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38화 (38/175)

38. 키스?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청혼하는 겁니다. 당신에게.」

“꺄아아아악!”

큰 스크린이 있는 오피스텔.

이 오피스텔을 빌린 사람은 이경민이었다. 요즘 이경민은 유수한 덕질을 본격화하기 위해서 파랑새에서 팬덤을 독립시켰다.

웹사이트를 만들고 파랑새에서 유입된 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시간’의 첫 방송이 임박하고 있었고 팬들을 모아 오피스텔을 빌렸다.

바로.

드라마 ‘시간’ 상영회였다.

「그 반지 계속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

첫 회.

유수한의 분량은 처참했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모습이 첫 장면, 그다음은 사고를 치고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 이후에는 분량이 없었고 막바지에 돼서야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신의 마음을 갈구할 생각도 없고.」

지금 유수한은 다시 사회에서 나와 살 궁리를 찾다가 이은서를 만나러 왔다. 이은서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생기 없는 눈으로 정유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살아갈 의미도 함께 잃었다.

그녀가 운영하는 유성 백화점은 이은서와 다르게 굴러가고 있었지만, 이은서는 위태로웠다. 허수아비 CEO. 언제든 그 자리를 박탈당할 수 있다.

「그러니.」

정유환이 이은서에게 다가가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합시다.」

다시금 꺅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반 날티 나던 정유환은 병원에 갇혀서 피폐해졌고, 사회에 다시 나와서는 다소 차분해져 있었다. 핏기가 없어진 듯 창백한 얼굴은 덕후의 심장을 울렸으며 담담하게 대사를 읊는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원 대본에서 본격적인 두 사람의 만남은 2회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본래 1회의 마지막은 조성운의 죽음이었지만 이승혁 감독이 수정을 원한 것으로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유환이 남자 주인공인데, 마지막은 정유환과 이은서가 함께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덕분에 조성운의 죽음은 더 빠르게 이루어졌고 그 말인즉슨, 조성운 역할 자체가 기존보다 더 축소되었다는 뜻이었다.

“대박!”

그리고.

만약 원 대본대로 내용이 흘러갔다면 지금 모인 팬들은 적은 분량에 화를 냈을 것이다. 이경민은 뒤이어 흘러나오는 예고를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하고 있었다.

“이건 대박이다.”

말할 것 없이 이건 대박이었다.

초반 흡입력이 무척 좋았다. 조성운과 이은서의 비운의 사랑에 이어서 새로 등장한 남자 주인공 정유환.

사랑 없이 인연이 닿은 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어투로 청혼하는 유수한은 묘하게 멋있었고 섹시했다. 사랑이 담기지 않은 고백에 왜 마음이 설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거 누가 먼저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이경민이 멍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유수한이요.”

“저도요.”

“백퍼 정유환이 먼저 좋아해야 해요.”

의견이 하나로 모인다.

이경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정유환이 사랑 갈구하면 돌아 버릴 것 같지 않아요? 지금도 충분히 섹시한데.”

“미치죠. 지 입으로 마음 갈구할 생각 없다는데. 그거 복선이라니까요?”

“맞아요. 백퍼 복선. 정유환 그 말 하고 먼저 사랑에 빠져서 애걸복걸할 거 백퍼예요.”

“이왕이면 후회 남주면 좋겠다.”

“저도요. 후회 남주 소취.”

결론은 하나였다.

“지독하게 후회하고 울어라! 유수한!”

* * *

그 어느 때보다 촬영장이 고요하다.

유수한 역시도 초조한 얼굴로 대기 중이었다. 지난밤 방영되었던 ‘시간’의 첫 방송 실시간 시청률은 나쁘지 않았다. 이왕이면 첫 회부터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한다면 좋겠지만, 딱 7-8%만 나와도 만족할 수준이었다.

“닐슨 떴습니다!”

이윽고 조연출이 종이 하나를 들고 뛰어왔다.

“1회 시청률 8.9%입니다!”

기대했던 두 자릿수는 아니었지만, 고무적이었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고 지금까지 죽을 쑤던 SBC였기에 더더욱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딱 좋네.”

긴장하던 이승혁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10% 고지를 넘으면 좋겠지만, 그 역시도 부담감이 뒤따라온다. 첫 시작은 좋았으나 뒤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는 경우도 숱했다.

