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37화 (37/175)

37. 팬 덕후 유수한

유수한 덕질은 개혜자다.

야심한 밤.

서포트를 마치고 유수한에게 받은 사인 물품을 정리하던 이경민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함께 서포트를 준비했던 팬들도 마찬가지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유수한 더 좋은 사람 같아요!”

사실 유수한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은 이경민이 유일했다.

다른 팬들은 예능에서 보인 유수한의 모습이나 단막극을 보고 하나둘 유입되었지만, 그의 소문을 어느 정도는 믿고 있었다.

이경민이 핏대를 세우며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팬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이경민은 무리를 해서라도 커피차 서포트를 준비했다.

실제로 봐야만, 유수한의 진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그랬잖아요. 진짜 좋은 사람이라니까.”

이경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도 덕질 많이 해 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에요.”

팬이 커피차를 촬영 현장에 보내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갑게 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팬을 보면 좋아하는 건 기본이었지만,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수한은 차에 있는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꺼내 왔고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사인을 해 주었다.

“여기서 제일 탐나는 선물이 뭘까요?”

이경민이 종이 박스에 모자를 조심스럽게 넣으며 말했다.

“저는 티셔츠요. 되게 자주 입었다고 했잖아요.”

“저는 모자. 그 모자 기억나요. 단막극에서도 썼잖아요. 낡았지만, 명품이고.”

“맞아요. 모자는 진짜 소장 가치 있음.”

여기 모인 팬들은 유수한을 직접 만나 봤다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물론 사인을 챙겨 두긴 했지만, 유수한의 소장품은 다른 팬에게 양보해야 마땅했다. 노트북으로 열심히 편집 중이던 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진짜 잘생기긴 했다.”

영상을 찍으면서도 생각했지만, 따로 색 보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얼굴이었다. 노숙자 역할을 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거 편집하는 게 아까울 정도라니까요.”

그 말에 포장하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화면이 실물을 못 담아요.”

늦은 시간.

자신의 할 일을 미루고 모인 사람들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하나같이 유수한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우선 사진은 보정 끝났어요.”

포장을 하던 이경민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커피차 서포트 현장 스틸 컷 보정을 마쳤고. 유수한에게 받은 역조공 물품도 모두 찍어 정리해 두었다.

이제 업로드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거 기다리는 사람 많으니까, 먼저 업로드할게요.”

이경민은 파랑새 유수한 서포트 계정에 들어갔다.

계정 아이디는 @yousoohan_Shining

그리고 계정 이름은 ‘빛나는 유수한’이었다.

* * *

[HOT] 유수한의 미친 역조공 클래스 +214

커피차 서포트 다음 날.

유수한은 밤샘 촬영 중이었다. 근처 숙박으로 잡아 놓은 호텔에서 몇 시간 자고 나오긴 했지만, 푹 쉰 건 아니어서 근육통이 몰려왔다.

전날은 커피차 덕분에 활기차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차 안에 있던 필요한 물건들이 싹 날아갔지만, 그래도 뿌듯해하고 있는 유수한이었다.

그리고.

- 돈 쓰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거 존나 꼰대 같은데 다정하다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꼰대 같은데 스윗함

⌞⌞잔소리 심해서 팬들 나중에는 대답도 안 해 ㅋㅋㅋㅋ

⌞⌞⌞아 ㄱㅇㄱ ㅋㅋㅋㅋㅋㅋㅋ

촬영 대기 시간, 유수한은 핸드폰으로 글 몇 개를 읽어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파장이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오늘 서포트 현장 영상이 업로드된 건 알고 있었지만, 정신이 없어서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어제 오후에 와서 몇 시간 촬영 현장에 머물다가 돌아간 팬들은 언제 시간이 나서 이 모든 작업을 처리했는지 의문이었다.

잠은 자나?

그런 걱정이 든다.

「이거라도 가져갈래요? 더 주고 싶은데.」

뒤늦게 커피차 서포트 영상을 확인하던 유수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이이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유수한이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주었다. 아직 초여름이었고 해가 지면 꽤 쌀쌀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자주 입던 옷이었다.

“나도 참 주책이네.”

팬들은 이러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기어코 유수한은 바람막이에 사인을 했다.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 듯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커피차까지 받아서 뭐라도 더 주고 싶었다.

- 와, 입고 있는 바람막이 벗어 주는 거 뭐야 존멋

⌞이왕 하는 거 티셔츠도 가져가라고 벗었으면 더 지렸을 듯 ㅋㅋㅋㅋㅋㅋ

⌞⌞변태 또 왔네

⌞⌞⌞이 구역에 변태 존나 많음 ㅋㅋㅋㅋㅋㅋㅋ

별거 아닌 일이다.

그저 받은 만큼 주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요즘 유수한은 사람들은 아주 작은 거에도 좋아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책임감도 느낀다. 부끄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책임감.

“형, 차에서 좀 쉬세요.”

유수한은 늘 촬영장에 머문다.

다른 배우들은 대기 시간에 차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지만, 유수한은 그러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현장에 머물며 다른 사람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와 함께 어울리며 배우는 것도 많았다. 드라마를 만드는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힘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게 된다.

“괜찮아. 커피나 하나 사다 줄래?”

걱정하는 김민수를 돌려보낸 유수한은 팬이 선물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팬에게 선물 받은 의자는 소중해서 앉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빛나는 유수한]

이름이 새겨져 있는.

빛난다는 그 말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예전 김대한은 빛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둠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

“형, 커피요.”

이제 꽤 가까워진 김민수는 예전처럼 극존칭을 쓰지 않았다.

“고맙다.”

