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듣기 좋은 목소리 (S)
“대체 뭐지.”
이성실은 요즘 유수한 생각을 골몰히 하고 있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뇌가 이상해졌는지,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
“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놀랄 일이 많다. 유수한이 갑자기 단막극을 하겠다고 한 것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재기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유수한이 갑자기 그 싹을 보이고 있다.
“테스트가 내일인가.”
“네.”
“일단 가서 일 생길 때마다 바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갑자기 이승혁 감독이 유수한을 만나 보겠다고 말했을 때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요즘 단막극에 출연한 이후 꽃거지로 불리는 유수한에게 ‘조성운’이라는 작은 역할을 맡길 생각일 거라고. 단순히 그런 생각만 들었는데, 정작 굴러 들어온 건 남자 주인공이었다.
물론 확정은 아니었지만, 김민수의 말을 들으면 꽤 유수한을 염두에 둔 분위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버릴 패로 분류해 놨던 유수한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만약 남주에 유수한이 된다면.”
김민수가 대표실에서 나가고 이성실은 턱을 괴고 가만 생각에 잠겼다. 이미 여주에는 민서온이 낙점된 상태였다. 그리고 남주는 마지막 계약 단계라고 언질을 들었지만, 아직 확실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상태에서 유수한이 들어온다면.
“그림은 나쁘지 않은데.”
한 소속사에서 주인공을 독식하면 좋든 싫든 부정적인 반응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민서온은 검증된 카드였고 버릴 패였던 유수한이 이 드라마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부정적인 반응은 드라마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드라마 작품성이 좋고 재밌으면 주인공이 누군들 상관없어진다.
“일단 테스트 결과를 기다려 보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성실은 벌써 머리로 언론 플레이를 어떻게 할지 계산하고 있었다.
* * *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사흘.
유수한은 그 시간 동안 ‘시간’의 남자 주인공 ‘정유환’을 파악해야 했다. 열심히 대본을 읽고 캐릭터 분석을 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제 아이템을 쓸 때가 된 건가.”
[호소력 짙은 목소리 (D)]
이 목소리를 들으면 순식간에 설득당해 버린다.
제한 시간 1시간
처음 이 아이템을 뽑았을 때는 어디서 이용해야 할지 가늠이 서질 않았다. 사실 제작 발표회에서 이 아이템을 쓸까 고민했던 유수한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껴 놓길 잘했다.
“여차하면 쓰자.”
아끼면 똥 되니까.
어쨌든 지금은 작품을 분석할 시간도 없었고 실력 역시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생각보다 찌질한 연기를 잘한다고 강철수에게 칭찬은 받았지만, 문제는 아우라였다.
주인공으로서 극을 휘어잡을 실력이 아직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제 아이템 빨을 기대해야 할 시점인가.”
말로는 테스트였지만, 사실상 남주를 뽑기 위한 비공개 오디션이었다. 거기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사용한다고 해도 일회성에 그친다.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해야 옳았다. 아까워도 투자를 할 때였다. 본품을 사지 못하고 그대로 끝난다면 남은 포인트는 똥 된다.
지금 현재 포인트는 136.
그리고 S급 아이템의 가격은 100 포인트.
“이왕 살 거라면 비싸더라도 S급 사는 게 이득이야.”
아이템 카테고리에 들어갔다. 정렬은 S급으로 맞추어 놓고 리스트를 확인했다.
[표정 연기의 달인 (S)]
[액션 연기의 달인 (S)]
[눈물 연기의 달인 (S)]
[생활 연기의 달인 (S)]
여러 달인 시리즈를 지나 예전부터 갖고 싶었던 아이템에 손이 멈춘다.
[듣기 좋은 목소리 (S)]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D급 아이템인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일회성이며 고작 10분밖에 유지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템은 S급답게 영구적인 효과를 주며 부족한 발성과 발음을 완벽하게 채울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아이템 역시도 눈길이 갔다.
특히 표정 연기의 달인이나 눈물 연기의 달인은 포인트만 넉넉하다면 구입하고 싶을 정도였다.
점점 고민이 깊어진다.
“아예 A급을 두 개 살까?”
A급 아이템의 가격은 60 포인트.
지금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 두 개나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S급에 비하면 가격이 저렴한 만큼 효과도 절반으로 떨어진다.
“에라, 모르겠다.”
고민 끝에 처음 생각했던 아이템을 지른다.
[이 아이템을 구입하시겠습니까?]
[YES] [NO]
당연히 [YES]을 눌렀다.
[100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안내창과 함께 열심히 모았던 포인트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윽고.
반짝반짝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카드 한 장이 튀어나왔다.
[듣기 좋은 목소리 (S)]
발성, 발음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준다.
누구나 이 목소리를 들으면 강력한 흡입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100 포인트가 아까우면서도 S급 아이템을 하나 더 얻게 된 것이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사용하기]
망설임 없이 바로 버튼을 눌렀다.
빛과 함께 카드가 사라지고, 유수한은 멍하니 핸드폰을 보다 이내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아.”
짧게 소리를 내고.
“유수한.”
조금 더 길게 목소리를 낸다.
“당신과 내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결혼밖에 없어.”
정유환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알아? 당신은 다리가 망가졌지? 난 마음이 고장 났어.”
