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33화 (33/175)

33. 남주는 나야

“좋다.”

전신 거울 앞에 선 유수한이 미간을 좁혔다.

선명한 복근. 거기에 몸에 적당히 붙은 근육. 이걸 만들기 위해 고생했다. 이번 역할은 틈만 나면 옷을 벗어젖히기 때문에 더욱더 근육이 필요했다.

그리고.

‘사실 수한 씨 몸이 생각보다 좋아서, 좀 혹하긴 했어요.’

그렇게 말하던 김우리 작가였다.

실제로 최은호를 보니 그리 몸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실 그냥 유행에 따라 몸을 키운 것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은 장점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준비했지?”

“네, 그럼요. 트렁크에 실어 놨어요.”

“잘했어.”

오늘은 포스터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유수한은 지난 일주일간 몸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 이유는 감독 때문이었다. 개인 컷 찍을 때 상체가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화이트 셔츠를 입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걸친 수준이었다.

단추를 모두 풀어 헤칠 작정이었으니.

“오빠! 왔어요?”

벌써 의상을 갈아입은 주민하가 제일 먼저 유수한을 반겼다.

“응, 일찍 왔네?”

“막내가 제일 먼저 와야죠.”

“좋은 막내네.”

대화를 나누며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촬영 콘셉트는 블랙과 화이트였다. 배경이 두 가지로 나뉘어서 메인 주연은 화이트에서, 서브는 블랙에서 개인 컷 촬영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단체 컷은 두 가지 색상이 오묘하게 겹쳐진 그레이였다.

“지금 메이킹 촬영 왔어요. 웃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포스터 촬영은 처음이라 긴장했는데, 주민하가 있어서 한결 나아졌다. 멀리서 스케치하듯 촬영하고 있는 메이킹 촬영팀이 보였다.

하나, 둘.

기껏해야 한두 명 붙을 줄 알았는데 카메라만 총 두 대였다.

“민하야, 이따 보자.”

대기실에 들어온 유수한은 매니저가 들고 오는 무거운 가방을 보았다.

쿵.

바닥에 떨어진 가방에서 무거운 아령이 나온다.

“펌핑하고 옷 갈아입자.”

거침없이 상의를 벗어던지고 아령을 들었다. 아령을 들어 올리고 다음은 바닥에 엎드려 푸시업을 시작한다.

“배우도 못 할 짓이네요.”

“시끄러.”

힘들어서 곱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운동을 시작하고 매일 아침에 일어나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게 익숙해졌다.

오늘 아침에도 상의를 벗어던지고 유심히 근육을 확인하던 유수한이었다. 확실히 몸은 좋아졌고 단순한 차림에도 옷이 살았다.

“후. 이 정도면 되겠지.”

이마에 맺힌 땀을 타월로 닦으며 유수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수한은 거울을 보며 복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리고.

“간지러워도 참아요.”

“네.”

하나 더 작업이 남아 있다.

지금 유수한은 복근 작업 중이었다. 이미 선명하게 복근이 생겼지만,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려면 작업이 필요하다. 붓질이 예사롭지 않았다. 복근에 화장을 하는 게 우습기도 했다.

드르륵.

작업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나왔다.

“어?”

그리고 바로 반기는 카메라에 흠칫 놀란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포스터 메이킹 촬영을 하러 온 PD였다.

“가볍게 스케치하듯이 찍을 거니까, 카메라 의식 안 하셔도 돼요.”

“아, 넵.”

하지만 신경 쓰인다.

노골적으로 카메라가 복근을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힐끔, 카메라를 보고 유수한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가렸다.

그러자 더 가까이 다가와 복근을 찍으려 든다. 물론 이것도 일이었다. 셀링 포인트가 있다면 과감하게 드러내는 게 좋겠지만, 아직 그런 뻔뻔함이 부족했다.

후다닥.

카메라를 피해 도망간 유수한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배우들에게 다가갔다.

“와, 대박.”

역시나 주민하는 가만 넘어가지 않았다.

