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수습 못 할 말이면 하지 마
개인적으로 민서온은 싸움에 휘말리는 걸 딱 싫어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또 아니었다. 데뷔 후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가며 톱의 자리에 오른 민서온은 연예계에서 꽤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이번 드라마는 나이가 비슷한 배우가 모인 작품이었다.
같은 소속사인 유수한의 성격이 걸렸던 것도 있지만, 비슷한 연령대가 모이면 경쟁이 붙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좋은 경쟁도 있었다. 연기를 잘하기 위한 경쟁은 늘 환영이었지만, 감정이 섞인 경쟁은 경계해야 했다.
우려했던 일은 결국 터졌다.
사전 미팅은 비공식적이고 서로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였지만, 포스터 촬영 현장은 아니었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주연 배우 둘이 다투는 건 보기 좋지 않았다.
“잠깐 쉬었다 하죠.”
민서온은 잠깐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다. 이른 시간부터 이어진 촬영에 다소 지쳐 있었고 최은호의 태도에 짜증도 났다.
연출 감독이 현장에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포스터 촬영 현장까지 감독이 세세하게 신경 쓰는 일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포스터 촬영은 미리 협의된 촬영 콘셉트를 기반으로 포토그래퍼가 진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사실 일전에 한번 최은호는 이승혁 감독에게 주의를 받았기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욕심을 부릴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를 지나치고 있다.
심지어.
‘민서온이 꽂은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이런 무례한 소리를 듣는 순간, 참고 있던 짜증이 폭발했다.
“30분만.”
촬영을 이어 나간 지 어느새 6시간이 흘렀다.
중간중간 간식을 먹으며 끼니를 대신했지만, 촬영을 주도하는 포토그래퍼도 점차 피로해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민서온은 스태프 일부를 내보내고 최은호 앞에 섰다.
“보는 눈도 줄었고, 해명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유수한 앞에서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던 최은호는 민서온 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유수한은 기가 찼다.
“누가 누굴 꽂았다고?”
민서온은 누굴 작품에 추천하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극히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고 연예계에서 이렇다 할 인맥도 그리 없었다. 게다가 유수한을 반대했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민서온 씨가 유수한 꽂은 거 맞잖아?”
“틀린 말 했으니까.”
“뭐라고요?”
“난 오히려 유수한 반대했거든요.”
“…….”
“최은호 씨는 주제 파악 좀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유수한은 한발 물러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어느새 주민하가 다가와 있었다.
주민하는 이 화제가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고 유수한을 툭툭 치며 말했다.
“와, 서온 언니 개빡친 듯.”
그 말은 사실이다.
민서온은 평소에도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라서 선뜻 말 걸기가 힘든 사람인데, 지금은 아주 어두운 오라를 풍기고 있었다.
“그냥 그쪽이 밀린 거잖아.”
민서온은 피곤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실력으로 밀렸어요. 그쪽이.”
여기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최은호였다. 그다음은 민서온, 유수한 순이었고 막내는 주민하였다.
주연 4인방 중에 가장 연장자가 막내도 안 할 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추해.”
그랬다.
굉장히 추했다.
“뭐라고?”
“그렇잖아요. 촬영 콘셉트 뻔히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치고 나오면 되겠어요? 최은호 씨. 협의라는 게 왜 있겠어요? 촬영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서로 협의하는 거예요. 그쪽은 서브답게 콘셉트를 전달받은 거고. 이제 와서 갑자기 그 콘셉트를 무시하겠다? 이게 대체 무슨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에요?”
말이 없는 성격이라 그렇지, 한번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남을 깔 수 있는 사람이 민서온이었다.
“헛소문도 퍼트리지 말고. 제발 나잇값 좀 하자니까요?”
“에이, 시발.”
결국 최은호는 격한 감정을 표출하고 말았다.
“말이 돼? 내가 실력으로 저 새끼한테 밀렸다고?”
결국 최은호의 매니저가 달려와 그를 말렸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다다랐다. 유수한은 서늘한 눈으로 최은호를 보고 있었다.