목소리가 선명하게 뻗어 나간다.
“하자투성이인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결혼밖에 없다고!”
예전에는 조금만 소리를 높여서 대사를 치면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연기의 반은 발성이라고 강철수가 말했다.
그리고 유수한은 그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 * *
[라이프 체인지] 운동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38>
다시 가난해진 포인트와 함께 유수한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형님, 타시죠.”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갑자기 주어진 오디션이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대본만 붙잡고 있었다.
“피곤하시죠?”
김민수가 보기에도 유수한은 지금 피곤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어, 조금.”
“커피 사 가지고 갈까요?”
“그래. 커피라도 마셔야 할 것 같긴 하다.”
마침 드라이브스루 카페가 가는 길에 있었다. 유수한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 적어 놓은 내용 하나하나 머리에 새겨도 불안했다.
지금 유수한이 읽은 대본은 총 4회차였다. 줄곧 2회차만 읽어 왔고 테스트 소식을 듣자마자 남은 회차를 읽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믿을 구석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어제 지른 S급 아이템이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서 와요. 유수한 씨.”
가볍게 악수를 하고 작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일전에 한번 보았던 김우리 작가도 보였고 조연출도 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앉아 있다.
“오랜만이야. 수한 씨.”
회사에서 포스터로 주로 보았던 민서온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뜻밖의 인물이라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런 기색은 싹 지워 냈다. 유수한은 민서온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이기 때문에 대충 찾아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역시 달랐다. 민서온은 올해 12년 차 배우였다.
나이는 스물여덟.
아역 배우로 시작한 민서온은 성인 배우로서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민서온은 어떤 성격일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긴장하진 말고요.”
자리에 앉은 수한은 정면에 보이는 이 감독과 양옆에 앉은 민서온, 김우리 작가를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조연출까지.
뭐랄까.
오디션이라기보다는 면접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대본 리딩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이 감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서온 씨는 대사 맞춰 주려고 온 거니까, 편하게.”
사실 민서온은 유수한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드라마 출연을 확정 짓고 난데없이 유수한이 남주 후보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다.
오늘 굳이 이 자리를 찾은 이유는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유수한이 출연한 단막극은 관심도 없었고 회사에서 도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유수한이 달라졌다나.
물론 민서온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오늘 유수한이 하는 걸 지켜보며 판단 내릴 생각이었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회사 내에 도는 소문도 궁금했던 참이니까.
“1회 12씬. 여기부터 해 보죠.”
유수한이 부지런히 대본을 펼쳤다.
“지석아. 카메라 세팅 끝났으면 너도 준비해라.”
“네.”
카메라를 만지던 조연출의 손이 빨라진다. 이윽고 조연출이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씬 12.”
조연출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유환, 자신의 팔을 붙잡는 정신병원 직원의 행동에 경악한다. 주변을 살피면 가족들이 모두 유환을 외면하고 있다.”
대사를 눈으로 훑고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이거 놔!”
목소리가 과감 없이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 이 사람들 뭔데? 나 지금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건데!”
유환은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릴 적, 괴한에게 납치되어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이후에 그 트라우마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병을 제때 고치지 못한 탓에 심해진 우울증은 조울증으로 번졌다.
“아니야, 엄마! 이거 좀 말려 봐!”
유수한의 연기를 다들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발성이 안정적이었고 목소리 역시도 막힘없이 뚫려 있었다.
감정에 따라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유환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왜, 내가 왜! 내가 왜 정신병원에 가야 해!”
민서온은 짐짓 놀란 눈으로 유수한을 보고 있었다. 같은 회사였기 때문에 그의 연기를 간접적으로 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발성이 가다듬어진 배우가 아니었다.
타고난 목소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잘생긴 얼굴에 기대서 연기하는 배우였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미간을 좁히며 민서온이 유수한을 응시했다.
“다음 2회 48씬 봅시다.”
다음 장면은 여자 주인공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이었다.
민서온은 담담하게 유수한의 연기를 받아 주었다. 얼굴만큼이나 연기도 잘하고 작품 보는 눈도 탁월했던 민서온은 연기 내공에서 유수한을 압도했다.
만약 아이템이 아니었다면 유수한은 민서온의 기에 압도되어 버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이템으로 발성과 발음을 잡아 놓았기에 죽지 않은 채 버틸 수 있었다.
“나 몸 죽이는데.”
유수한이 히죽 웃으며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툭툭 풀었다.
나름대로 기에 밀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뭐라도 해 보려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민서온은 갑자기 단추를 푸는 유수한에 당황한 듯 미간을 좁혔다.
“어때.”
능글맞은 유환을 연기하며 유수한이 민서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 괜찮지 않아?”
이건 마치 연기가 아니라 민서온에게 직접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자 주인공으로 괜찮지 않으냐고 묻는 듯했다.
연기를 마치고 민서온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유수한의 연기는 쓸 만했다.
그래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좋은데?”
이 감독이 대본을 넘기며 말했다.
“바로 3회 갑시다.”
테스트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됐다.
연기를 마치고 유수한은 은근슬쩍 핸드폰을 만지며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사용했다.
분위기는 좋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근데.”
민서온이 입을 열었다.
“한 소속사에서 주인공이 다 나오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역시나.
오늘의 변수는 민서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