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47화 (47/175)

47. 액션 연기의 달인(S)

매끄럽고 부드러운 돌려차기.

무릎을 굽힌 채로 그다음 동작까지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계속 주먹을 휘두르든, 발차기를 하든 온몸에 힘이 들어가 경직되었던 것과 상반된 움직임이었다.

“그렇지!”

짝!

최홍식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바로 그거라니까!”

한결 매끄러워진 동작에 최홍식의 표정이 뒤늦게 풀렸다.

“거봐. 근육이 운동 잘하는 근육이라니까.”

운동 잘하는 근육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의심하는 눈초리는 없었다. 그게 또 이상하다. 방금까지 녹이 슨 로봇처럼 삐걱거리던 사람에게 그 어떤 의심도 없다니.

“이거, 이거도 해 볼래요?”

휘익.

기다렸다는 듯 유수한이 뒤후리기를 보여 주었다. 딱 시범 한 번만 보고 설명 한 번만 들어도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와우!”

여기저기서 환호 소리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유수한은 아이템을 질러서 효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눈으로 본 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믿을 수밖에.

“설마 처음에 못한 척한 거예요?”

물론 이런 장난스러운 의심은 있었지만,

“아니요!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 서툴렀어요.”

쉽게 풀렸다.

“그렇지! 원래 처음 할 때는 버벅거리는 게 당연해!”

최홍식은 신났다.

뭐랄까. 빛나는 원석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많은 배우들을 만나 왔지만, 이런 배우는 처음이었다. 액션 잘하는 배우는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태권도든, 복싱이든 무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이거도 넣어 볼까?”

“네!”

“이거도 해 보죠.”

“네!”

“이거도.”

최홍식은 처음 생각했던 쉽고 멋있는 액션은 버리고 애초에 구상했던 어렵지만 더 멋진 액션을 집어넣고 있었다.

“자, 마지막으로 맞춰 보고 끝냅시다!”

[액션 연기의 달인(S)] 효과는 굉장했다.

* * *

이은서가 벌건 대낮에 납치되었다.

궁지에 몰린 서정완이 선택한 극단의 방법. 서정완은 구속되었으나 돈으로 해결했다. 그는 이제 벼랑 끝에 몰려 있었고 그럴수록 이은서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했다.

「돌려받고 싶어?」

추격전 끝에 놓친 이은서.

김 비서의 차를 타고 격렬하게 쫓았지만, 상대는 이미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서정완이 기다렸다는 듯 정유환에게 접근했다.

「그럼 돌려받으러 와.」

서정완이 비열하게 웃는다.

「단.」

지금 서정완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현재 성환그룹에서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정완은 정이환 아래에서 일해 왔다. 충직한 개처럼 보였다가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탐욕적인 모습도 보였던 서정완이었다.

서정완은 성환그룹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리를 수습하고 해결하는 일을 주로 해 왔다. 능력 있는 변호사였고 흙수저 출신이었기에,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야심이 그를 성환가로 이끌었다.

「너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할 거야.」

눈앞에서 이죽거리는 서정완을 정유환이 벌게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의 멱살을 틀어쥔 정유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내 몸에 손대면 그 여자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지금 서정완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정이환은 철저히 그를 무너뜨렸다. 애초에 성환가에서 일할 충직한 개로 그를 영입했다. 처음부터 정이환은 서정완의 그릇을 작게 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서정완이 살 구멍을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호시탐탐 그를 감옥에 처넣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자살로 위장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서정완은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잠시 성환그룹에서 일하며 착각하고 만 것이다.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 뭐라도 손에 쥔 것 같은 착각.

그 모든 것은 모래알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순간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정작 쥔 것은 없는. 모래알 같은 권력이었다.

「그러게 날 선택했으면 좋았잖아.」

화면이 바뀌었다.

서정완은 먼지가 자욱한 지하 창고에 들어와 있었다. 그 가운데, 의자에 결박당한 채 앉아 있는 이은서가 보였다.

