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아임 홈리스 2
2부는 첫 장면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리에 나앉은 이지호가 거지꼴을 하고 벽에 기대 자고 있었다.
눈을 뜬 이지호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망하기 직전에도 머리를 왁스로 세우고 정장을 입고 다니던 이지호였는데, 지금은 떡진 머리에 입술은 얻어맞아 터졌고 옷도 너덜너덜해졌다.
툭.
모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그 안에 동전을 던졌다.
「시발.」
작게 욕을 터트린 이지호가 흠칫 놀라는 행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거지로 보여?」
응, 누가 봐도 거지였다.
「싫으면 다시 주든가!」
행인이 모자 안에 들어간 동전을 도로 가져가려 하자, 이지호가 냉큼 모자를 들었다. 모자 안에 들어 있던 동전은 500원짜리였다.
「치사하게 줬다 뺏냐?」
100원이었다면 동전을 집어던졌을 것이다.
「거지 새끼. 가져라 가져!」
하지만.
지금의 이지호에게 500원은 생각보다 큰돈이었다.
「어제 300원 주웠으니까, 조금만 더 모으면 소주 살 수 있겠네.」
손바닥 위에 놓인 동전을 보며 이지호가 한숨을 쉬었다. 동전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꼬르륵.
추위와 배고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굶주림을 쉽게 이겨 낼 수 없다.
「!」
몸을 일으킨 이지호가 땅을 보며 걷다가 삼각김밥 하나를 발견했다. 누군가 베어 문 흔적이 있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각김밥을 먹는다.
자존심을 최대한 지키려고 용을 쓰고 있지만, 남이 보기에는 자존심 없는 노숙자처럼 보였다. 500원짜리 동전을 거부하지 못하고, 떨어진 음식을 게걸스럽게 주워 먹는 모습은 누가 봐도 집 없는 거지였다.
「이지호.」
빚쟁이를 피해 선택한 도피처는 서울역.
이지호는 아침이 되면 역사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한다. 따뜻한 온기에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지만, 30분이 넘어가면 어김없이 쫓겨났다.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쉬고 있는데, 헤어졌던 선영이 찾아왔다.
「찾는 데 참 오래 걸렸다. 사람을 몇 명이나 풀었는지 몰라.」
무려 10년이란 세월 동안 김선영을 만났다.
소꿉친구였고 자연스럽게 감정이 생겨 오랫동안 만나 왔다. 이지호가 도박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결혼도 했을 사람이었다.
「여긴 왜 왔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이지호를 보며 김선영이 한숨을 쉰다.
「그냥 궁금해서. 아니,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김선영은 이지호를 찾아다녔다. 그와 결혼을 약속했기에 갑작스러운 이별에 대처하지 못한 탓이었다.
「소식은 들었거든. 도박 중독자라니, 정신 차려야 하는데 쉽지 않더라.」
한숨을 쉬며 김선영이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이지호가 고개를 번쩍 든다.
「이런 네 모습을 봐야 정리가 될 것 같았어.」
그 말을 하고 김선영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집어던졌다. 이지호 얼굴에 떨어지는 지폐, 그는 정신없이 그걸 줍는다.
그 모습을 보던 김선영이 미간을 좁혔다.
깊게 사랑했던 남자였기에 이렇게 달라진 모습은 여전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더, 더 줄 순 없어?」
「뭐라고?」
「한 백, 백만 원만! 내가 다 갚을게. 아니, 몇 배로 돌려줄 테니, 응? 선영아!」
사랑이 식는다. 사늘하게.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았어도 티끌만 한 감정이 남아 있던 김선영의 눈빛이 식었다. 김선영은 수행 비서에게 돈을 준비하라 일렀고 이윽고 5만 원권 지폐 뭉텅이를 집어던졌다.
못해도 천만 원은 돼 보이는 돈이었다.
「더러워.」
김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
저런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하지만 돈에 눈이 팔린 이지호는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한다. 김선영이 사라지고 이지호는 돈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 갚을 수 있어.」
그 눈이 탁하게 빛났다.
「할 수 있어…….」
“입술에 김 묻은 채로 저러니까 진짜 못나 보인다.”
쯧, 방송을 보던 유수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계속 엄마에게서 문자가 오고 있었다. 항상 드라마에서 멋진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은 처음이라 놀란 듯했다. 대충 답장을 보내 주고 다시 방송에 집중했다.
「돈 있어?」
이지호는 돈을 들고 근처 해장국집에 들렀다. 그리고 식당 주인은 이지호를 거지 취급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반응을 보일 만했다. 떡진 머리에 구멍 난 패딩은 누가 봐도 거지처럼 보였으니.
「돈 있으니까 여기 오지!」
화가 치밀었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보여 주며 으름장을 놓는 이지호였다.
그 돈도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구걸해 받은 돈이었다. 그 사실을 망각한 건지, 돈이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지호는 예전의 거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먹는 연기는 내가 참 잘해.”