“여기 있었네.”

“…….”

“초콜릿이.”

유수한의 얼굴이 화끈해진다.

“촬영하다가 당 떨어지면 저거 떼 먹으면 되겠어요.”

혼자 좋다고 배를 붙잡고 웃는 주민하를 옆에 앉아 있던 민서온이 하찮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너도 참 벌써부터 개그 센스가 그게 뭐니.”

“안 웃겨요?”

“응. 실소도 안 나와.”

“아쉽네.”

주민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메이킹 카메라를 보았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선수였다.

끼 부리는 건, 주연 4인방 중에 최고였다.

“조금 더 처연하게!”

개인 컷 시작은 역시 메인 여주 민서온이었다.

휠체어가 널브러져 있고 민서온 역시도 그 옆에 쓰러지듯 앉아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볼게요.”

바닥에는 찢어진 사진이 떨어져 있다.

조성운 사진이었다.

“숙였다가 고개 다시 들어 주세요.”

셔터음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다리를 못 쓰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포즈가 한정적이었지만, 민서온은 노련하게 촬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차례를 기다리며 유수한은 열심히 푸시업 하며 근육을 키웠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차례는 남주 유수한 차례였다.

스타일리스트 보라가 달려와 유수한의 옷 태를 점검했다. 셔츠를 뒤로 잡아당겨 어깨에 걸칠 듯 말 듯 놓은 채 높은 의자에서 촬영이 이어졌다.

“촬영 콘셉트는 아련함으로 갈게요. 쉽게 말하면 울증 온 정유환.”

고개를 끄덕이고 높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왼쪽으로 고개 틀어 주세요.”

셔터음 소리에 맞추어 표정을 바꾸었다. 복근을 더 드러내라는 주문에 아예 한쪽 팔을 뒤로하고 의자를 붙잡았다.

여러 포즈를 생각했지만, 역시 슬슬 바닥나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멋있다!”

터져 나오는 긍정적인 반응.

“복근 멋있다!”

그 반응의 주인공은 복근이었다.

푸흡.

유수한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할게요.”

솔직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복근을 어렵게 만들었으니 그만큼 칭찬받는 게 기분 좋다.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한 감정이었다. 개인 촬영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포스터 촬영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개인 촬영이 끝나면 민서온과 커플 촬영이 이어졌고 마지막은 단체 촬영이었다. 민서온과의 작업은 꽤 수월했다.

소파에 앉아 진행한 촬영이었고 메인 커플이었기에 서로의 몸을 터치해야 했다.

“가만있어.”

유수한이 뚝딱거리자 민서온이 나섰다.

“힘 빼. 넌 무슨 초짜처럼 이러니?”

초짜 맞는데요.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움직이던 민서온이 한숨을 쉬었다. 유수한의 무릎 위에 앉아 가까이 얼굴을 대는 촬영이었지만, 여러모로 걸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민서온이 촬영을 멈추고 말했다.

“아무래도 다리 못 쓰는 제가 이런 자세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포스터 촬영이었기에 어느 정도 설정을 부술 수는 있지만, 민서온은 완벽주의자였다. 뭐든 오래 걸려도 완벽하게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그 성격은 포스터 촬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수한 씨가 다가와야 맞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민서온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목석처럼 긴장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유수한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배가 여기 기대 있고 제가 다가가는 걸로요.”

민서온이 유수한이 하라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소파에 살짝 눕듯이 등을 기대고 유수한이 소파 헤드를 붙잡고 키스할 듯이 다가간다.

“괜찮네.”

민서온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유수한은 제 목을 감싸는 민서온의 손길에 흠칫 놀랐다가 웃었다. 이건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 해 보는 촬영이라 자꾸 몸이 녹이 슨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수한아, 연기해야지.”

민서온이 타이르듯 말했다.

“몰입해. 너 지금 정유환이야.”

그 말에 정신을 바짝 차린다. 점차 유수한이라는 사실을 잊고 정유환에 이입하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된 촬영을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민서온은 그런 유수한을 연기자로 바짝 조련하고 있었다.