「나였다면.」

한차례 서정완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은서를 납치했고 그 분풀이를 정유환에게 할 생각이었다. 도피 중이었기에, 늘 말끔한 수트 차림이었던 서정완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나였다면 당신을 더 높은 곳에 올려 줬을 텐데.」

서정완은 이은서를 사랑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은서의 배경을 사랑했다. 서정완은 안정적인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은서에게 인간적으로 끌림이 있었지만,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토록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까지 갈 셈이야?」

이은서의 물음에 서정완이 광기에 물든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글쎄.」

「이렇게 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있지.」

지금 서정완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작은 USB였다. 비자금 조성 내역이 담겨 있었고 정이환이 정유환을 살해하리라는 정황이 담겨 있는 녹취 파일도 함께 있었다.

물론 이 USB는 서정완도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였다.

이렇게 꼬리 자르기를 하듯, 버려질 때를 위해 준비한 폭탄이었다.

「정유환을 내 손으로 끝장낼 수 있잖아.」

더불어.

서정완은 이은서를 이용해 정유환을 끊어 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었다. 감옥에 들어가면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

자살이라는 그럴듯한 타살.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크다. 같은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도 그 누군가는 더 빠르게 사회에 나올 수 있다.

물론 정이환은 갖고 있는 핵심을 잃게 되겠지만, 서정완처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 건드리지 마.」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이은서는 고고했다. 흔들림 없는 눈빛, 서정완은 이은서의 저 눈빛에 사로잡혔다. 저 여자라면 마음에 품고 있는 야망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지.」

덜컥.

철제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온 거 같은데?」

정유환이 나타났다.

겁도 많아서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으려 하는 유약한 사람이, 다칠 걸 알면서도 홀로 나타났다. 도망가지 않았고 숨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눈빛이 불안함에 떨리면서도 빛나고 있었다. 그의 삶에 나타난 빛이 이 작은 곳에 갇혀 있다.

이은서 곁에 있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면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처음으로 생긴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었고, 힘이 되어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멋진데 불쌍하다.”

뒤에서 은근히 태블릿 PC를 훔쳐보던 보라가 말했다.

유수한은 바쁜 스케줄에도 방송을 챙겨 보는 걸 잊지 않았다. 지금은 이동 중에 차 안에서 태블릿 PC로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래?”

의아한 듯 유수한이 물었다.

“지금 무서워서 떨고 있잖아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 장면은 결연하게 나타나는 걸 상상하지 않았다. 정유환이라면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끝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았지만, 다치는 건 무서워한다. 고통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유수한은 정유환을 유약해 보이면서도 용기를 낸 모습으로 표현했다. 움츠러든 표정, 떨리는 눈빛, 서정완 앞에 서는 그 순간에도 그는 후회한다.

무서워서.

그러면서도 묶여 있는 이은서를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왔네?」

정유환은 자신을 둘러싸는 사람들을 본다. 하나같이 무서운 둔기를 들고 있었다.

「이제 놔줘.」

「뭐를?」

「저 사람 풀어 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비열한 서정완이 본색을 드러낸다.

애초에 그는 이은서를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이은서가 나가게 된다면 다음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위치가 탄로 날 것이고 정유환을 죽이더라도 똑같이 나락에 떨어진다. 이미 예고된 나락이었지만, 아직은 조금 더 살아남아야 했다.

「자, 이제 우리 놀아 볼까?」

서정완은 정유환을 극도로 증오한다.

가진 게 없는 서정완은 분에 넘치는 재력을 가진 정유환을 미워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생아 주제에 서정완을 벌레 취급 하던 그였다. 그렇기에 늘 이 순간을 그려 왔다. 더 망가질 것도 없는 장난감을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게 제 손으로 부수는 일.