굶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이지호가 해장국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굉장히 리얼하게 그려졌다.
「아, 진짜 구질구질하다…….」
배가 부르자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느낀다.
오늘 길에서 눈을 뜨면서 허기짐에 떨어진 삼각김밥을 주워 먹었다. 그러다 또 허기짐이 몰려오면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이지호였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눈이 충혈된 채로 소주를 마신다. 이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깨달을 때마다, 마음이 울렸고 계속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다 갚을 수 있어.」
그다음 이지호의 행선지는 사설 도박장이었다.
이번에는 화투였다. 카지노를 방문하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교통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들아! 너네 한패지? 어?」
또 받은 돈을 고대로 잃어버렸다.
늘 같은 패턴이었다.
초반에는 돈을 따내던 이지호는 중반이 넘어가면 벌었던 돈을 차곡차곡 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가진 걸 다 잃게 되었다.
「너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냐?」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덩치 큰 남자가 손도끼를 들고 이지호에게 다가갔다.
이지호는 도박장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손가락이 날아간 사람도 봤다. 카지노에서는 그런 일이 공개적으로 일어나지 않지만, 사설 도박장에서는 달랐다.
깡패가 연관되어 있었으니.
그대로 도박장에서 쫓겨 나온 이지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찾았다.」
그 목소리에 이지호가 흠칫 놀란다.
「네 아버지 무섭더라? 어? 돈 갚으라고 찾아갔다가 우리 모두 요단강 건널 뻔한 거 아냐?」
칼을 들고 있는 그 남자는 사채업자였다.
금융권 빚은 파산 신청을 하며 일단락 지었지만, 사채업자는 법과는 다르다. 법 테두리에서 벗어난 업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돈을 빌렸으면 싸게 싸게 갚아야지. 응?」
여태 숨어 살았던 이지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도박장에 드나들 돈은 있었나 봐? 어째, 딱 걸렸네?」
칼끝이 턱에 닿는다.
이지호가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할 건 없어. 고객님이 돈만 갚으면 다 해결되거든.」
처음 이지호가 빌렸던 돈은 3억. 그리고 이자가 붙어 현재는 10억이 되었다. 그동안 서울역에 숨어 살았던지라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도박장을 찾는 그 순간 들키고 말았다. 사채업자와 도박장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돈 나올 구멍은 없어 보이고.」
칼끝에 턱이 베여 피가 맺혀 흐른다.
「이쯤 되면 몸으로 때워야겠지?」
그 말뜻을 이해한 이지호가 벌벌 떨며 소리쳤다.
「갚, 갚겠습니다! 돈 나올 구멍 있어요. 정말이에요!」
그 순간 스쳐 지나가는 건 아버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검은돈.
금고.
「어떻게? 딱 봐도 넌 지금 아무것도 없지 않냐? 집도 날아갔잖아, 새끼야.」
이지호가 두 손을 모으고 파리처럼 싹싹 빌며 말했다.
「저는 없지만, 아버지는 있어요.」
그의 눈빛이 차분해진다.
밑바닥을 찍은 지금,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제발 믿어 주세요.」
장소가 바뀌었다.
지금 이지호는 본가에서 다소 떨어진 서울 외곽 지역에 와 있었다. 이곳엔 아버지가 숨겨 놓은 펜션이 하나 있었다.
그 펜션은 자금 관리를 위한 곳이었다.
사람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은밀한 거래를 하며, 검은돈 역시도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돈세탁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돈이었다.
그 장소를 어머니는 모르지만, 이지호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VIP들을 응대하게 했다. 그들은 이지호에게 자금 관리를 맡겼고 모두 성공적이었다.
아버지는 이지호를 신뢰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개구멍.」
아버지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우거진 정원 끝에 어린아이가 들어갈 법한 구멍이 하나 있다는 것. 사방에 CCTV가 있었고 대문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이 저택에 들어갈 방법은 딱 하나였다. 이 개구멍을 통과하는 것.
이 개구멍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이 펜션에는 개 따위는 없다. 그런데 우연히 이지호의 눈에 진돗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이유를 찾아보니 정원이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살짝 보이는 구멍. 왜 이 구멍이 생겼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은밀했다.
패딩을 벗고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괜히 구멍을 크게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작은 소음도 위험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몸이 도움이 되었다. 겨우 개구멍을 빠져나온 이지호는 팔에 난 생채기에 미간을 좁혔다.
거기서 얌전히 기다린다.
보안 관리자는 가끔 졸음을 쫓으려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그리고 한 시간가량 지나자, 보안 관리자가 담배를 들고 나왔다. 그 틈을 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이지호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
소파에 앉아 골프채를 마른 수건으로 닦고 있는 아버지가 눈에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이 시간에 왜.
