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유수한 아니라고
“그거 유수한 맞아요?”
“아니에요.”
이승혁 감독이 딱 잘라 대답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자를 걸 그랬어.”
“누굴, 유수한이요?”
“아니요. 유수한 아니라니까.”
오늘 스태프 포함 이승혁 감독도 기사를 확인했다. 불화설이 재기된 배우들은 이니셜로 대신했지만, 누굴 지칭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기사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은 유수한이었다.
이 감독은 내부 단속을 하면서 누구의 입에서 터진 말인지 찾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되레 배우 매니지먼트에서 새어 나온 건 아닌지 의심 중이었다.
“김 PD, 이리 좀 와 봐.”
마침 포스터 촬영 현장에 있었던 메이킹 PD가 지나가고 있었다.
“포스터 촬영 현장에서 누구 문제였어?”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일부러 현장 스태프 앞에서 큰 소리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야 남주를 향한 가시 돋친 시선이 가라앉을 것이다.
“유수한 문제였지?”
촬영 감독이 믹스커피를 마시며 재밌다는 투로 물었다.
“아니요. 수한 씨는 완벽했죠. 착하고 세심하고.”
“응?”
전혀 뜻밖의 대답인 듯 촬영 감독의 눈이 커졌다.
“저기 오네요. 새롭게 갑질 하시는 분.”
김 PD의 말에 다들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말끔하게 수트를 입은 최은호가 대본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
“네. 최은호 씨가 갑질 제대로 했어요.”
“갑질을?”
“스태프에게 무례하더라고요. 조심들 하세요. 그게 본래 성격인 듯하니.”
연예인병은 이름만 조금 알려지면 모두 걸릴 수 있는 병이었다. 최은호는 발병이 조금 늦었지만, 아무래도 남주로 물망에 오른 것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한 모양이었다.
“좀 의외네.”
촬영 감독이 얼떨떨한 듯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저 녀석 예전에는 괜찮았거든.”
최은호 데뷔작을 함께했던 촬영 감독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문제는 당연히 유수한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빌런이야.”
이 감독이 최은호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누울 자리도 보고 뻗어야 하지 않겠어요?”
* * *
유수한의 첫 촬영은 병원이었다.
첫 화에서 병원 씬이 있기 때문에 환자복을 입고 찍었다. 그다음은 주로 야외 촬영이었고, 오늘 처음으로 세트장 촬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늘 그렇듯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도 스태프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기 위해 노력했고, 서글서글한 모습을 보여 주며 기존에 있던 이미지를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촬영 감독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악수를 하고 차례차례 스태프에게 살갑게 다가갔다. 그리고 유수한이 오기 전까지 여전히 그를 못 미더워하던 촬영 감독이 혀를 찼다.
지금까지 B팀과 주로 촬영했던 유수한이었기에, A팀 촬영 감독은 처음 보는 셈이었다. 유수한의 성실한 태도에 촬영 감독은 자신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비교되네.”
스윽.
이미 촬영하고 있던 최은호를 본다.
최은호는 등장하자마자 스태프를 못 본 체하며 대본만 보고 있었다.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굳은 얼굴을 유지했고 딱 일만 했다.
그러다가, 소품 세팅이 늦어지면 들으라는 듯 작게 투덜거렸다. 그 소리를 당연히 음향 감독이 들었고 촬영 감독에게 작게 상황을 전해 주었다.
“지랄이네. 저놈.”
신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빠! 왔어요?”
세트장에 대기하고 있던 주민하가 살갑게 반겼다. 오늘 촬영은 처음으로 주연 4인방이 모이는 날이었다.
“오늘 글쎄요. 최은호가요.”
“이제 오빠라고 안 하네?”
“짜증 나서 생략함.”
“그래.”
대체 그간 세트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성격 좋은 주민하마저 등을 돌리게 했을까.
유수한이 궁금해하며 주민하의 말을 들었다.
“오늘 별 트집을 다 잡더라니까요?”
“무슨 트집?”
“아니, 내 연기 톤이 별로라고 계속 끊는 거예요.”
“연기 톤이?”