유수한은 커피를 마시며 촬영 현장을 지켜보았다. 눈이 빛난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서 몸이 힘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유수한은 다른 이의 연기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이따금씩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연기에 대한 열망은 쉬이 식지 않았고 오늘도 유수한은 배워 나갔다.

* * *

SBC 미니시리즈 ‘시간’의 티저.

전날 공개된 티저는 SBC의 공격적 마케팅과 함께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올해 SBC 드라마 성적은 최악이었다.

단 하나도 10%를 넘긴 드라마가 없었고 화제성이 붙은 드라마 역시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예정되었던 편성도 취소되는 등 드라마국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침체되었다.

그렇게 등장한 드라마가 ‘시간’이었다.

스타 감독 이승혁과 믿보작으로 성장하고 있는 김우리의 만남. 더불어 성인 배우로 발돋움하면서 단 한 작품도 실패한 적 없다는 배우 민서온 합류까지. 지금까지 SBC ‘시간’은 성공이 예정되어 있는 듯 보였다.

딱 하나.

방송국 수뇌부가 엄청나게 반대했던 남자 주인공 캐스팅 유수한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드라마 구성이었다.

「우리의 시간은 고여 있어.」

티저가 공개되고 SBC 마케팅팀은 물론, 홍보를 맡은 대행사까지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더불어 같은 시간대에 맞붙을 타 방송국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SBC는 공중파답지 못한 행보를 보여 왔다. 작년부터 이어진 부진을 씻을 드라마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었다.

과연.

그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세간의 관심이 모였다.

「다시 흘러갈 수 있게.」

유수한의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내레이션.

이윽고 화이트 셔츠를 입고 나타난 유수한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고 유수한은 손을 뻗는다.

「우리의 시간을 되찾자.」

그리고 보이는 사람.

휠체어에 앉은 민서온이 그늘진 얼굴로 유수한을 올려다본다. 유수한의 손을 잡으려는 듯, 민서온이 손을 뻗는 그 순간.

휘청.

마치 추락을 예상했다는 듯 민서온이 휠체어와 함께 추락한다.

이윽고.

유수한 역시도 서서히 사라졌다.

툭.

주인공이 사라진 화면에 핏방울이 떨어지고 핏물이 번지며 화면에 타이틀이 떠올랐다.

「SBC <시간> 7월 16일 첫 방송」

티저는 짧았지만, 드라마의 분위기를 살렸다.

유수한의 묵직한 내레이션과 표정 연기는 부정적인 반응을 한풀 꺾게 하기 충분했다. 여전히 유수한을 향한 불신에 찬 분위기가 남아 있었지만, 나름 분위기는 긍정적이었다.

“대표님,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 찍었습니다.”

티저를 확인하던 이성실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음, 유수한은 3위네요.”

“그만 말해.”

마케팅 팀장이 티저 반응을 세밀하게 확인하고 있었고 이성실 앞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이성실은 유수한을 믿지 않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물론 미니시리즈 남주라는 성과를 가져왔을 때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지만, 여전히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유수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2차 티저는 다음 주에 공개될 예정이고요.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 요즘 유수한이 변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알았다니까.”

그러니 틈만 나면 유수한 칭찬을 귀에 딱지 앉도록 듣는 이성실이었다. 회사 분위기는 유수한에게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유수한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많은 사람들이 달라진 유수한을 겪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성실 역시도 유수한이 일정 부분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믿기 힘들지만, 연기로 그 모든 것을 꾸며 낼 수는 없었다.

“반응 읽어 드리겠습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정통 멜로냐. 민서온 픽이면 일단 믿고 본다. 유수한 잘생겼다. 오랜만에 작감배 모두 마음에 든다. SBC 이번에도 죽 쑤면 그건 그냥 방송국 탓.”

“그만!”

이미 이성실도 인정했다.

유수한이 다시 궤도에 오른 배우라는 걸. 오히려 예전보다 더 긍정적인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약점이었던 연기력도 보완했고 성격 역시도 한결 나아졌다.

단막극은 그렇다 치고 예능을 보았을 때는 적잖이 놀랐다.

사람의 눈빛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수한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총명해 보였고 웃는 모습 역시도 악의 하나 없는 투명한 얼굴이었다.

“지금 이거 시위지?”

이성실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마케팅 팀장을 보았다.

“다시 유수한에게 사람 붙여야 한다고 지금 시위하는 거지?”

“제가 이러다가 죽겠습니다.”

“네가 왜 죽어?”

“유수한 팬 말이에요. 민서온은 매일 스틸 컷이 나오는데, 왜 유수한은 없냐고 성화라고요.”

“…….”

K엔터는 배우 하나하나에게 전담 카메라맨을 붙인다.

공식적인 자리는 물론, 촬영장에서도 촬영을 했고 보정을 한 후에 공식 인스타 계정에 업로드했다. K엔터의 스틸 컷은 팬 사이에서 유명했고 유명한 덕후를 섭외한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그 스틸 컷에 유수한이 빠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수한 팬들이 난리가 났고 왜 사진이 없냐며 매일같이 항의하는 모양이었다.

“알았다.”

이성실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제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유수한을 제대로 서포트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했던 고생 탓이었다.

“알았으니까 붙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건 괜한 고집이라는 걸.

한편으로는 다른 감정도 스며들었다. 유수한이 변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이 직접 발굴한 원석이 그냥 돌이었다는 걸 깨닫고 쓴맛을 보았다가, 다시 확인해 보니 진짜 보석이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경계하게 된다.

늘 이러다가도 헛발질을 거하게 하던 놈이니까.

‘앞으로는 실망시킬 일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말을 다시 믿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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