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너 그러다 잡아먹혀
출연자 사전 미팅.
유수한은 매니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김우리 작가의 작업실에 들어왔다. 신축 오피스텔이라 깔끔했고 채광이 좋은 집이었다.
김우리 작가에게 선물로 준비한 캔들을 건네고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거실 소파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이승혁 감독이었다.
다음은.
그 옆에 앉아 있던 최은호였다.
“유수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최은호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유수한을 응시했다. 그 이유는 남자 주인공에서 서브로 밀려났기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최은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최은호입니다.”
꽉.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수한이 미간을 좁히며 최은호를 보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초면이지?”
이승혁 감독이 팽팽한 기 싸움을 깨뜨리며 물었다.
“네, 초면입니다.”
유수한은 미리 배우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주연 중에 접점이 있는 사람은 같은 소속사인 민서온뿐이었고 그 외는 초면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더 편할 때가 있었다. 아는 사람은 과거의 유수한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사람이었기에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 늦진 않았죠?”
이어서 도착한 사람은 서브 여주 주민하였다.
주민하는 하얀 얼굴에 높은 콧대가 인상적인 배우였다. 데뷔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는 그녀는 빠른 시간에 주연 자리까지 들어온 라이징 스타였다.
차가운 이미지가 다소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은 편해 보였다. 찢어진 청바지에 하얀 맨투맨 티셔츠를 입은 모습은 유수한이 그녀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 상반되었다.
“어서 와. 민하 씨.”
주연 4인방 중에 막내 포지션인 주민하는 막내다운 모습을 보였다.
김우리 작가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갔고 웃기도 잘 웃었다.
그리고.
“오늘 길에 차가 좀 막혀서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요.”
마지막에 등장한 사람은 극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민서온이었다.
“다행히 정각에 도착했네요.”
미소를 지으며 코트를 벗는 민서온은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사건 사고에 휘말리며 위치가 애매한 유수한이나 라이징 스타로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주민하, 그리고 오랫동안 서브에 머물렀던 최은호까지.
모두 민서온처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민서온은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분위기 좀 풀어 볼까요?”
집 주인인 김우리 작가가 등 뒤로 숨긴 술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술로?”
* * *
출연자 사전 미팅이라 해서.
그 거창한 말이라서 유수한은 잔뜩 긴장하고 준비했다. 이미 물망에 올라 있던 배우를 밀어내고 주인공을 차지했기 때문에 더더욱 긴장을 놓지 않았다.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게 대본이었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는.
“내가 작년에 하와이 다녀왔거든요. 면세 찬스로 좀 질렀지.”
김우리 작가는 아직 톱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방송가에서 팔리는 작가였다. 스토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작가.
그 말은 결말까지 힘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대작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을 써 내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폭망은 없었다. 어느 정도 계산이 서는 작가였기에 방송국에서 자주 찾는 작가였다.
그렇기에 김우리 작가는 가난한 작가가 아니었다. 작품 하나 끝내고 해외여행을 쉽게 다녀올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작가였다.
그래서였나.
“이거 까도 돼요?”
주민하가 손에 든 양주는 로얄살루트 21년산이었다.
“그럼요. 오늘 먹으려고 쟁여 놓은 건데.”
다양한 술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로얄살루트를 비롯한 위스키가 있었고 와인도 몇 병 놓여 있었다.
“이왕 먹는 거, 이 정도는 까 줘야지.”
그리고 이승혁 감독이 발렌타인 30년산을 들었다.
유수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김대한으로 살면서 비싼 술을 마셔 본 경험이 없었다. 기껏해야 우연히 한 모금 마셔 본 3만 원대 위스키가 전부였다.
“아, 수한 씨 지금 금주 중이지?”
침이 넘어간다.
말로만 들었던 발렌타인이 혀끝에 닿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런 술은 유수한의 집에도 널려 있었다. 하지만 금주를 선언했기에 멀리서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기만 했었다.
“아쉽네. 나도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있어서.”
이승혁 감독이 종이 백에서 원형 상자를 하나 꺼냈다.
“발베니 16년산. 물론 발렌타인 30년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처음 보는 술에 유수한은 시선을 빼앗긴다.
순간 금주고 뭐고 빈 잔을 내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토닉 워터도 있으니까, 다들 취향대로 드세요.”
제대로 술판이 벌어졌다.
유수한은 물이나 마시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주는 하몽이나 카나페였고 유수한은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이었다.
하몽은 그냥 짰다.
근데 맛있다며 연거푸 입에 넣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였다.
“좀 느끼한데.”
얼굴이 취기로 붉어진 이승혁 감독은 라면을 찾았고 익숙한 듯 김 작가가 봉지 라면을 찾아 주었다.
라면 냄새가 풍겨 오고.
사람들은 모두 취해 간다.
유수한만 빼고.
“저 진짜 서운합니다.”
그리고 복병이 나타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뿌렸다.
“저 진짜 열심히 했는데, 진짜 감독님 서운해요.”
최은호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혼자서 말도 없이 술을 마시더니 아무래도 정신줄을 놓은 게 분명했다.
“아유, 은호 씨 열심히 하는 거 다 알죠.”
김 작가가 눈치 빠르게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섭섭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최은호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굳는다.
특히 이승혁 감독은 살벌할 정도였다.
“몰랐네. 은호 씨가 서운할 줄은.”
이승혁이 술잔을 기울였다.
쨍.
얼음이 유리컵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처음 오디션 볼 때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보지?”