「쥐새끼가 다 되었더구나.」
골프채를 쥐고 몸을 일으킨 아버지가 이지호에게 다가갔다.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지.」
「…….」
「네놈에게 사람을 붙여 놨다.」
「!」
「궁지에 몰린 쥐새끼는 가끔 정신이 회까닥 돌거든.」
「아버지.」
「바로 지금 너처럼 말이다.」
이지호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다 알고 계셨어요?」
「뭘 말이냐? 네가 길에 떨어진 빵을 주워 먹은 거? 아니면 사채업자에게 걸려서 돈 갚겠다고 이 애비를 팔아넘긴 거?」
「저, 저는 아버지 자식이 맞아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이지호는 항상 아버지에게 맞고 살았다. 시험에서 문제 하나만 틀려도 골프채로 얻어맞았다. 맞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했고 늘 완벽한 사람이 되려 노력했다.
「제가 이렇게 된 건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 안 해요? 아버지가 날 쥐고 흔들지만 않았어도! 제가 도박에 빠질 일은 없었어요!」
「감히!」
아버지가 골프채를 들어 올리며 화를 냈다.
「감히, 누굴 탓하는 게냐!」
휘익.
골프채가 휘둘러진다. 이지호는 자신의 머리를 갈기려는 골프채를 피했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눈에 핏발이 섰고 짐승같이 울었다.
「진짜 아버지라면 그러지 않아!」
아무리 악마 같은 아버지라 해도 이미 나이를 먹은 사람이다. 아직 젊은 자식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늘 순종하고 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자식이었기에, 이렇게 달려들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아버지의 패착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골프채를 빼앗은 이지호가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퍽!
이미 머리를 세게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버지를 향해 끊임없이 골프채를 휘둘렀다. 화면엔 이성을 잃은 이지호의 얼굴이 비추어진다. 타격음이 수없이 울리고 잔혹한 핏빛이 퍼져 나갔다.
「약속한 돈.」
이지호는 피에 물든 채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경호원이 달려들었지만, 식칼을 들고 휘두르며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약속한 장소에서 돈 가방을 던졌다.
「야, 이 새끼 보소.」
사채업자는 돈 가방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진짜 돈을 가져왔네?」
이지호가 식칼을 든 채 터벅터벅 사채업자에게 다가갔다. 돈 가방에 정신이 팔린 그는 이지호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야.」
이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
「내가 죽으면 말이다.」
이지호가 무릎을 굽혀 사채업자와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다 너 때문이다.」
푹.
자신의 배에 칼을 꽂은 이지호가 바닥에 엎어진다.
「시, 시벌! 이, 이게 뭐여!」
사채업자가 당황한 그 순간,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형님! 지금 짭새가……!」
「나도 귀 있어, 이 새끼야! 이게 대체 무슨!」
다음 날.
뉴스에는 전날 벌어진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보도되었다.
「지난밤, 이강욱 검사장이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용의자는 아들 A모 씨로 보이며 유서와 함께 목숨을 끊은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아들 A모 씨의 죽음과 관련하여 수사 중에 있으며 현재 사채업자 B모 씨를 검거, A모 씨 살해 정황이 있는지 조사 중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화면이 점차 흐려진다.
지지직.
어딘가 방송이 끊기는 소리가 들리고.
모든 빛이 사라진다.
그렇게 아임 홈리스가 끝이 났다.
“진짜 끝이다.”
막막하고 아득했던 데뷔작이 끝났다.
사실 대본에는 에필로그가 있었지만, 극의 여운을 위해 과감히 삭제한 듯했다. 에필로그에서는 도박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한 이지호의 상상이 그려진다.
“네, 감독님.”
단막극 반응을 찾아보려던 순간, 최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 진짜요? 다행이네요.”
최 감독은 실시간 시청률 추이가 나쁘지 않다며 웃고 있었다. 내심 올해 단막극 시즌 최고 시청률인 4.6%를 거뜬히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연예토크] ‘아임 홈리스’ 유수한 연기 변신 성공! 찌질한 모습에서 잔혹한 살인마까지.
살인마라는 말이 붙을 정도였나?
뭐, 사람을 죽였으니 어쨌든.
[OKEN] ‘아임 홈리스’ 빅잼은 아니지만, 몰입도는 최고! 유수한의 재발견!
[연예뉴스] 어디까지 망가지나? 유수한, ‘아임 홈리스’ 신들린 꽃거지 연기
적당하다.
개인적으로 유수한은 재발견이라는 단어가 좋았다. 기존의 유수한 이미지에서 탈피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칭찬처럼 느껴졌다.
[HOT] 유수한 연기 변신. 꽃거지 모음 +138
서서히 커뮤니티에서도 반응이 올라오고 있었다. 유수한이 그동안 하지 않았던 종류의 연기였고, 제대로 망가지는 모습에 좋은 반응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프 체인지] 단막극 첫 방송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100>
드디어 포인트 100점을 쌓았다.