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라이징 스타
정유환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서정완의 발을 붙잡았다. 혹시나 그가 이은서에게 다가가 해코지를 할까 봐 두려운 눈으로.
지하 창고에 있던 사람은 총 8명이었다. 정유환과 이은서, 그리고 서정완은 제외하면 건달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5명.
그리고 김 비서가 끌고 온 사람은 무려 10명이 넘었다. 순식간에 밀려들어 오는 사람에 그 자리에 있던 건달들이 우왕좌왕했다.
그 상황에서도 정유환은 착실히 서정완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나 저 때 좀 아팠다.”
서정완 역을 맡은 최은호와는 감정을 풀었지만, 이상하게 감정이 실려 있는 듯한 발길질이었다. 물론 연기였기 때문에 살짝살짝 빗나가게 발길질을 했지만, 이상하게 아팠다.
“감정이 실렸나?”
“아니면 연기에 심취해서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랬나 보다.”
다른 생각은 접어 둔다.
어쨌든 과격한 연기를 하면서 다치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추격전을 할 때 구둣발로 달려서 발등이 부은 게 더 아팠다.
「인질부터! 인질부터 지켜!」
김 비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있는 사람 먼저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이은서를 구출하고 그다음은 정유환이었다.
끝까지 서정완은 발악했고 정유환의 머리를 후려치려는 순간, 제지당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김 비서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상황이 정리되자 다가온다.
미리 정유환에게 사람을 붙여 놓았고 그가 밤중에 은밀히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상황을 파악한 김 비서가 나름 빠르게 움직인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턱없이 늦어졌다.
「아이고. 기절하셨네.」
이은서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정유환은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서정완의 바짓가랑이를 놓지 않고 있었다.
김 비서는 등에 보이는 자상을 확인했다. 바닥에 떨어진 회칼, 딱 봐도 깊게 찔린 상처였다. 눈살을 찌푸린 김 비서가 서정완을 보았다.
「납치극이라니.」
서정완은 어느새 붙잡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쪽이나 상무님이나.」
혀를 차며 김 비서가 서정완의 주머니에서 USB를 찾아낸다. 서정완이 저항했지만, 이미 발버둥 쳐도 끝난 상황이었다.
「드라마를 너무 봤네.」
이윽고.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경찰이 들이닥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은서는 정유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유환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린다.
지금까지 눈물을 보였던 사람은 정유환이었다. 이은서는 눈시울을 붉혔던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정유환 앞에서 울었던 적은 없었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김 비서가 연행되는 서정완을 지켜보다가 이은서에게 다가갔다. 이은서는 말없이 정유환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비서가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따로 챙겨 두었던 USB를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정유환은 생각 없이 움직이지만, 김 비서는 언제나 설계를 하는 사람이다. 처음 정유환을 만났을 때는 갱생 각이 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결함투성이라 하필 왜 상사로 이런 사람을 만났는지 늘 의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승진할 생각도 버렸다. 하지만 정유환은 이은서를 만나 조금씩 변해 갔고 김 비서 역시도 제대로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고생하신 만큼 수확은 있었네요.」
이은서가 뒤늦게 USB를 받았다. 그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물짓던 이은서가 숨을 내뱉는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 사이다 가나요?”
그동안 드라마는 고구마를 잔뜩 먹이고 가끔 사이다 한 모금 마시게 하는 정도가 끝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반격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악인이 기세등등했다.
서정완은 몰락했지만, 아직 악인이 남아 있다.
우선 뒤늦게 최종 보스로 드러난 정이환과 가장 약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정유환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유은하까지.
고구마가 조금씩 해소되고 사이다가 들어올수록 시청자는 반응할 것이다.
“이제 5분 후면 도착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매니저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래.”
아쉽지만, 남은 분량은 다음에 봐야 할 듯했다.
* * *
라이징 스타.
요즘 유수한은 데뷔 초에 들었던 라이징 스타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맞이하는 라이징 스타였다.
음주 수영 논란으로 그대로 영원히 묻힐 줄 알았던 유수한은 재기에 성공했다. 예전 폼을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이 더 흐름이 좋았다.
두 번째 라이징 스타.
유수한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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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한은 오랜만에 집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마지막 회 대본이 도착했다. 지금까지 김우리 작가는 쪽대본을 현장에 전달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완대본을 받아 흐름을 파악한 후 연기를 하기 때문에 쾌적한 환경에서 촬영하고 있었다.