유수한에게 이 분위기는 나쁠 것 하나 없었다.
일부 스태프가 자리를 비웠지만, 많은 방송 관계자가 이 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알고 보니, 이 팀의 문제아는 유수한이 아니라 최은호라는 걸.
“감정이 많이 상한 것 같은데, 나가서 해결하고 오지?”
그리고.
“M엔터는 그 정도 상황 파악도 안 되나?”
때맞춰 등장한 이성실이 일침을 놓았다.
이성실은 시간이 남아 민서온을 볼 겸 겸사겸사 현장을 찾았다. 커피를 잔뜩 차에 실어 놓고 이동하는 중간, 김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대충 상황 파악을 하고 도착한 이성실은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는 최은호를 발견했다.
“내 배우에게 함부로 대하는 걸 보니까, 썩 기분이 좋진 않네.”
그리고 화살은 최은호 매니저에게 돌아간다.
배우는 배우가 상대하지만, 매니저는 매니저가 상대하는 법이었다.
물론 상대는 소속사 대표였기에 체급 차이가 어마무시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매니지먼트는 관계가 모두 이어져 있다. 최은호 매니저에게는 이성실이 대선배나 다름없었다. 최은호는 여전히 입에 욕을 달고 있었지만 매니저가 억지로 끌고 현장을 벗어났다.
“최은호 원래 저런 애였니?”
김민수가 고개를 젓다가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이번 드라마에 기대가 컸던 모양입니다.”
“쯧. 밀린 게 뭐 자랑이라고.”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던 상황은 이성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유수한은 갑자기 나타난 이성실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목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그래.”
이성실은 유수한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하게 유수한이 드라마 ‘시간’에 합류하고, 이성실은 단막극과 다르게 유수한을 케어하고 있었다. 전 직원에게 유수한에게서 손 떼라고 지시했던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역시 어느 현장이든 빌런은 존재한다니까요.”
이 모든 상황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던 주민하가 말했다.
“솔직히 난 수한 오빠가 주인공 된 거 좋은데.”
“왜?”
유수한의 물음에 주민하가 씩 웃었다.
“은호 오빠가 연기는 제법 하지만, 주인공다운 매력은 없잖아요.”
“그럼 난 있어?”
“있죠.”
“뭔데?”
“오빤 잘생긴 게 매력임.”
그 말을 한 주민하가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 웃어 댔다.
“솔직히 이왕 짝사랑할 상대라면 잘생긴 게 백번 낫지 않아요?”
“아, 그래?”
“아무튼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은호 오빠가 저러면 저럴수록 자기 밑천 드러내는 거니까.”
그저 이 현장에 딱 한 사람이 빠진 것뿐인데 분위기가 좋아졌다. 민서온도 표정을 풀고 이성실이 사 온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선배.”
그리고 유수한이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그 말에 민서온이 피식 웃는다.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니야.”
뜻하지 않게 휘말렸지만 상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했다.
아무리 보는 눈을 최대한 줄였대도 생각하는 그대로를 입 밖으로 터트릴 줄도 몰랐다. 그래서 더 상황이 길어질 뻔했지만, 좋은 타이밍에 이성실이 나타났다.
“근데 대표님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민서온이 커피를 마시며 이성실 대표를 보았다.
“일이 일찍 끝나서 겸사겸사 왔지.”
“절 보러 오신 거예요? 아니면.”
힐끔 유수한을 본다.
“겸사겸사라고 했다.”
그 대답에 민서온이 픽 웃는다. 최은호가 없는 현장 분위기는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스태프들도 K엔터가 사 온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거 촬영 안 하셨죠?”
그리고 유수한이 조심스럽게 메이킹 PD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럼요. 찍을 이유가 없죠.”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한잔하시고 오늘 일은 잊어 주세요.”
지금 현장에서는 유수한의 평가가 최은호보다 나았지만, 대중은 아직 아니었다. 최은호는 큰 인기를 얻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사건 사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수한은 이미지가 그렇지 못했다.
두 사람이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오면 되레 욕을 먹을 사람은 유수한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대중은 이미지를 먼저 생각한다.