이승혁이 과일 하나를 포크로 콕 찌르며 말했다.
“무슨 역할이든 열심히 하겠다며?”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건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지나친 친목은 일에 지장을 주지만, 적당한 친목은 일에 시너지를 준다. 이승혁은 주연 4인방이 현장에서 가깝게 지내기를 원했다.
물론 스캔들이 나는 건 사양하겠지만, 서로 어느 정도 편해져야 연기도 수월하게 나오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현장 경험을 하면서 다양한 배우를 만나 왔다.
얼굴에 분칠하는 놈은 못 믿는다는 말.
이승혁 역시도 그 말을 어느 정도는 믿었다.
그렇지만, 현장이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배우가 가장 중요했다. 감정이 뒤틀렸다고 프로답지 못하게 행동하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최은호가 왜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프로라면 그렇게 행동하면 곤란했다.
“내가 유수한 씨에게 괜히 역할 준 거 같아?”
유수한은 곁눈질로 이승혁 감독의 눈치를 보았다.
그 누구도 쉽게 이 분위기를 깨지 못하고 있었다. 김 작가도 괜히 화장실이 가고 싶다며 달아났고 민서온은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민하는 막내답게 입을 꾹 다물고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제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게 뭔데요?”
술은 적당히 마시면 괜찮지만, 과하게 들어가면 쓸데없는 용기가 생긴다. 유수한이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없는 사람처럼 있고 싶었지만, 계속 화살이 꽂히고 있었다.
“그건 현장에서 확인하세요.”
최은호를 똑바로 바라본 유수한이 말을 이었다.
“뭐든, 연기로 보여 줄 테니까.”
유수한은 과하게 자신감을 표출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경쟁 역시도 싫어한다.
늘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관망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승혁 감독은 유수한을 믿고 캐스팅했다. 주변에서 시답잖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유수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것이 옳았다.
그게 믿고 뽑아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작은 성의였다.
“은호 씨.”
유수한이 이승혁 감독이 사 온 발베니를 들며 말했다.
“감정 상한 거 알아요. 내가 못 미더운 것도 알고.”
최은호 잔에 술을 따라 주던 유수한이 은은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표현하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작은 목소리.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쪽이나 나나, 이 업계에서 자리를 잡은 건 아닌데.”
경고였다.
네 위치나 내 위치나 비슷하니까 서로 조심하자는 말.
아니, 너 좀 조심해야겠다는 말.
“라면 붇겠네요.”
다시 자리에 앉은 유수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 어서 라면 드세요.”
* * *
“그거 맛있어요?”
사회성을 모두 발휘한 유수한은 잠시 밖에 나와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서온을 발견했다.
여배우가 담배라.
물론 인적이 드물었고 건물 뒤에 숨어서 피우고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맛있지.”
민서온이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오늘 같은 날은 저도 간절하네요. 그 담배.”
“줄까?”
“아니요. 끊었어요.”
“의외네.”
“네?”
“너 나 처음 봤을 때 담배 피우고 있었잖아.”
그랬나.
당연히 모른다.
“어떻게 할래?”
“네?”
“최은호. 쉽지 않을 텐데.”
민서온은 이 술자리에서 최은호의 야망을 엿보았다. 얼굴은 죽상을 하면서도 민서온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모습이 꽤 안타까웠다.
이 극에서 민서온을 제외한 배역은 비중이 비슷하다.
물론 남자 주인공이 그다음이겠지만, 메인 악역인 서브 남주 비중 역시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삼각관계였으니.
“조심해야겠더라.”
물론 유수한을 두둔할 생각은 없었다.
유수한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은 일정 부분을 인정하지만, 남자들의 기 싸움에 휘말릴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그저 작품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최은호가 연기는 제법 하거든. 뭐, 연기만 잘한다고 단숨에 주인공을 턱턱 따낼 순 없는 거니까. 그래도 실력은 무시 못 해.”
서브는 서브답게.
그 자리를 지켜야 작품이 빛이 난다. 하지만 지금, 서브 남주가 지나치게 욕심을 내고 있었다. 민서온은 계속 남주와 서브 남주를 비교하고 있었다. 유수한의 실력이 일취월장했지만, 아직 완성된 건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려스러운 것이다.
유수한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을 두고 보았을 때 걱정된다.
“너 그러다 잡아먹혀.”
이번에 최은호는 악역을 맡았으니,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려 할 것이다. 남주가 서브에게 밀리면 답도 없다. 그대로 흐름을 넘겨 주는 결과를 낳게 되며 대본 역시도 세세하게 달라질 것이다.
“잡아먹히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그 말에 민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민서온의 조언은 유수한에게 도움이 되었다.
최은호에 대해 더 알아보았고 그의 연기 스타일을 숙지했다. 발성이 탄탄하고 감정 표현 역시도 탁월했다.
‘너 그러다 잡아먹혀.’
그 말의 의미를 알 듯했다.
팽팽하게 기 싸움을 이어 가다가, 끝내는 상대 배우를 압도하는 연기력이었다. 오직 자신 하나만 돋보이게 하는, 윽박지르는 듯한 연기력.
이렇게 있다가는 밀릴 것이다.
처참하게.
“나는 말이야. 주제넘은 것들이 싫어.”
대본 리딩 현장.
유수한은 작정하고 미친 사람이 되었다.
“너 같은 새끼는 콱 밟아 죽여 버리고 싶거든.”
그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눈을 번뜩이는 최은호를 연기로 짓이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