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28화 (28/175)

28.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요

유수한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존의 유수한은 호감을 끌 만한 사람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그렇기에 유수한은 민서온이 보이는 적대심이 이상하지 않았다. 거꾸로 자신이 민서온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문제 있는 상대역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끼워팔기 논란 있을 거예요. 조연도 아니고 주연인데.”

민서온의 말은 그럴듯했다.

업계에서 끼워팔기 관행은 으레 있어 왔다. 서브나 조연 정도를 꽂아 넣는 행위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같은 주연이라면 말이 달라지는데, 급이 비슷할 경우에는 별문제 없이 넘어간다. 다만, 지금 유수한은 연예계 복귀를 했어도 민서온급은 아니었다.

민서온은 연달아 히트를 친 흥행 보증 수표였고 유수한은 이미 한물간 배우였다.

“그런가.”

귀 얇은 사람들이 하나둘 민서온의 말에 끌려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유수한이 주변 흐름을 살펴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민서온을 응시했다.

“제 연기는 어땠어요?”

유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선배님?”

그리고 민서온은 ‘선배님’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수한 씨, 좀 변했네.”

“제가요?”

“예전에는 죽어도 ‘선배’라는 말 안 하더니.”

민서온은 갑자기 달라진 유수한의 태도를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예전, 유수한은 민서온에게 다가와 반말을 찍찍 했고 심지어 치근덕거렸다.

그렇기에 유수한에 대한 이미지가 더 안 좋았는데, 오늘은 그런 날티 나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제가 철이 없었어요.”

“지금은 철들었다는 소린가?”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요.”

“그 말이 사실이면 좋겠네.”

민서온은 역시 부담스러운 사람이다. 예리하기도 했고 애초에 사적으로 다가가기 힘든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민서온은 유수한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 이유를 찾으려 계속 유수한을 보게 된다.

“선배님.”

다시금 유수한이 민서온을 보며 물었다.

“제 연기 어땠어요?”

물끄러미 유수한을 보던 민서온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발성이 좋아서 놀랐어. 예전에는 발음이 줄줄 새더니, 그것도 많이 고친 것 같고.”

당연하지, 무려 100 포인트를 써서 아이템을 질렀는데.

유수한이 속으로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어느새 같은 소속사, 끼워팔기 등의 화제는 한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평소 민서온이라면 유수한에게 휘말리지 않고 ‘끼워팔기’ 논란을 계속 끄집어냈을 것이다.

주연 캐스팅이 이렇게 되면 분명 ‘끼워팔기’ 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여론을 잡았겠지만, 지금 일회성 아이템 덕분에 유수한 발언에 무게가 자연스럽게 실리고 있었다.

“나도 유수한 씨 연기 괜찮았어.”

가만 지켜보고 있던 이 감독이 입을 열었다.

“유환이가 좀 애 같은 면이 있는데, 잘 살려서 좋았어요. 은서와 유환이가 극중에서 동갑이지만, 유환이가 조금 연하 같은 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살아난다고 해야 하나.”

기존 남주로 염두로 두었던 배우는 민서온보다 연상이었다. 연기력은 좋았지만, 미세하게 정유환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연기력이지만, 배우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서 역할과 너무 어긋나면 역효과가 난다.

실제로 연기 잘하는 배우도 캐릭터를 잘못 만나 미스 캐스팅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민서온 씨 말도 일리는 있어요.”

가만히 있던 김우리 작가가 전쟁에 참전한다.

“저도 수한 씨 연기는 마음에 드는데, 아무래도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유수한은 김 작가의 말을 들으며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 수한 씨가 맡고 싶어 했던 역할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고요.”

김우리 작가는 유수한에게 큰 악감정은 없었다. 난잡한 소문은 마음에 걸리지만, 잘생긴 외모와 준수한 연기력은 흡족했다.

다만, 작품에 잡음은 없었으면 했다.

유수한을 쓰면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고작 단막극으로 복귀를 했을 뿐이었고 꽃거지라는 별칭이 생겼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했다.

더군다나, 여주와 같은 소속사라면 더더욱 잡음은 커진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수한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전에 말씀드렸던 조성운은 제가 남주를 못 할 걸 알아서 욕심냈던 역할이거든요.”

유수한은 말을 고르고 골라 차분히 말했다. 지금은 아이템 빨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말 하나하나 신중해야 한다.

애초에 조성운 역을 원했고, 그랬기에 굴러 들어온 기회에 탐욕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잘할 수 있다는 걸 어필하는 게 더 순수해 보이고 한결 나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하고 싶었던 배역은 역시 정유환이었습니다. 대본을 읽으면 읽을수록 유환이가 마음에 들었고, 또 제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점차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유수한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환이는 결함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호소력 짙은 목소리.

“저도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 제게 잘 맞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하나같이 설득당해 버린다.

“맡겨 주세요.”

그 까다로운 변수, 민서온마저도 유수한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연예타파] 꽃거지 유수한, SBC 미니시리즈 ‘시간’ 정유환 역 낙점!

호소력 짙은 목소리의 효과는 엄청났다.

공식 보도 자료는 일주일 후에 뿌려졌고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 유수한 끼워팔기 오지죠?

⌞ ㅇㅈ

⌞⌞ 333

⌞⌞⌞ 4444 민서온 빽 ㅋㅋㅋㅋㅋ

예상했던 반응은 쿨하게 넘긴다.

어차피 주인공이 아니라 원래 생각했던 배역에 들어갔어도 끼워팔기라고 욕먹었을 게 분명했다.