이 정도면 부담감 없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시작하기 충분했다.

“TNMS는 아직인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9.2%입니다!”

“좋네.”

이승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 분위기가 화색이 돈다. 지금 ‘시간’의 첫 회 시청률이 올해 SBC 드라마 시청률 통틀어 최고 시청률이었으니 말 다 했다.

그리고 유수한 역시도 마음이 뿌듯했다.

[HOT] 유수한 무미건조 청혼 “결혼합시다.” +168

오늘 아침부터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반응을 확인했다.

이승혁 감독의 생각이 옳았다. 1회 마지막은 주인공이 장식해야 한다는 말. 첫 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장면은 역시 주인공이 붙은 장면이었다.

- 유수한 무미건조한 청혼 개 섹시해 시발

⌞말해 뭐해 얼굴이 이미 섹시함

⌞⌞아 진짜 유수한 요즘 얼굴 개도른

⌞⌞⌞그냥 바로 키갈하면 안 되냐

⌞⌞⌞⌞되겠냐?

웃으며 반응을 확인한다.

- 이건 그냥 분위기가 다 했어 뭐 하지도 않는데 섹텐 뭐냐

⌞와 진심... 섹텐 돌았음

⌞⌞유수한 눈빛이 걍 도른자임

⌞⌞⌞민서온도 미쳤어 진짜 넋 나간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게 또 묘하게 섹텐 오짐

⌞⌞⌞⌞섹텐도 섹텐인데 둘이 얼굴합이 너무 잘 맞더라

⌞⌞⌞⌞⌞얼굴합 ㅇㅈ

섹텐, 섹텐이 뭐지.

미간을 좁히고 골몰히 생각하던 유수한이 인터넷에 섹텐을 검색했다. 그리고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오 마이 갓.

요즘 사람들은 참 말을 쉽게 한다.

“형, 식사하고 오시죠. 촬영 세팅 늦어진다고 미리 식사 해결하고 오래요.”

“그래.”

대본을 들고 일어났다.

밥차도 좋지만, 가끔은 따로 식사를 하는 것도 좋다. 오늘 메뉴는 찜닭이었다. 자리에 앉은 유수한이 익숙하게 물을 따라 테이블에 놓았다.

“오늘 형 긴장되겠어요.”

그 말에 유수한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오늘 처음으로 그건데.”

사실 지금 유수한은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어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연습이었다.

처음 해 보는 연기라 걱정이었고 현장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잘해야 할 텐데.”

유수한이 한숨을 푹 쉬며 물을 마셨다.

* * *

김대한은 경험이 없다.

연기 경험도 없었고 여자 경험도 없었다. 곁에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감정 표현도 서툴렀고 그 모든 것은 연기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대한은 새로운 몸을 얻어 하나하나 경험해 나가고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배워 나갔고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지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컷! 수한 씨!”

계속 이어지는 NG에 이 감독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계속 그렇게 목석같이 있을 거야?”

지금까지 유수한은 현장에서 크게 실수를 하지 않았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대사를 곧잘 외웠고 모범생다운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수한은 크게 헤매고 있었다.

기존 유수한은 연기는 특출 나지 않았지만, 탁월한 재주 하나는 가지고 있었다.

바로 키스씬.

기존의 유수한은 키스씬 장인으로 불렸다.

“NG!”

벌써 1시간째.

유수한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촬영은 끝없이 딜레이 되었다.

시골 병원의 작은 병실.

정유환은 상처가 가득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다. 정유환이 이은서를 의식하다가,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건드리면 그때부터 불이 붙는다.

그리 오래 걸릴 촬영은 아니었다. 감정씬이었으나,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컷이었기 때문에 짧게 치고 가야 할 장면이었지만.

“컷! 다시!”

유수한에게는 쉽지 않은 연기였다.

“야, 유수한.”

그리고 잠자코 유수한이 템포를 찾기를 기다리던 민서온도 지쳤다. 두 사람의 사랑은 부정을 거듭하며 느리게 진행되었다.

정유환은 이은서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토록 이은서를 막 대하고 이용하기만 했던 그는 끝내는 후회한다.

이제야 비로소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에서 유수한은 도무지 정유환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랑 키스하는 게 그렇게 싫으니?”