아직 유수한은 쪽대본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듣기로 쪽대본은 작가가 글이 써지지 않아서 날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연출과 다툼이 있을 때 쪽대본이 날아온다고 들었다.
서로 지향하는 방향이 다를 수도 있고 연출이 과하게 대본을 개입하는 경우에, 보통의 작가는 불편함을 느낀다.
작가가 신인이고 연출이 경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표작을 배출한 기성 작가라면 연출에게 끌려가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없을 터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글발이었다.
“뭔가 기분이 묘하군.”
글발 좋은 김우리 작가도 시청률에 부담감을 느꼈는지, 후반부 집필이 늦어지고 있었다. 현재 14회까지 방영이 되었고 시청률은 19.9%까지 치고 오르며 상승 기류를 타고 있다.
어느새.
다음 주가 마지막 방송 주였다.
“벌써 마지막 대본이라니.”
기분이 묘하다.
봄이 올락 말락 하던 시기에 대본 리딩을 했고 촬영을 이어 나갔다. 7월 중순에 첫 방송을 했으며 무덥던 여름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다.
그 사이에 인기를 얻어 라이징 스타만 찍는다는 이온음료 광고도 찍었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쁜 사이에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 시청률 20% 코앞이다. 나 유수한 웃통 벗고 춤추는 거 기대해도 되니? ^^
⌞그거 주민하가 걸었던 공약인 게 개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으로 걸었던 공약인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작 유수한 공약은 명동에서 3시간 동안 사인하는 거였음 ㅋㅋㅋㅋㅋㅋ
말 그대로 꼼짝없이 복근을 공개해야 할 판이다.
드라마에서 노출증 환자나 다름없었기에 옷을 자주 벗었지만, 공중파 심의상 가려진 부분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비공식 행사에서 유수한의 복근을 보기를 꽤 기대하는 듯했다.
- 잘 만든 몸은 자랑해야 제맛 (☞ຈل͜ຈ)☞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몸을 만드는 이유도 보여 주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닐 듯했다. 물론 부끄러움에 쉽게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잘 만들었으니 자랑해야 마땅했다.
[HOT] 피 땀 눈물로 완성된 유수한의 외모(feat.시간_명장면) +437
14회는 여러모로 이슈였다.
우선 정유환의 각성이 효과적으로 보였다. 이은서를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뛰어든 정유환의 예상하지 못한 액션. 더불어 칼을 맞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은서를 지키기 위해 기절하면서도 서정완을 놓지 않은 모습에 반응하고 있었다.
- 저거 보니까 유수한 박복한 캐릭터 잘 어울릴 듯 피 땀 눈물 최고다 진짜
⌞피 땀 눈물 완벽한 조합 ㅋㅋㅋㅋ 매력 확 산다 진짜
⌞⌞이거보니 박복한 노란장판 감성도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
⌞⌞⌞나중에 찢어질 듯 가난한 캐릭터 했으면 좋겠어 딱 한 번만
⌞⌞⌞⌞22 너덜너덜 체크 셔츠 입히고 돈 없어서 울고 맨날 다치면 개도른맛일 듯 bb
⌞⌞⌞⌞⌞3333 새로운 가난남주 나오나요
⌞⌞⌞⌞⌞⌞444444 얼굴 자체가 피 땀 눈물이 착붙이라 잘 어울릴 듯
14회 반응이 다채로웠다.
가난남주라는 말도 처음 듣는 유수한이었다.
- 얘들아 유수한 액션 존멋이지 않냐
⌞진심 대역 아니라던데 너무 잘해서 놀랐음
⌞⌞인정 ⌞ㅇ⌝ 너무 잘하더라
⌞⌞⌞너무 자연스럽고 저런 모습이 있었나 싶고 멋있었음 ㄹㅇ
⌞⌞⌞⌞유수한 싫어하는데 잘해서 킹받음 ㅋㅋㅋㅋㅋㅋ
시청률이 좋았던 것처럼 반응도 역시 좋았다.
항상 유수한은 자신의 연기를 세심하게 모니터링했고 바로 반응도 찾아보았다. 피드백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찾아본다. 가끔 악플도 눈에 들어오지만, 그런 건 흐린 눈 하며 피하는 유수한이었다.