유수한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주민하보다 연차가 있다고 해도 나이 차가 그다지 나지 않는 배우였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배우의 연기를 끊는 건 당연히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건 좀 무례하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지가 감독이야, 뭐야. 이 감독님은 가만있는데 말이에요.”
주민하는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가만 보니 최은호는 제대로 분위기를 잡을 생각인가 보다. 그게 역효과가 나는 줄도 모르고.
“하도 그래서 결국 감독님이 최은호 끌고 갔어요.”
“가서?”
“그건 몰라요. 아무튼 감독님께 혼났는지 그 이후에는 좀 조용함.”
“다행이네.”
“다행은요. 이제 타깃이 스태프로 바뀜.”
“뭐?”
“아무튼 보면 알아요.”
최은호가 가지가지 했나 보다.
유수한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만졌다. 여전히 주민하가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얘기하고 있었고 이제는 보라까지 나서서 합세하고 있었다.
“포스터 촬영에서도 진상이었잖아요.”
보라는 모든 일에 귀찮아하지만, 그 어느 현장이든 늘 귀를 열고 사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최은호가 했던 짓도 모두 지켜보았다.
“오늘 기사 봤어요? 민하 씨?”
주민하와 보라는 동갑이었고 동갑답게 친구처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무슨 기사요?”
“아니, 오늘 불화설 기사 났는데 그게 수한 오빠 탓이라잖아요.”
“어머! 그게 무슨 소리래?”
“그니까요!”
“오빠, 억울하겠다.”
귀에 피가 날 것 같다.
유수한은 이 두 여자가 다른 곳에 가서 수다를 떨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대본을 읽었다.
“오빠, 내가 도와줄까?”
“응?”
대본에서 시선을 뗀 유수한이 주민하를 보았다.
“나 넌씨눈 짓 잘하거든.”
“넌씨눈? 그게 뭔데?”
“아휴. 오빠 진짜 젊게 살자. 응?”
답답한 듯 주민하가 한숨을 쉬었고 보라가 바로 설명해 준다.
“넌씨눈. 눈치 없는 사람 말하는 거예요.”
“아, 그래? 처음 들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옛날 사람 같다니까.”
주민하가 툴툴대더니 다시 입을 조잘대기 시작했다.
“항상 드라마 시작 전에는 연예 프로 인터뷰하잖아요?”
“그렇지.”
“거기서 내가 제대로 먹여 줄게.”
“네가?”
“응, 나 그런 거 잘해요.”
“근데 네가 왜?”
“왜긴요.”
주민하가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최은호 개같으니까 그렇지.”
늘 그렇듯 주민하는 감정에 솔직했다.
“그러지 마.”
하지만 되레 유수한은 남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최은호가 싫은 건 유수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개인감정을 일에 섞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리 공과 사는 구분하자.”
그 말을 하고 유수한은 대본을 마저 읽었다.
* * *
처음 유수한이 되었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이 평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안 좋은 이미지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간’ 촬영장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유수한이 촬영에 들어갔을 때, 다들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은호 씨, 대사 맞춰 봐야죠.”
대본을 들고 최은호에게 다가갔다.
“내가 왜?”
“네?”
“난 대사 안 맞춰.”
뭐지, 이 초딩은.
여전히 케케묵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주변에 보는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터 촬영 현장에는 드라마 현장 스태프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손 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 없는데?
“뭐, 그러세요.”
유수한은 최은호를 무시하고 혼자 리허설을 진행했다. 대사를 눈으로 훑고 어떻게 움직일지 계산했다.
이윽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레디, 액션!”
턱.
유수한은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소파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손톱 거스러미를 뜯고 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최은호가 등장했다.
“어, 왔어?”
유수한은 손을 들어 살가운 척하며 최은호를 반겼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최은호의 대사가 이어지고 유수한이 테이블 위에 놓은 발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냥, 요즘 아버지 신임을 받는 변호사가 누군지 궁금해서.”
유수한의 연기 톤은 가벼우면서도 발성이 탄탄해서 듣는 사람 귀에 꽂혔다. 최은호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유수한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예의가 없으시군요.”
