이 없었거든.”
이은서의 말을 가만 경청하던 정유환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아직도 그 사람 사랑해?”
늘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알아챈 후에도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었다.
“사랑했지.”
이은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나간 사랑이지만.”
시간은 흐른다.
마음에 상처가 깊어 병을 앓게 되면 때때로 사람은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다. 10분이 1시간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1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극단적으로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1년이 지난 것처럼 더디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은서가 그랬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후로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렸다.
“근데 지금은 시간이 흐르는 게 느껴져.”
이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정유환을 보았다.
“아무래도 너 때문인 거 같아.”
정유환이 얼떨떨한 듯 눈이 커졌다가 다시 미소를 짓는다.
“널 만나고 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어.”
완벽하게 꽉 닫힌 해피엔딩.
이은서의 뺨을 쓰다듬던 정유환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가갔다. 마지막 장면은 로맨틱한 키스로 마무리되었다.
“컷!”
시선이 모두 이승혁 감독에게 꽂힌다.
“OK!”
그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촬영을 기념하는 케이크가 들어온다. 폭죽이 터지고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케이크에는 초가 하나 꽂혀 있었다.
[SBC ‘시간’ 마지막 촬영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케이크 판에는 마지막 촬영을 축하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유수한은 흐뭇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민서온과 함께 촛불을 꺼뜨리며 드라마 ‘시간’이 끝을 맺었다.
* * *
오전 10시.
유수한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아침 8시에 어김없이 울리던 알람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공식적인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에 몸이 녹아내린 듯했다.
“아, 죽겠다.”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제대로 쉬지를 못했으니까. 유수한은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62>
그동안 쌓은 출석 포인트와 광고 계약으로 얻은 5 포인트까지.
지나간 시간만큼 포인트가 착실히 쌓여 있었다. 물론 갑자기 S급 아이템을 사는 바람에 변수가 생겼지만, 남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1,000 포인트는 무난하게 적립할 수 있을 듯했다.
갑자기 [라이프 체인지] 시스템이 난동을 부려 마이너스 차감하는 이벤트가 없는 한.
“응. 후시 녹음 안 잊었어. 걱정 마.”
매니저에게 딱 맞춰서 전화가 왔다.
“오후 3시였지? 운동 끝나고 가면 되겠다.”
지금 유수한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있었다. 피로가 쌓여 몸에 근육통이 느껴졌다. 운동을 하러 가기 전에 뜨거운 물에 몸을 좀 지지고 갈 생각이었다.
반신욕은 유수한에게 새로 생긴 취미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창밖을 보는 일. 예전 김대한이었다면 꿈꿀 수 없는 취미였다.
“그래. 이따 보자.”
전화를 끊은 유수한이 물을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지금쯤 방송국은 난리도 아닐 것이다. 마지막 회 편집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테고 마지막이라 더 심혈을 기울일게 분명했다.
“기분이 이상하네.”
작품 하나를 끝낼 때마다 기쁘면서도 아쉬움이 마음에 남는다. 처음에는 낯선 배우라는 직업을 어떻게 해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연기를 배우고 현장을 경험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천직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살면서 뭔가를 갈망하고 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데, 지금은 연기를 계속하고 싶어졌다.
“따뜻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유수한이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체인지 라이프]는 또 다른 기회를 준 걸지도 모른다는. 왜 죽어서 망나니 배우로 다시 살게 되었는지 늘 의문이 들었다.
신이 김대한이라는 인간이 단순히 불쌍해서?
아니면 단순한 신의 장난?
사실이 뭐였든, 중요한 건 삶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늘 불행했고, 불행한 환경에 갇혀 살았던 그가 이제야 비로소 삶에 흥미를 느낀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한마디를 툭 내뱉고는 유수한이 눈을 감았다.
* * *
「만약 내가 당신에게 다시 청혼한다면.」
1회 마지막을 장식했던 무미건조한 청혼에서 벗어난 감정이 가득한 청혼이 시작되었다. 같은 장소. 같은 구도. 연기하는 인물도 같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갈구해도 되겠느냐고.」
정유환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리시안셔스. 다시 청혼을 하는 정유환의 얼굴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는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조심스럽게 이은서에게 다가간 정유환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허락이 필요한 것 같아서.」
심장이 뛴다.
떨리는 손으로 꽃을 내밀었다. 어찌나 손이 떨리는지 꽃다발도 똑같이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은서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꽃을 본다. 그러다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꽃은 예쁘네.」
뒤늦게 꽃을 받은 이은서가 꽃향기를 맡는다.
그녀에게 정유환은 지켜야 하는 남자였다. 볼 때마다 못 미더워서 저걸 어떻게 믿고 일을 하나 싶었던 남자.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은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정유환이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러 왔던 그 순간부터였다.
「잊었나 본데.」
이은서가 꽃에서 시선을 떼고 정유환을 올려 보았다.
「우리 이미 결혼했잖아.」
그 말을 들은 정유환이 순간 멍해진다.
이은서가 했던 말을 다시금 생각하던 정유환의 표정이 달라진다. 입을 벌리며 순수하게 웃는다. 그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찼다.
「그럼 키스해도 돼?」
「하.」
이은서가 깊은 한숨을 쉰다.
「언제부터 허락 맡았다고.」
그리고.
15회는 높은 벽 같았던 시청률 20%를 깨부수며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