- 은유커플 이제 그만 행복했으면 ㅠㅠㅠㅠㅠㅠ
⌞222 그만 괴롭혀 ㅠㅠㅠㅠ
⌞⌞33333 은서 울다가 눈 부은 거 맴찢 ㅠㅠㅠㅠ
⌞⌞⌞4444 정유환 피 땀 눈물 좋긴 한데 이제 웃게 해 주라 ㅠㅠㅠㅠㅠㅠㅠ
마지막으로 드라마 커플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 핸드폰을 붙잡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계속 관련 글을 찾아보는 게 재밌어서 다른 일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니.
핸드폰이 뜨거워질 즈음에 그만두어야 옳았다.
“이제 대본에 집중해 볼까.”
오늘 촬영은 저녁부터였다.
15부 촬영이 마무리 단계였고 서정완은 극에서 하차한 상태였다. 주민하는 마지막 발악 중이었고 저지른 죄가 서정완보다 작았기 때문에 해외 도피 정도로 마무리될 듯했다.
찰칵.
아쉬움에 대본을 보기 전에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결말이 어떻게 되려나.”
궁금증을 안고 마지막 회 대본을 펼쳤다.
* * *
이성실은 대표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제안을 받아 자세히 검토 중이었다. 제안이 들어온 영화는 누아르 장르였다.
나오는 분량은 10분도 채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특별 출연. 장점은 분량은 짧지만 영화계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것과 감독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캐스팅 작업은 마무리 단계.”
관련 내용을 찾아본다.
주연들 중에 가장 비중이 큰 배우는 ‘이정환’이었다. 이제 50대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여전히 충무로를 누비며 활동하는 배우였다. 누아르 장르 특성상 여자 배우는 거의 없었다. 가장 비중이 높은 배역도 이정환이 맡은 역할인 강력반 형사의 아내였다.
“어제 방송을 보고 오늘 연락 왔단 말이지.”
이성실 역시도 ‘시간’ 14회를 챙겨 보았다.
소속 배우 둘이 주연이었으니 챙겨 보는 게 당연했다. 유수한은 걱정했던 액션을 모자란 구석 하나 없이 소화했다.
이번 건은 직접 감독에게 연락이 왔고 ‘시간’의 무술 감독에게서 유수한을 추천받았다고 했다. 잘생긴 외모는 물론이고 액션 실력이나 인성까지 괜찮은 배우라고 소개받았다는데, 들을수록 다른 사람 이야기 같았다. 그 유수한이 인성으로 칭찬받는 날이 오다니.
영화 ‘사냥개’는 악랄한 범죄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모인 형사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여기서 유수한은 베일에 가려 있는 ‘사냥개’ 팀의 에이스 ‘장현우’ 역을 맡는다. 장현우는 극에 이름만 나올 뿐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극 후반부에 극적으로 나타나 팀을 구하는 역할이었다.
“흠.”
지금 유수한에게는 작품 제안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확연히 눈에 띄는 게 없었고 다시 올라가는 단계인 만큼 신중하게 작품을 고를 계획이었다. 뜻하지 않은 제안은 가끔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안내할 때가 있다.
“어, 나다.”
생각을 마친 이성실이 바로 김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라마 마지막 촬영이 언제지?”
일단 배우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들어 보니 드라마 촬영의 마무리는 아직 일주일 정도 남은 듯했다. 다음 주가 드라마 방영 마지막 주였고 슬슬 초치기 촬영에 돌입하고 있었다.
“일단은 알았어.”
지금은 가장 현장이 바쁠 때였다.
유수한이 이것저것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터였다. 일주일. 그 일주일을 기다려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간절함도 없다면 곤란했다. 뭐든, 캐스팅 제안이 왔을 때는 같이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
“아니, 영화 한 편 들어왔거든. 특별 출연.”
옆에서 대화를 듣던 유수한이 무슨 일인지 물어본 듯했다.
“일단 시나리오라도 보내 줄 테니, 정 궁금하면 직접 확인하라 해.”
요즘 유수한은 작품에 욕심을 보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주인공만 하려는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성향이 많이 사라졌다.
특별 출연이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한다면 바로 추진할 생각이었다.
통화를 마친 이성실이 직접 메일로 시나리오를 김민수에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