늦어지는 촬영에 유수한을 리드하려던 민서온은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자, 짜증이 밀려왔다. 옛날 드라마와 다르게 지금은 그저 가볍게 입술을 붙여서는 곤란했다.

더군다나 드라마 ‘시간’은 정통 멜로를 표방하는 작품이었기에 더욱 격정적인 로맨스를 그려야 옳았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다소 상기된 얼굴로 유수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모습은 곤란하다.

민서온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다가오는 이승혁 감독을 보았다.

“감독님, 죄송한데 좀 쉬는 시간 주실 수 있을까요?”

남주가 정신을 못 차리면 여주가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지금 유수한은 마치 처음 키스를 하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현장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해졌고 이 분위기에서는 더 굳은 얼굴이 되어 실수만 연발할 것이다.

“쟤가 정유환 정신 차리게 하고 올게요.”

괜한 이유로 저러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추며 유수한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예전 약았던 유수한은 보이지 않았고 성실한 유수한이 나타났다. 덕분에 쓰고 있던 색안경도 벗겨진 지 오래였다.

“나와. 커피 한잔하자.”

유수한은 기가 죽은 채로 민서온을 따라갔다.

며칠 동안 혼자서 나름대로 연습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연기는 노력으로 극복해 왔던 유수한인데, 처음으로 극복이 되지 않았다.

“여긴, 카페가 아닌데요……?”

그 물음에 기가 찬 듯 민서온이 미간을 좁히며 유수한을 응시했다.

“사람 앞에서 연습하고 싶니?”

“네?”

“고장 난 정유환 고치려고 하는데, 카페에서 키스하잔 그 말이야?”

“아, 아니요!”

“타.”

차 문이 열리고 유수한은 엉거주춤 차에 올라탔다.

남의 차는 처음이었다. 민서온의 성격답게 차 안은 깨끗했고 널브러진 물건 하나도 없었다. 뒤이어 차에 올라탄 민서온은 매니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딱 25분 후에 문 열어.”

그 말을 남기고 차 문을 닫는 민서온이었다.

좁은 공간.

유수한은 어색한지 창밖을 보다가 이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민서온은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7화. 씬 78.”

그 목소리에 유수한이 귀를 기울인다.

“시골 병원. 정유환이 창밖을 바라보며 침대에 앉아 있다. 그 앞에 말없이 앉아 있는 이은서. 유환은 곁눈질로 이은서를 의식하고 있고 은서는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묘한 기류가 흐르고 유환이 손을 움직여 이은서의 손가락 끝을 툭 건드린다.”

나지막하게 지문을 읽던 민서온이 유수한을 보았다.

“자, 여기서 정유환은 무슨 감정일까?”

난데없는 퀴즈였다.

그리고 민서온은 살짝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이렇게 하나하나 눈높이를 맞추어 연기를 가르쳐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남과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늘 벽을 세우고 사는 사람이 민서온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유수한을 위해 친절히 연기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물론 유수한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 그는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이상한데. 아무튼. 요즘 유수한은 많이 이상했다.

“계속 정유환은 이은서를 의식해 왔어요. 이은서가 다칠까 봐 걱정하고 지켜 줄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해 놓고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요.”

“그래. 그래서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정유환은 이은서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를 의식하고 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막연했다.

어떤 감정에서, 어떤 분위기에서 키스를 하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아직 연애조차 해 보지 못한 사람이 유수한, 아니, 김대한이었으니까. 대본을 읽고 또 읽어도 막연했다. 말하자면 연기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모르긴.”

“…….”

“왜 정유환이 키스하겠니?”

“…….”

“하고 싶어서.”

민서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정유환은 이은서를 사랑하기 때문에 키스하고 싶은 거야.”

탁.

대본을 내려놓은 민서온이 유수한을 보았다.

“좋아하면 더 닿고 싶은 게 당연하고 키스하고 싶은 게 당연해. 정유환의 욕망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 네가 정유환인데, 네가 그 정유환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잘못된 거야.”

유수한이 멍하니 민서온을 보았다.

그 말을 듣고 가만 생각해 보았다. 그 말이 맞았다. 유수한은 어렵고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저 연기였고 정유환이라면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장면이었다.

키스씬 영상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 입술이 부딪힌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몸이 굳었고 이성도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할 수 있겠어?”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한아.”

민서온이 유수한에게 조금 더 밀착하며 속삭였다.

“정유환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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