“예의?”
유수한이 피식 웃고는 이죽거리며 대사를 쳤다.
“난 충분히 예의를 차리고 있다고 보는데?”
“나가세요.”
“벌레에게 더 예의를 차려야 하나. 말로 하는 것도 충분히 예읜데 말이야.”
“정유환 씨!”
“어딜 감히.”
싱글벙글 웃고 있던 유수한의 표정이 싹 굳었다.
흠칫.
최은호가 당황한 듯 표정을 굳는다.
“네깟 게 뭐라고 내 이름을 불러? 감히?”
분위기를 휘어잡은 유수한이 최은호를 응시하다가 이내 씩 웃었다. 다시 능글맞은 정유환의 얼굴이었다.
“긴장하지 마.”
자리에서 일어난 유수한이 최은호에게 다가갔다.
툭툭.
최은호의 어깨를 두드리던 유수한은 그의 넥타이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없는 것들은 꼭 이렇게 기를 쓰고 발악하더라.”
스윽.
넥타이에서 손을 뗀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대체 뭘 원해서. 응?”
유수한이 맡은 정유환은 겉보기에는 철없는 재벌 3세가 맞았다. 그 누구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해 정신병원을 드나드는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눈치는 기민했다.
정유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은서의 손을 잡으려 한다.
그리고 그걸 방해하는 사람이 최은호가 맡은 서정완이었다.
“그럼, 서 변.”
유수한이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다음에 보자고.”
툭.
대본에는 없었지만, 유수한은 서정완의 어깨를 밀치고 가며 끝까지 도발 어린 연기를 보여 주었다.
“컷!”
그리고 최은호는 얼굴을 구기며 거친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는 유수한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유수한이 최근 출연한 단막극을 보았지만, 그리 위협적인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늘 하던 대로 윽박지르는 연기로 그를 짓누를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분위기에 짓눌린 사람은 최은호였다.
싱글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낮추고 표정을 굳힌다. 그 표정 변화가 자연스러워서 순간 기 싸움에서 밀리고 말았다.
“정완이는 얼굴에 힘 좀 빼요.”
모니터링을 하던 최은호의 귀에 지적이 들어왔다.
이미 최은호의 기는 포스터 촬영 현장에서 한번 꺾인 상태였다. 그리고 연기로 박살 내 주겠다고 생각했던 유수한이 생각보다 더 연기를 잘하자 기가 한 번 더 꺾였다.
“네, 알겠습니다.”
굴욕적이었지만, 유수한의 기에 밀려 얼굴이 굳어졌던 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계속 촬영은 이어졌다.
유수한은 여러 가지 애드리브를 준비했고 모든 장면에서 동일하게 연기했다. 애드리브도 머리가 좋아야 할 수 있는 연기였다.
풀 샷과 바스트 샷에서 연기가 조금만 달라도 티가 난다.
모든 더블 액션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걸 유수한은 모두 계산했다는 듯, 능숙하게 선보이고 있었다.
‘제길.’
그래서 최은호는 속수무책으로 유수한의 연기에 맞추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 본 상대였기에,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조급함이 새어 나왔다.
“식었잖아!”
최은호는 울분을 만만한 스태프에게 풀었다.
디렉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마 감독에게는 풀지 못했고 작은 거 하나하나 매니저를 드잡았다.
그건 배우들이 자주 사용하는 비열한 방법이었다.
뭔가 불만스러울 때마다 들으라는 듯 매니저를 잡는다.
“내가 따뜻한 커피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배우의 불성실한 태도는 현장 분위기를 가라앉게 한다.
유수한은 그런 최은호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출연진 사전 미팅 때도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장에서는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서 저렇게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건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이었다.
스태프 사이에 소문은 빠르고 그걸 경험해 본 사람이 유수한이었다.
비록 지금의 유수한이 직접 했던 행동은 아니었지만, 사람 사이에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지 유수한은 알고 있었다.
[HOT] 그거, SBC 시간 불화설 말이야. 문제는 유수한이 아니라 최은호임. +1007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