중요한 건, 미니시리즈 주인공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드라마가 시작되고 연기로 극복하면 될 일이었다.

“오빠, 상체가 더 커졌네요?”

“근육이 붙었다고 해 줄래.”

요즘 유수한은 운동 시간을 더 늘렸다. 단막극 촬영이 끝난 후에 몰아서 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벌크업이었다.

특히 이번에 맡은 정유환은 벗는 장면이 꽤 나온다.

조울증을 겪는 환자라, 조증이 도졌을 때 옷을 벗으며 웃는 인간이었다.

“역시 미리 치수 재길 잘했어요. 저번에도 옷이 작았잖아요.”

“그랬지.”

“이번에는 낙낙하게 준비할게요.”

“그래.”

스타일리스트 보라는 처음 유수한을 보았을 때, 말도 살갑게 건네지 않고 딱딱 일만 했다. 알 만했다. 예전에도 유수한을 맡았다고 하니, 왜 그렇게 거리를 두고 벽을 치는지 말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었다.

지금은 관계 개선이 되었다.

유수한이 예전처럼 걸핏하면 화를 내지도 않았고 옷도 주는 대로 잘 입었다. 예전 유수한은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해서 주는 대로 입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자연스럽게 옷을 다양하게 준비하게 되었고 그것 역시도 일거리였다.

“치수 다 쟀어요.”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스타일리스트 보라는 대본을 분석하고 의상을 구하러 발로 뛰어다닐 것이다. 의상을 따 오는 일도 경쟁이었다.

배우는 물론이고 가수에 개그맨까지.

좋은 의상을 선점하기 위해 영업하고 발로 뛰어다닌다.

예전 이미지 좋을 때의 유수한은 따로 영업이 필요 없이 협찬이 굴러 들어왔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보라야.”

유수한이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밥 굶고 다니지 말라고.”

김대한이 유수한으로 살기 위해서 한 가지 철칙을 세운 것이 있다면 주변 사람에게 잘하는 거였다.

특히나 유수한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더 잘해야 했다.

매니저는 유수한을 위해 스케줄을 따 오고 케어를 해 주며 운전까지 해 준다. 그러니 잘해야 마땅했고, 스타일리스트나 메이크업 아티스트 같은 스태프도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잘해 주고 좋은 관계가 되어야 좋은 걸 얻어 낼 수 있다. 옷 입는 것도 중요했고 메이크업이나 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더 멋진 배우가 될 수 있다.

“어머, 감동!”

보라가 봉투 안을 열어 보고 입을 가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에 유수한이 씩 웃고는 코트를 챙겨 입었다.

“날이 많이 따뜻해졌네.”

이 몸에 들어왔을 때는 한겨울이었다.

12월이 지나 단막극 촬영을 했고 어느새 봄이 왔다.

“이러다 금방 여름 올걸요.”

김민수의 말에 유수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겠네. 요즘 봄은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그래도 추울 때 촬영하는 거보단 여름이 나아요.”

“그렇지?”

“네. 형님, 집으로 가실 거죠.”

“오늘은 본가.”

“네. 알겠습니다.”

한동안 가지 않던 본가에 간다. 유수한 모친이 하도 성화였고 더불어 부친까지도 합세했다. 부모의 존재가 없었던 김대한이었기에, 유수한이 되었어도 부모가 불편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모른 체하고 지낼 수만은 없었다. 가끔 찾아뵙고 이야기도 나누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어쨌든, 지금 김대한은 유수한이니까 부모는 부모였다.

“수한아!”

현관문을 열자마자 유수한 모친이 버선발로 달려와 반겼다.

“잘 지냈어, 엄마?”

유수한도 빙긋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처음 이 집에 머물렀을 때는 불편하기만 했던 존재가 부모였다.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사니, 이렇게 만나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매일 웃으며 유수한 부모를 대하는 건 힘들지만, 이렇게 가끔 만나면 한 번쯤은 연기를 해 줄 수 있었다.

“엄마가 너 온다고 삼계탕 푹 고아 놨어.”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아니라 일하는 아줌마겠지만.

“고마워.”

유수한이 등 뒤로 숨겨 놨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선물.”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해도 지금 유수한은 먹을 수가 없었다. 쉬는 텀 없이 계속 일을 이어서 하고 있었고 지금은 벌크업 하느라 더 몸 관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준비한 게 선물이었다.

서운해할 모친을 위한 선물이었다.

“이것도 못 할 짓이야.”

부모님에게 붙잡혀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유수한 모친은 단막극 잘 봤다고 재잘거렸고 부친은 골프 이야기가 주였다. 같이 골프 치러 가자는 말에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지금의 유수한은 골프를 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 이대로 자고 싶다.”

본능적으로 침대에 몸을 맡긴 유수한은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잠시 눈을 감고 10분간, 눈을 붙였다.

깊은 잠에 들기 직전에 부릅 눈을 뜬다.

“잠은 죽어서 자자.”

한탄 섞인 어투로 말을 내뱉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앉은 유수한은 대본을 꺼내 펼쳤다.

미니시리즈는 처음이라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극의 중심은 민서온이 맡은 이은서였지만, 지탱해 줘야 할 사람은 유수한이 맡은 역할이었다. 집중해서 대본을 읽는다.

최근 도착한 대본을 살펴보던 유수한은 점차 그 내용에 빠져들어 갔다.

보름 후.

이성실은 유수한이 부활할 기미가 보이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OKEN] 유수한, SBC ‘오늘의 데이트’ 출연!

난생처음 겪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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