「다섯? 이걸로 되겠어?」

심장이 미친 듯이 뛸 정도로 긴장했지만, 정유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입을 터는 이유도 긴장을 풀기 위해서였다. 서정완이 하라는 대로 이곳을 혼자 찾아왔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이은서를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유환은 이은서를 응시하며 심호흡을 했다.

퍼억!

상대가 방심했을 때 먼저 덤벼든다.

바로 앞에 둔기를 들고 있던 남자의 배를 걷어차는 그 순간, 히죽 웃으며 정유환을 흠씬 팰 생각을 하던 남자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탁.

정유환은 자신을 향해 뻗는 주먹을 막고 빠르게 턱을 가격했다. 타탓, 스텝을 가볍게 밟으며 뒤로 이동한 정유환이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원래 대본이면 오빠 그냥 얻어맞죠?”

“응. 끽 소리도 못 내고.”

원 대본은 허세도 부리지 못하고 그대로 당한다. 물론 그런 모습도 정유환다운 맛이 있었지만, 유수한은 지금의 정유환이 더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얻어맞는 모습은 남주 같지는 않았다. 물론 정유환 자체가 병약한 모습이 있지만, 주인공으로서 각성은 필요했다.

“나 이거 진짜 잘 살리고 싶었어.”

유수한이 태블릿 PC를 보며 말했다.

김우리 작가가 정유환을 위해 새로 써 준 장면이었다. 그런 장면일수록 찰떡같이 받아먹어야 한다. 그렇기에 짧은 액션이라도 제대로 살려야 했고 욕심도 있었다. 그러니 S급 아이템도 지른 거였다.

사실 액션 연기를 위한 아이템을 살 줄은 몰랐다. 연기에서 액션은 필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있으면 좋은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눈으로 결과물을 확인하니 포인트값은 제대로 했다.

「저 개새끼……!」

서정완이 이를 악물며 욕을 내뱉는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회칼을 손에 쥔다. 정유환은 정신없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각목을 든 남자가 크게 휘두르자 허리를 숙여 피하며 비틀 돌았다. 그대로 뒤후리기로 상대의 머리를 가격한 정유환이 숨을 몰아쉬던 그 순간.

푸욱!

조심스럽게 다가간 서정완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

「윽!」

칼을 맞은 정유환이 비틀거린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자, 기다렸다는 듯 각목이 머리에 날아왔다.

툭.

날카로운 회칼을 떨어뜨린 서정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섯이 하나를 못 조져?」

기가 차다는 듯.

그러다가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진 정유환을 내려다보았다.

예상 밖이었다. 재벌집에서 곱게 자랐기에 이렇게 저항할 줄은 몰랐다. 정유환의 머리칼을 휘어잡은 서정완이 거칠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 벌레 같은 건 누굴까?」

정유환은 지금 엉망이었다. 입술이 터지고 눈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정유환이 말했다.

「놔줘…….」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간다.

「이은서 놓아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정완이 정유환의 뺨을 내리쳤다. 마치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먼지가 자욱한 창고 안.

서정완은 지금 기분이 꽤 유쾌하지는 않았다. 원하는 대로 정유환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속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서정완이 이내 야구 배트를 들었다. 쉽게 숨을 끊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서서히 죽게 하고 싶었다. 속에 품은 앙심이 사라질 때까지.

「그만해!」

찢어질 듯 소리를 지르는 이은서.

서정완이 천천히 야구 배트를 높이 들었다. 정유환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휘익. 야구 배트가 정유환의 어깨에 떨어졌다. 짧게 비명을 지른 정유환이 무너진다.

「제발 그만해!」

이은서가 울부짖었다.

「으윽!」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내던 정유환이 흔들린다.

슬로 모션으로 쓰러진 정유환이 흐릿해지는 눈으로 이은서를 보았다. 울고 있는 이은서를 보던 정유환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연출 너무 뻔한데.”

보라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이래야 재밌지.”

유수한이 툭 대꾸했다.

그리고.

「뭐야!」

김 비서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