“좋은데, 조금 더 도발적으로!”

포토그래퍼의 조언에 따라 더 거침없이 민서온에게 다가갔다. 민서온 역시도 유수한의 셔츠 깃을 붙잡고 잡아당긴다.

드라마 콘셉트에 맞는 격정적인 로맨스였다.

그리고.

“제길.”

저 자리는 내 자린데.

질투에 물든 최은호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단체 컷 촬영.

메인 주인공이 가운데에 위치했고 서브 배역들이 양옆에 선다. 유수한은 주저앉아 있는 민서온에게 다가가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주민하는 그런 유수한을 노려보고 있다. 마지막 민서온 옆에 서 있는 최은호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거만한 표정을 짓는 콘셉트였지만,

“저 이렇게 조금 더 다가가도 될까요?”

콘셉트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이은서를 짝사랑하니까, 이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최은호는 유수한을 견제하듯이 앞으로 치고 나오더니 아예 무릎을 꿇으며 민서온에게 다가갔다. 우습게도 그 행동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엄연히 남주가 존재하고 있는데, 서브가 주제 모르고 나대는 모양새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하아.”

민서온이 지친 듯 한숨을 쉰다.

하지만 그 이상의 리액션은 없었다. 이 일은 해결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만요.”

민서온의 손을 내려놓은 유수한이 잠시 촬영을 멈추었다.

“최은호 씨.”

이제는 슬슬 짜증이 치밀던 참이었다.

“이건 좀 선을 넘은 거 같은데요?”

최대한 어른스럽게 행동하려던 유수한이었다. 상대의 도발에 쉬이 넘어가지 않고 프로답게 할 일만 딱딱 하면 될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기에 최은호에게도 최대한 웃는 낯으로 대하려 했지만, 도가 지나치다. 마치 유수한을 우습게 보는 사람처럼.

“선이라니, 제가 무슨 선을 넘었다는 겁니까?”

되려 최은호가 팔짝 뛰며 덤벼든다.

이 일을 지켜보던 김민수가 중재하러 다가왔고, 최은호의 매니저도 마찬가지였다.

“매니저들은 잠깐 비켜 주세요. 이건 배우끼리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촬영장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가라앉는다.

아예 민서온은 쉽게 대화하라고 두 사람 사이에서 빠져나가며 눈치만 보고 있는 주민하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유수한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

“난 실력으로 이 역할 따낸 겁니다.”

“그래서요?”

“착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무슨 착각을 했단 겁니까? 일 열심히 하는 것도 잘못입니까?”

“일을 이상하게 하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유수한이 화를 삭이며 말했다.

“정유환은 납니다. 그리고 정유환은 남주네요?”

“…….”

“그쪽은 서브.”

“…….”

“서로의 위치를 정확히 구분해야 진짜 프로 아닌가요?”

팩폭을 당한 최은호가 입을 다물었다.

말은 멈추었지만, 눈빛은 악의가 가득했다. 여전히 케케묵은 감정이 가득 찬 눈빛이었다. 유수한은 그런 최은호를 보다가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묵직하게 두드렸다.

“나에게 배역을 뺏겼다고 생각해요?”

“그럼 아닙니까?”

“아니니까 하는 말이겠죠?”

“무슨! 부당한 방법으로 뺏어 간 거 맞잖아요!”

최은호는 당당했다.

유수한이 말 그대로 부당한 방법으로 역할을 가로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태도에 유수한은 밀려오는 한숨을 참아 내지 못했다.

“정당하게 테스트 보고 따낸 겁니다.”

왜 지금 이걸 서브 배우에게 해명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대본 리딩에서도 흠잡힐 실력 아니란 것도 증명했고.”

“그쪽 민서온이 꽂은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그 말.”

유수한이 힐끔 출입문 방향을 보며 말했다.

“민 선배 앞에서도 할 수 있어요?”

날 꽂았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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