“자, 분위기 다시 잡고 시작합시다!”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30분이라는 다사다난한 휴식을 마치고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 * *
최은호는 남은 포스터 촬영 동안 조용했다.
매니저에게 한소리 들었는지, 예전처럼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촬영을 마치고 유수한은 지친 얼굴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유수한.”
그리고 이성실이 손짓한다.
“너 어떻게 알았냐?”
“네?”
“그때, 그 대본.”
유수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이성실을 보았다.
“네가 망한다고 했던 작품 말이다.”
“아.”
잠깐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망했던가요?”
“어제 첫방이었다.”
“몰랐어요.”
“시청률이 처참해서.”
“앞으로 반등할 수도 있겠죠.”
“글쎄.”
이성실이 한숨을 쉬었다. 유수한의 말이 그냥 얻어걸린 수준일수도 있겠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작품이었다.
스타 작가와 스타 감독의 조합인데, 안 되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여니 평가가 달라졌다. 애초에 시청률이 문제가 아니었다. 방송 직전에 표절 시비가 붙었고 갑자기 주연 배우가 하차했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은 이어졌고 첫 방송 시청률은 2%도 넘지 못했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은 접고.”
요즘 이성실은 유수한이 마음에 걸린다.
특히 기대도 하지 않았던 단막극 ‘아임 홈리스’가 성공을 거두면서 더더욱 거슬리기 시작했다. 단막극으로 올 연말 상 받는 건 기정사실화되었고 단막극 자체의 작품성이 좋아서 ‘아시아 드라마 어워드’에도 초청되었다.
그리고 미니시리즈 ‘시간’ 캐스팅까지.
예상하지 못한 유수한의 행보였다.
“앞으로는 조금 기대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유수한에게 했던 말은 딱 하나였다. 제발 사고 좀 치지 말아 달라는 말.
“네, 앞으로는 실망시킬 일 없을 거예요.”
유수한이 힘주어 말했다.
이성실은 그런 유수한을 보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56>
포스터 촬영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출석 포인트를 확인한 유수한이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보며 화장실로 움직인다.
그리고.
[연예뉴스] SBC 미니시리즈 ‘시간’ 벌써부터 출연진 불화?
신경 쓰이는 기사 하나가 눈에 보였다.
변기에 앉은 채로 기사를 정독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드라마 관계자가 비밀리에 인터뷰를 했고 주연 배우 간에 다툼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유수한이 피곤한 듯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이런 기사가 올라오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은 사람은 역시 유수한이었다. 주연 4인방 중에 가장 이미지가 좋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HOT] SBC ‘시간’ 유수한 또 성격 나오나 봄 +457
역시나.
커뮤니티에서는 이 불화설의 문제를 유수한으로 보고 있었다.
- 유수한 성격 어디 가겠음? ㅋㅋㅋㅋㅋ 백퍼 얘가 꼬장 부렸다에 한표
⌞2222 두표 갑니다~
⌞⌞3333333 여기 세표요~
⌞⌞⌞4444444 올인 갑니다~
이번엔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고!
유수한이 억울한 듯 미간을 좁혔다. 지금까지 악플에 담담할 수 있었던 건, 지금의 유수한이 했던 짓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아니었다.
지금의 유수한이 얽힌 일이었고 잘못된 사실에 욕을 먹는 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어, 나야.”
그리고 마침 김민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사 방금 확인했어.”
이미 소속사에서 확인한 기사였고 전면 대응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유수한은 그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법인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대응 기사를 낸다고 해도 사람들 반응은 크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게 어느 측 인터뷰인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신경 안 쓰인다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진실은 언제고 드러날 거야.”
하지만 이런 시시콜콜한 잡음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솔직히 이 모든 것은 기존 유수한의 업보였다. 무슨 연유로 이런 보도 자료가 올라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난 그냥 하던 대로 연기로 보여 주면 돼.”
적어도 최은호에게는 그 어떤 것도 밀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 문제는 회사에 맡길게.”
통화를 마치고 유수한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